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사도행전 성령강림 설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사도행전 2:1-13)

성령의 능력 2024. 3. 2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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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성령강림 설교 말씀은 오순절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 성령 하나님이 임재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성령님이 강림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었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때 성령 하나님도 강하게 역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사도행전 2:1-13)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귀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입니다. 부활절 없는 오순절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귀중한 역사적 사건의 연결선상에서 오순절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순절 없는 부활절은 단순히 역사적 객관적인 사건으로 남을 뿐입니다. 지식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또한 부활절 없는 오순절 역시 단순한 환상사건에 불과합니다. 주관적인 신비체험에 불과합니다.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력도 없습니다. 주관적인 지식에, 주관적인 신비체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객관적 계시인 이 부활절이 없이는 오순절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의 역사가 없는 부활절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부활절이 있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효력도 내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라는 객관적인 문제와 성령의 역사라는 주관적인 문제를 반드시 함께 생각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사람들-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신비롭게 신기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생명력이 발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다 할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도 저들은 여전히 골방에 숨어 있습니다. 혹은 물고기를 잡으러 나섰습니다.

심지어 저들은 벌벌 떨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이제 오순절을 맞고야, 성령의 강림을 맞고야 완전히 새사람들이 됩니다. 그간,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건 하나하나가 새롭게 깨달아지고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사건, 그 귀한 진리, 그 귀한 말씀에 간절히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함으로 주저 없이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들이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부활절과 오순절을 연결해서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진리의 근본입니다.

오순절 성령사건을 좀 더 학술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철학적 지식이 종교적 신앙으로 바꾸어지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종교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에 불과하게 됩니다. 설령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 하더라고 특별한 생명적 역사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도 보면 성경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못 받은 분이 있습니다. 아는 것은 많아서 말은 곧잘 하는데, 그 가슴은 싸늘합니다. 그 생활 속에 중생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 증거의 역사가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런 교인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화끈하게 체험한 것은 같은데 객관적 지식이 없습니다. 성경적 지식도 없고 교리에 대한 이해도 없습니다. 늘 혼미한 가운데 뜨거운 마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경우 역시 생명력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나, 성경적으로 볼 때에 사건과 사건에 대한 신앙, 부활절과 오순절,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체험이 아주 중요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올바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순절사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봅시다. 오순절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가 아닙니다. 어느 사람이 진리를 발견했다던가, 어느 사람이 도를 통했다던가, 어느 사람이 계시를 받았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어느 사람의 특별한 경건이나 도덕성을 말하고 있지도 않고, 어느 사람의 위대한 인격을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순절은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 하심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직접 역사 하심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아주 강하게 와닿는 세 단어가 있습니다. '홀연히' '임하다' '충만하다'가 그것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 오순절은 생각지 않은 때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한 때에 하늘로부터 홀연히 나타난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늘로부터 성령께서 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임하다' 라는 말은 위로부터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수직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충만하다' 역시 오순절이 우리 인간의 사건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결국, '홀연히' '임하다' '충만하다'는 모두 오순절이 하나님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말들인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의 본문은 오순절을 맞아 성령의 임하심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랐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놀랐다는 이야기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사건, 곧 오순절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오순절은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요, 어떤 깨달은 바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저 본 대로 들은 대로 그 역사적 사실을 특징만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건을 기록하고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 문화권의 사람들입니다. 구약을 알고, 그 종교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오순절사건은 당연히 저들이 가진 종교적 언어, 히브리 문화의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저들이, 히브리 문화권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들이 알도록, 저들이 이미 알고 경험한 그 안에서 이 사건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사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오순절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사건입니다. 두 번째, 이것은 집단적인 사건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산에 가서 기도하고 계시를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순절은 적어도 백이십 명 이상의 사람이 집단적으로 함께 체험한 사건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것은 어디에도 방해받는 바 없이, 또렷한 정신으로 맞은 사건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환상이 아닙니다. 네 번째로, 이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오순절을 위해서 기도한 것도 아니요,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다가 맞이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기는 했습니다만, 성령께서 이렇게 나타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생소한 사건입니다. 처음으로 보는 사건입니다. 예상하지 않았던 사건이 여기에 나타났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도행전 21절로부터 오순절사건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오순절사건은 큰 사건이고, 작은 오순절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건들이 사도행전 곳곳에 네 번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로 모두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431절을 보십시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작은 오순절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14절 이하에도 보면 사마리아에 작은 오순절 사건이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44절로 48절에 보면 고넬료의 집에 이 오순절사건이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사람의 집에도 오순절 같은 사건이 있어서 모두가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196, 7절에 보면 에베소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오순절사건이 사도행전에 네 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다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오순절사건을 생각해 보십시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이 오순절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본디 유대사람들이 소중히 지키는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유대에는 일주일에 걸쳐 지키는 아주 중요한 절기가 셋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그것입니다. 이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그 절기를 다 함께 지킵니다. 온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사람들까지 가능한 한 다 모여서 그 절기를 지킵니다. 특별히 여기에는 유대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이방종교를 버리고 유대종교로 개종한 이방사람들도 참예합니다. 따라서 이 절기에는 히브리 종교와 이 종교에 가담된 모든 사람들이, 민족적으로는 각 나라의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아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임으로 온 세계에 소문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듯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바로 그 시간,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오순절을 선택해서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오순절에 맥추(麥秋)감사절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사람들은 감사절을 두 번 지키는 셈입니다. 저들이 추수하는 모든 곡식 가운데 첫 번째로 추수할 수 있는 곡식이 바로 보리거든요. 보리를 거두어들인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을에 가서는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곡식을 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다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감사절을 두 번 지키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만, 우리의 농촌도 옛날에는 맥추감사절이라고 해서 보리를 거둔 다음에 감사제를 올렸습니다. 하루 날을 정해서 보리를 거둔 뒤에 감사절을 작게 한번 치르고는, 다시 가을에 가서 크게 감사절을 치렀습니다. 그런 예가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맥추감사절은 비록 여러 곡식을 다 거두어들인 뒤에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첫 번째 거두어들인 곡식이라는 점에서, 첫 것을 바친다는 점에서 의미상으로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감사절이 됩니다. 그런 의미로 저들은 오순절을 가장 즐거운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유대사람들의 절기가 다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유월절만 해도 그렇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올 당시의 고생을, 그 출애굽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쓴 나물만 먹습니다. 저도 그 쓴 나물을 한번 먹어보았지만 무척 힘이 들더군요. 비스킷 같이 바삭바삭하기만 한 누룩 없는 빵과 함께 쓴 나물을 먹습니다.

이런 것을 먹으며 일주일을 보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은 애굽에서 한 고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뿐인가요? 그것도 허리띠를 풀고 짐을 지고 먹으라고 합니다. 우리도 625 당시 피난 가던 일을 생각하면, 그 고생을 좀 재현할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경험한 사람들까지도 그 고생을 다 잊어버렸는데 후손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꿈속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출애굽사건을 잊어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절기를 만드시어 일주일 동안은 이렇게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쓴 나물만 먹고 지내는 고통스러운 일주일입니다. 정신적으로는 중요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아주 고통스러운 절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장막절은 이스라엘사람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유리 방황하면서 고생하던 그때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광야에 나가야 합니다. 광야에 천막을 치고 지내야 합니다. 광야에 못 나가는 사람은 마당에라도 천막을 치고 지내야 합니다. 집안에서 편하게 자면 안 됩니다. 집에서 자면 경건치 못한 사람입니다. 이 절기 동안 이스라엘사람들은 다 천막 속에서 지내야 합니다.

뜨거운 사막의 한가운데서 말입니다. 이것이 장막절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역시 고역스러운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천막 안에서 하루종일 성경을 강의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부흥회를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이 3대 절기 가운데 가장 즐거운 절기입니다. 먹고 마시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금년에도 곡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첫 곡식을 바칩니다. 그리고 모두가 먹고 마시고 즐기고 찬송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계속 읽고 암송하고 가르치고 하는 것입니다. 추수와 함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감사절입니다. 즐거운 절기입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고행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때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하는 바로 그런 시간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성령께서 임하시는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성령을 바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람이라고 다소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성령이라든가, 사람의 영이라든가, 하나님의 영을 가리켜 '루아크'라고 합니다. '루아크'는 본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헬라어로는 '푸뉴마'라고 합니다. '푸뉴마'역시 '바람'을 뜻합니다.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3:8)"-----푸뉴마 프네이입니다. 이렇듯 저들은 ''을 바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라고 하면 어딘가 모르게 약간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귀신이라든지 혼령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옛사람들은 이 영을 가리켜서 성신이라고 했습니다. 성신(聖神) - 거룩한 귀신입니다. 이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영이란 말이 그리 좋은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만을 바탕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성령-이것은 원문을 보면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바람입니까? 보이지 않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힘인 이 성령은 분명히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큰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은 확실한데 보이지는 않습니다. 바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거든요. 눈에는 안 보이지만 나무를 흔들어놓습니다. 바다를 흉흉하게 합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확실히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바람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성령을 바람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람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바람은 바람인데 하늘로부터 온 바람이라고 합니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닙니다. 동풍이나 서풍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바람입니다. 또한 이 바람은 급한 바람입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바람소리와도 같이 성령이 급하게 쏴하고 내려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람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바람이 온 집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쏴하고 강하게 불더니 방안에 가득합니다. 급하고 강하게 내려온 바람이 이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무슨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오순절을 맞아 모인 저들 모두가 이렇듯 희한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바람이 몰려왔습니다. 급한 바람이 갑자기 내려와서는 움직이지를 않고 온 집에 가득합니다.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모두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느낌이 180도로 확 바뀌고 영이 몸을 떠나는 것 같은 아주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오늘의 본문말씀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사실 이러한 체험은 이미 다 겪은 것입니다. 이사야가 경험한 바 있으며, 엘리야가 경험한 바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를 대체로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특히나 유대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본문은 성령의 임재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3)"라고 말씀합니다. 불도 아니고 혀도 아닌, 불의 혀 같은 것이 오늘에 나타나 각 사람의 머리에 머물렀다는 말씀입니다. 헬라원문대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잠깐 번쩍 하고는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계속 머물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모르지만, 저들의 머리 위에,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불같은 혀가 머무는 것을 저들이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선택하신 자에게 임하시는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말씀의 역사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충만함입니다. 헬라어로 '플레도스'라고 하는 이 충만함은 누가의 전용어입니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출생을 중심 해서 되는 사건 속에 나타난 마리아나 엘리사벳, 그리고 시므온 같은 사람들이 충만함을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말씀인 사도행전에도 이 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충만이라는 말은 다른 사도들의 서신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이 말은 강한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어떤 때에는 가시적으로, 어떤 때에는 물질적으로, 어떤 때에는 우리가 충분히 체험할 수 있도록, 어떤 때에는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어떤 때에는 생명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봅니다. 아기 예수를 통해서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몸에 그리스도가 잉태되어 있음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 초자연적인 일들입니다. 아주 특별히 강권적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시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 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신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 충만이라는 것이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고 구원받고 하는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중생의 역사요 은혜의 역사일 뿐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고 중생하고 성화하는 성령의 역사를 충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쓰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좀 구별해서 말씀드리면, 이것은 은혜적 역사가 아니라 은사적 역사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은사적 역사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모두가 다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충만이 구원의 절대조건일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도 화끈하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봤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시련을 이기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이 충만함을 주시기도 합니다. 순교자가 순교하는 순간이 충만함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핍박 가운데서 담대하게 전할 때에 충만함을 주십니다. 이것은 은사적이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케 하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충만함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공관복음적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사도행전적 성령의 역사라고도 표현합니다. 어쨌든 은혜와 은사로 구별 지어 말할 때에, 이 충만은 은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을 하기 위해서, 전도사역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성령의 역사를 충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말씀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 -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모두가 방언으로 말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언어가 중요하고, 그 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언어적, 문화적 배경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기가 가진 선입견이 더욱 중요합니다. 자신이 가진 전이해(前理解)가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우월감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 부부 간에도 보면 일생을 함께 했는데도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국말을 해서 안 통하는 것입니까? 마음이 없어서 안 통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꽉 막혔으니 통할 리가 없지요. 이렇듯 언어라는 것이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보면 외국사람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자는 미국사람이라 영어로 말하고, 여자는 한국사람이라 한국어로 말합니다. 그런데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타코마에 가보면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 여자와 미국 군인이 결혼해서 잘들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곳에 가보니 그런 분들만 모이는 아주 큰 교회가 있습니다. 주일이면 남편들도 함께 나와서 예배를 봅니다. 한국말을 모르는 채 통역도 없이 예배를 봅니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그곳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하고 있는 제 친구에게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데 무슨 재미로 살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이런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요. "사랑을 말로 하나." 그렇습니다. 사랑이 말 가지고 되나요. 간혹 문제가 있는 가정들도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잘들 삽니다.

여러분은 언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에 방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방언은 서로 말이 통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보십시오. 지금 여기에는 각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니 통역을 세우기로 들자면 한 사람으로 모자랍니다. 몇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인도 같은 데에 가서 설교를 하려고 할 때에도 적어도 네 명 정도의 통역관을 세워야 한답니다. 말이 각기 달라서 못 알아들으니까요. 우리 민족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기에 모릅니다마는, 사실 말이 안 통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거든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에 볼 것 같으면 방언을 함으로써 모두가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적 편견이나 우월감이나 고집이나 문화적 장애를 다 극복하고 마음문과 마음 문이 복음 안에서 통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완전 소통입니다. 이것이 방언의 특징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이나 14장에도 보면 이 방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방언은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방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못 알아듣는 방언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적 방언은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모였다 할지라도 성령을 받음으로 모두가 알아듣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의 특징입니다. 이상한 소리 하는 것, 적어도 사도행전적 방언은 이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exact communication, 아주 효과적인 소통을 의미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8절)." 저들이 방언으로 말한다기보다는 듣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놀란 것입니다. 듣게 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 이렇듯 각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 방언이 전부 자기 나라 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헬라사람에게는 헬라말로, 로마사람에게는 로마말로, 애굽사람에게는 애굽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완전히 통한 것입니다. 그러니 깜짝 놀랄밖에 보십시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입이 방언을 한 것이 아니고, 귀가 방언을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방언하는 사람의 특별한 경건도 아니요, 특별한 재주도 아니요, 특별한 기적도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베푸는 기적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어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서 통역을 해버린 것입니다. 서로 소통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입니다. 따라서 방언의 근본은 성령의 충만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할 뿐입니다.

본문은 다시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11)"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무슨 사업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언어가 통역 없이, 문화적 장애 없이, 장벽 없이 그대로 통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오순절교회라는 말을 합니다. 오순절교회가 무엇입니까? 말씀의 역사가 소통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어떤 말씀을 듣는지 내 마음에 그대로 들어와서 백 퍼센트 수락이 되고, 믿어질 때에, 그 말씀에 의지하게 될 때에 이것이 바로 오순절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떤 말씀을 한 시간 내내 들었는데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못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듣게 하고, 마음 문을 열게 하고, 자기 우월감이나 교만을 다 버리게 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대로 통하게 하는 것이 오순절교회입니다. 그리스도사건을 영접하게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 앞에서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이것은 기적이다, 새 술에 취했다, 알 수 없는 놀라운 일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사건-이것이 교회의 본체입니다. 여기서부터 교회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해되고 믿어지고 받아들여집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할 때에, 듣는 자와 말하는 자의 사이에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실 때에, 거기에 구원이 있고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치유 설교말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행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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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치유 설교말씀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성전에 들어가다가 구걸하던 사람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지만 너에게 주노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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