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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설교 말씀] 예수의 일꾼이 되어 삽시다(로마서 15:14-33)

성령의 능력 2024. 3. 25.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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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장 강해 설교 말씀은 예수님의 일꾼이 되어 우리가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평생 예수님이 주신 직분을 소중히 여기면서 교회에서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예수님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예수의 일꾼이 되어 삽시다(로마서 15:14-33) 

 

설교자들은 청중들이 그 설교자들이 선포한 말씀을 다 기억해 주기를 물론 소원합니다. 그러나 청중 편에서 생각할 때 그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기억되는 설교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들은 어떤 선교사님의 인상 깊은 설교를 매우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서투른 한국말로 선교사님이 설교하셨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그대로 기억합니다. 그때 선교사님은 선한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를 가지고 설교하셨는데 제가 그 아우트라인이 그대로 생각이 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종류는 없어야 만 될 사람, 둘째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셋째는 꼭 있어야 하는 사람, 세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없어야 만 했던 사람, 그들은 길에서 강도질을 했던 강도들입니다.

둘째로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 그들은 지금 강도 만나 쓰러진 이 사람 곁을 그대로 지나치고 있었던 사람들, 레위인, 제사장들, 그 시대의 대표적인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강도 만나 쓰러진 이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나 도움이 될 수 없었던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꼭 있어야 될 사람, 없어서는 안 될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아주 단순한 아우트라인이 명쾌하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뇌리 속에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꼭 있어야 될 사람을 가리키면서, 예수의 일꾼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16절에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꾼이 되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일꾼,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일꾼이라는 이 단어는 매우 독특한 희랍어 단어 하나가 쓰이고 있습니다. 바울이 보통 자기를 말할 때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 이라고 말하는데, 종이라는 단어와 다른 매우 독특한 희랍어 단어 하나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 공무원들, 공적인 사역자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 당시 희랍 사회에는 주로 네 가지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한 종류의 사제들, 또 하나는 합창단원, 또 하나는 운동가, 네 번째는 군인을 가르칠 때 일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제들은 신에게 제사드리는 사람이고, 합창단원은 말할 것도 없이 노래 부르는 사람이고, 운동가는 그 당시에 토취, 횃불을 들고 레이스를 하던 경주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때 희랍의 시민들은 네 가지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면, 사제들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신에게 접근할 수 있고, 합창단원으로 인해 인생이 즐거울 수 있고, 운동가들이 있어서 삶의 활력을 느낄 수가 있고, 그리고 군인들이 있어서 안심하고 우리가 살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네 가지 종류의 소위 직업적인 사람들에 관해서 고대 희랍사람들 특별히 아테네 시민들은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

곧 아테네 시민들의 프라이드였습니다. 이들은 명예로운 공적인 봉사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그들의 지역사회(community)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일꾼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단어가 사제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로 의미가 좀 변했습니다. 이 단어는 꼭 있어야 할 사람, 없어서는 안 될 봉사자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명예로운 일꾼을 가리킬 때 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가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신을 예수의 일꾼이라고 소개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가 예수의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하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의 일꾼, 하나님의 일꾼, 우리가 이런 평판을 받을 수가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복된 삶일까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예수의 일꾼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 편에서의 사랑 혹은 호의를 뜻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 2:8을 다같이 암송해 봅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구원받은 것 만이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좀 다른 각도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구원을 받은 자로서, 구원을 받고 보니 이 은혜가 소중하고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또한 구원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내가 내 사랑하는 가족, 내 사랑하는 이웃,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영생에 동참할 수 있도록 구원하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런 의미로 은혜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더욱 담대히 너희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다음 16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의 일꾼이라는 말을 이 구절에서는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나는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동참시킨 이 하나님의 복음, 이제 이 복음을 다른 사람이 듣고 예수 없이, 하나님 없이 살던, 복음 없이 살던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방인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는 내가 복음의

제사장이 된 것 이것이 또한 은혜가 아니냐? 구원받은 것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이방인들을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주님 앞에 바치는 이 놀라운 삶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냐.” 고 생각한 것입니다. 은총의식,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엄청난 특권을 주셨다는 특권의식이 바울 사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을 계획하면서 내가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겼으면 좋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의무로만 생각하면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한 달 동안 노력하다가 거기서 끝날지 몰라요. 그러나 이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전도할 수가 있다는 것, 천하 보다 더 귀한 영혼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놀라운 특권입니다. 이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그들과 더불어 사랑을 나눌 수가 있다는 사실은 주께서 내게 주신, 감당할 수 없는 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기쁜 마음으로, 감격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주 앞에 드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1800년대가 저물어 가는 후기에 영국의 가난한 소외계층을 상대로 복음전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전도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당시에 무감각하고 부도덕성에 빠져가고 있던 영국 사회 속에 충격을 가했습니다. 영국 사회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강력한 복음전도, 그리고 이웃에 대한 그의 구제의 사역, 사랑의 사역, 이것들이 잠들어 가는 영국 사회를 흔들어 깨워, 영국사회를 일대 변혁시키는 운동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사람이 구세군 운동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904년 킹에드워드 7세는 월리암부스를 버킹검 궁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서 그에게 치하의 말씀을 했습니다. “당신 정말 수고했소, 당신의 수고 때문에 이 사회는 달라질 수 있었소그러면서 킹 에드워드 7세는 앨범하나를 내놓고 사인을 하라고 했습니다.

보통은 왕의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거꾸로 이 왕이 월리암부스의 사인을 받기를 원해서 앨범하나를 내놓았습니다. 그 앨범에 역사에 남을 만한 명구를 월리암부스는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폐하시여!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성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입니다. 그러나 폐하시여! 나의 야망은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날 때 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더 귀한 가치로 정말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가 있다는 이 사실,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은혜,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은총의식이 바울 사도로 하여금 내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한 것이라면 우리도, 주의 일꾼으로 내 남은 여생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 꼭 필요한 존재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께서 진실로 여러분에게 전도할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같은 특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가 일군 되어야 할 이유는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새해가 되면 자랑할만한 여러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시킨 계획은 악한 자랑이고, 허탄한 자랑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말짱 헛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대부분의 자랑거리, 우리가 친구나 이웃을 만나 우리의 입 속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랑거리들을 분석해 보면 속 내용이 전혀 없는 헛된 자랑이 얼마나 많은지요. 전도서의 기자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들입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단어는 추운 날씨에 여러분이 아침에 밖에 나가서 입김을 불면 포물선을 그립니다. 잠시 후에 사라집니다. 그런 단어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의 자랑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허다한 자랑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예외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1절에 보면 예수님께 대한 자랑, 주님께 대한 자랑만은 복된 자랑 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지혜, 우리의 구원, 우리의 능력,

우리의 소망, 그리스도는 진실로 우리들의 자랑이십니다. 진실로 예수님께 대한 자랑은 아무리 자랑해도 모자람이 없는 저와 여러분의 자랑일 것입니다. 예수의 일꾼의 보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주님의 일꾼이 되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어떤 보람이 있다면 그 보람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찬송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 찬송을 작사한 존 뉴튼이란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경험을 통해 반드시 발견하는 세 가지 놀라운 체험이 있다.

첫째는 내가 죄인이라는 발견,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래도 용서하신다는 사실이고 세 번째 놀라운 것은 그런 나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나를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쓸 것이 있어 나를 부르시고 사용하고자 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바울이 그 자랑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17절을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18절에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의 일꾼으로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로 말미암아 말하게 하시고, 일하게 하시고, 말씀을 주시고, 일감을 주시고, 위대하신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메시지를 주시고, 이 말씀이 단순한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내가 행하는 그 일이 단순한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표적을 주시고, 기사를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는 바울이 전하고 있던 메시지를 입증하기 위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 마지막절 16:20에 보시면 다른 표적으로 말씀은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전한 메시지가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승인하신 메시지였다는 사실을, 불신의 사회에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은 바울의 메시지에 따르는 표적과 기사를 부여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주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맡기실 때는 반드시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 그냥 나가서 전도만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권세, 귀신을 쫓는 능력을 동시에 허용하셨습니다. 병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의 전도와 예수님의 제자들의 전도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란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승인하신 놀라운 하나의 표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께서는 능력으로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가장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이 있다면 어디에서 입니까? 선교의 현장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의 말씀 앞에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불신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증거 하게 될 때 그 메시지를 입증하고 보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역 가운데 주께서 함께 하셨던 일들은 잠시 회고했습니다.

나에게 말씀을 주시고, 나에게 일감을 주시고,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일감이 하나님의 일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하신 일입니까?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꾼 된 특권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이런 이야길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게 되면 성도들에게 꼭 한 가지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 창고에 그리스도인들이 만약 청구만 하였더라면 쓸 수 있는 자원들이, 기도만 했었더라면 우리가 붙들어서 사용할 수 있는 무한대의 능력이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주님 나를 써 주십시오. 내가 부족합니다. 내가 연약합니다. 내가 말도 할 줄 모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이렇게 주 앞에 나를 내놓기만 하면, 하나님이 쓰시기를 원하면 쓸 수 있는 능력을 주께서 허용하시지 않으실까요?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위대한 가능성을 낭비하고 그것을 사장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올 때 주께서는 능력을 준비하시고 그 권능을 사용해서 한평생 한번 주님의 일을 놀랍게 할 수 있게, 위대한 가능성을 주셨건만 우리는 조그만 부분도 사용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저 유명한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아주거친 대리석, 돌을 보면서 미친 사람처럼 친구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다비드가 걸어 나온다. 다비드가 걸어 나온다.”라고 그것은 거친 돌이었어요. 이 돌이 다듬어지기만 하면 거기서 다윗상이 만들어질 놀라운 가능성을 그는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를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형편없는 제자인가 성경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넘어지며, 쓰러지며, 엎어지며, 계획하고 잘 취소하고 그대로 살지 못하고 하는 제자였습니다. 이런 시몬 베드로를 처음 만나던 그 순간,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를 만나고 예수님께서 처음 주셨던 제일성이 이 어떤 메시지였습니까?

네가 장차 게바라 하리라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주신 별명입니다. 그 뜻이 뭡니까? 반석입니다. 여러분 반석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중한 반석,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반석, 이 반석의 이미지가 베드로에게 어울립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쉴 새 없이 포기하고 넘어지고 또 쓰러지는 그의 연약성을 보시면서도 그가 참으로 그의 삶이 주 앞에 드려지기만 하면 주께서 그의 삶을 붙잡았을 때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터전으로 반석처럼 쓰임 받는 시몬의 가능성, 시몬의 위대한 내일의 가능성을 바라보시면서 내가 장차는 게바라고 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하고 우리에게 남은 여생을 살까요? 우리의 연약성을 바라볼 때마다 낙심하는 자들임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가 아닙니다. 능력은 주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이 주님 앞에 내 삶을 내놓을 용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내가 가진 온갖 무력함과 그리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를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내놓기만 하면 내게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위대한 일을 나타내시며, 한평생 하나님의 능력을,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으로 생애를 사는 가능성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 삼으셨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152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나아가면서 예수님의 축복을 가져가길 원합니다. 우리는 축복하면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입니다. 소위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오복, 오래 살고, 돈 벌고, 부자 되고, 아들 낳고, 딸 낳으면 안 되고-- 하는 등의 축복들 말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런 축복을 연관시켜서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의 축복관이 너무나 물질적입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 비판의 상당 부분이 정당한 비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잘못되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정당한 몫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빼앗는다면 그 비판은 너무 정도를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축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부하다 제 마음속에 얼마나 넘치는 은혜를 받았는지 몰라요. 제가 축복이라는 한 제목을 가지고 성경구절을 뽑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경은 축복의 책이다.”라고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는 진실로 축복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나서 하나님의 첫 번째 행위가 어떤 행위였습니까? 창세기 1:28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처음 인간을 창조하시고 28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셨어요? 복을 주십니다. 창조된 인간에게,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첫번째 역사는 축복의 역사였습니다. 축복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범죄 했습니다. 인간의 최초의 범죄 그리고 타락의 사건 때문에 축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이 타락의 장입니다. 타락의 사건이 지나간 후, 창세기 5장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5:2를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축복의 주제가 다시 되풀이되고 있는 장면을 보세요. 타락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 축복하시겠다는 선언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범죄와 타락도 불구하고 사람을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6장에 노아의 홍수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다시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했습니다. 드디어 심판이 왔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지나간 후 창세기 9:1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 생존자들에게 다시 어떻게 약속하십니까? 축복을 주십니다. 축복의 주제가 다시 되풀이되어 지속되고 있는 이 장면을 보십시오! 유명한 창세기 12:2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믿음의 조상 신앙공동체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 중의 하나가,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내가 복을 받은 후에, 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 구약 중에 가장 위대한 구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 때문에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정확하게 창 12:3에 근거하여 바울 사도는 어느 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놀라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8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가리켜서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은 복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방인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을 갈라디아서 3:8에서는 구원의 축복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이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를 통해서 메시아가 오시고 메시아를 영접한 사람들이 예수 없이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위대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물질적인 축복으로 국한시키지 마세요.

이제 메시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 없이 캄캄한 사망, 흑암 속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 놀라운 축복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전도가 축복을 나누어주는 행위인 것을 믿으십니까? 가장 위대한 축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한다 해도전도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영혼이 지옥으로 가도록 버려둔다면 그것이 효도입니까? 제가 조금 전에 소개한 구세군의 창설자 월리엄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서 기도드렸어요.하나님,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의 지옥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들은 뛰쳐나가 이 복음의 불붙는 가슴으로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웃들에게 나눌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으로 돌아와서, 로마서 15:19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보면, 동남쪽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탈리아와 마케도니아와 독일의 접경 지역을 가리켜서 일루리곤이라고 말합니다. 서북쪽의 끝입니다. 동남에서 서북쪽의 끝까지 바울은 자기가 갈 수 있는 발걸음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미 복음이 들어간 곳보다는 들어가지 않는 지역, 남의 터를 밟지 아니하고 바울은 아직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과 사람을 찾아 그가 갈 수 있는 모든 곳으로 나갔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복음만 전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전도만 하면 되는가?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는 예루살렘으로 먼저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기근이 들어 많은 성도들이 궁핍함에 처해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서, 그 물질적인 구제를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우리가 축복을 나눌 때 우리가 항상 극단에 빠지면 안 됩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만 하면 되는가요? 아니에요. 바울은 물질적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또한 그들을 돕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지역에 자기가 전도한 성도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복음이 시작된 예루살렘 지역에 기근이 들어 많은 성도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저들을 도웁시다.”라고 바울은 헌금을 모아 가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나누고 또한 물질적인 헌금을 동시에 그들과 나누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거쳐서 나는 마침내 로마로 가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발걸음은 로마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28절 읽어보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겠다! 이 한 작은 거인의 불타는 야망을 보십시오. 스페인은 그 당시 땅끝이었습니다. 내가 서반아까지 가기 전에 만족할 수 없다. 나는 로마에 있는 당신들을 만나 축복을 전하고 또다시 영적인 축복을,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한 후에 나의 발걸음은 스페인까지 미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한 세상을 살고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남기고 떠나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인생으로 창조하실 때 축복하신 하나님, 왜 축복하셨을까요? 우리가 축복만 받을 것이 아니라 받은 축복으로 이웃들을 축복하고,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축복을 남기면서 떠나가는 인생이 되십시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얻은 놀라운 축복을 이 세상 땅끝까지 가서 이 축복을 나누고 떠나길 원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이 한 해 동안 받으시고 그리고 이 축복을 이웃들과 후회 없이 나누는 삶, 그 삶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말씀] 고린도 교회 분쟁과 분열에 대한 책망(고전 1:10-17)

 

[고린도전서 말씀] 고린도 교회 분쟁과 분열에 대한 책망(고전 1:10-17)

고린도전서 설교 말씀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분열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많은 은사가 나타나고 은혜가 있었지만 싸움이 일어나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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