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고난주간 주일설교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왜 죽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원죄와 자범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주간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려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마 27:50-56)
Ⅴ. 그리스도의 죽으심 27:50-56
드디어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1. 마지막 숨을 거둘 때의 모습(50)
그는 제 삼시와 제 육시 사이 곧 우리의 기준대로 해서 오전 9시와 12시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제 구시가 막 지날 즈음 곧 오후 3시와 4시 사이에 숨을 거두셨다. 그때는 바로 저녁 희생물을 드리던 때로서 유월절 양이 죽었던 때였다.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셨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주목해야 될 내용이 두 가지 있다.
(1) 그는 이전과 같이 지금도 '크게 소리 지르셨다'(46절).
1) 이것은 그가 모든 고통과 고역을 치르고 나서도 그의 생명이 여전히 온전할 뿐 아니라 강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힘이 없어서 가느다란 소리를 내게 된다. 즉 그들의 말소리는 매우 작았고 숨을 헐떡거리고 또 말을 더듬기 때문에 몇 마디의 말만 가까스로 알아듣고 대부분의 말은 거의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바로 전까지도 온전한 힘을 가진 사람처럼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강제적으로 요구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자기의 생명을 그의 아버지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2) 이것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가 죽을 때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의 죽음이 온 세상에 공표되어 알려져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은 희생 제물이 바쳐질 때 불리는 나팔 소리와 같은 것이다.
(2) 그 후에 그의 '영혼이 떠나셨다,' 이 말은 흔히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이 진정 그가 받은 격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의 영혼이 몸과 분리됨으로써 그의 몸은 실질적으로 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죄에 대한 번제물로 삼으신 것이다.
2. 그의 죽음과 함께 수반된 기적들(51-53)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을 때 아주 많은 기적들이 그에 의해 역사되었으므로 그가 운영하실 때에도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51). 우리 주 예수께서는 바로 저녁 희생물을 드리던 때 돌아가셨는데 이때 '성소 휘장'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갈라졌다. 성소 휘장이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나누었던 휘장이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에 있어서처럼 이 기적 속에서도 하나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었다.
1) 그것은 지금 힘을 잃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전과 같았다. 죽음은 우리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는 육체의 휘장을 찢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러했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 또한 그러하다.
2) 그것은 구약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성전의 휘장은 은폐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들을 제외한 어떤 사람도 지성소를 보는 것은 대단히 큰 죄를 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제사장들도 일 년에 단 한번 큰 의식이 있을 때에만 짙은 연기 속에 쌓인 지성소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지성소와 관련된 모든 것이 드러났으며 또 그 신비도 아울러 벗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자는 그것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3)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이 사이에 놓인 칸막이 벽과 같은 의식법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을 연합시키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의식법을 아무 효력도 없게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아 놓았다. 그리스도는 나누게 하는 모든 휘장을 찢고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4) 그것은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거룩하게 열고 있는 것이다. 그 휘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광의 지성소로 가까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 휘장을 찢으심으로써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열어 놓았다. ①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지성소의 바깥뜰에서 그의 희생 제물이 바쳐졌으므로 그 피가 이제는 휘장 안에 있는 시은소에 뿌려지게 된 것이다. 그는 40일 이상이 지날 때까지도 몸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성소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곧바로 그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었으며 실제적인 허가도 받았다.
②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사도들은 이런 뜻으로 이 말씀을 적용하고 있다(히 10:19, 2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에게 데려가시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던 죄와 분노의 휘장을 찢기 위해서 죽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롭게 은혜의 보좌 혹은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며 장차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히 4:16). 그리스도께서는 심히 고통스러운 죽음을 이기시고 모든 성도들에게 천국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우리가 하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
(2) 땅이 진동하며. 이 지진은 여기서 두 가지 뜻으로 나타난다.
1)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가공할 악. 땅은 이와 같은 짐을 지고 전율함으로써 핍박했던 자들의 불경건을 증거 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성취. 지진은 강력한 충격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악마의 왕국에 가해진 결정적인 타격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든 열방의 소망이 도래할 모든 열방을 진동시키는 것이다.
바위가 터지고. 땅에서 가장 단단하고 견고한 바위조차도 이 강력한 충격을 느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호산나'를 외치지 않게 될 경우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말씀하셨었다(눅 19:40). 그런데 그 돌들이 이제 실제로 고난 받는 예수의 영광을 외치면서 그가 말한 대로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반석이시다. 따라서 이 바위들이 터진 것은 그 반석이 터진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반석이 터진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 때문이었다. (1) 이는 모세가 호렙에 있는 바위틈에 숨었던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그 바위틈에 숨도록 하려는 것이다.
곧 바위틈에서 우리가 모세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2) 이는 그 바위의 틈에서 생수가 흘러 광야 가운데 있는 우리를 지키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할 때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완악하고 바위 같은 마음을 깨야만 한다. 옷을 찢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야 하는 것이다. 바위보다 단단한 마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 십자가에 달렸는데도 굴복하여 녹아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4) 무덤들이 열리며(52절). 바위를 터지게 한 지진이 '무덤들'을 열어 놓은 듯싶으며 또한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지 몸이 자는 침대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의 권세로 말미암아 깨어나서 '예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53절). 우리는 이 일에 관하여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은 이 일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무덤에서 일어난 이 '성도'들은 누구였나. 어떤 사람은 이 성도들이 가나안 땅에 묻혔던 고대의 족장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지만 그보다 먼저 죽었던 그 당시의 성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외쳤던 순교자들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은 먼저 그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이다. (2) (어떤 사람이 생각하듯) 그들이 그리스도가 죽은 그 당시에 살아났으니 그가 부활하시기까지 성에 들어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까지 소생하여 일어난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불확실하다. 다만 여기에서는 무덤들이 열렸다는 것만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처럼 부활하여 더 이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그들의 영광에 더 합치된다.
분명 그리스도의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에게 두 번째 죽음이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을 것이다. (3) 원수건 친구건 간에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자주 나타났으며 또 무엇을 말하고 행동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들이다. 이 문제가 아주 간절하게 언급된 것은 분명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려고 그런 방법에 몰두해선 안되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로부터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살았던 사람들뿐 아니라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그 일로 말미암아 구원의 유익을 얻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정복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무덤에서 일어난 이 성도들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주어지는 승리의 트로피였다. (3) 그리스도의 부활 덕분으로 모든 성도들의 몸은 때가 차면 다시 부활할 것이다. 이 사건은 마지막 날에 있을 전반적인 부활에 대한 확실한 전조였다.
3. 사형을 집행한 자들의 뉘우침(54)
(1) 뉘우친 사람들 :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 (1) 군병들로서의 그들의 직업은 대개 비정했으며 또 그들의 마음은 일반적으로 두려워하거나 불쌍한 인상을 주는 다른 사람들처럼 동요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을 깨뜨리고 낮추시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향하여 그렇게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2) 그들은 로마인들 곧 이방인들이었는데 그들만이 뉘우쳤다. 여기에서 이방인들은 마음이 온유해졌으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완악해졌던 것이다. (3) 그들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들이며 누가 복음 23:36에 나타나는 것처럼 방금 전까지도 그리스도에게 욕설을 퍼붓던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는 권세를 통하여 순식간에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변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2) 그들을 뉘우치게 한 방편들 : 그들은 그들을 두렵게 했던 지진뿐 아니라 그들 앞에서 벌어진 다른 기적들도 보았다. 그들이 아무리 다른 임무를 맡고 있다 해도 그들의 주 임무는 바로 이러한 사건들을 보는 것이었다.
(3) 뉘우침의 표현 : 이 표현은 두 가지로 나타나 있다.
1) 그들이 느낀 공포 :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은 어둠 속에 묻히거나 지진이 일어나는 곳으로 빨리 들까 봐 두려워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적들 중 가장 용감한 자라도 쉽사리 두려워하도록 하실 수 있다. 죄는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 그러나 땅이 변(시 46:1,2)할지언정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2) 그들의 입에서 나온 증거 :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것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던 중요한 문제로서 그와 그의 원수들이 서로 논쟁했던 것이었다(마 26:63, 64).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고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구주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모두에게 버림받은 극한 고통을 겪으셨던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백부장과 군병들은 그리스도인처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는 자발적인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제자도 이전에 이보다 더 고귀한 신앙 고백을 하지는 못했다. 그 당시 그들은 이와 같은 고백을 할 만한 믿음과 용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4. 그를 섬기던 자들의 참석(55, 56)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1) 그들은 누구였나 :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들이었다(55절). 유감스럽게도 그의 제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요한 복음 19:26에만 요한이 십자가 곁에 감히 나타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요한을 제외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비굴하게 그를 버렸을 때에도 어리석은 여자로 불릴 만큼 대담하게 그에게로 나왔던 일단의 여자들이 있었다. 연약한 여자도 종종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곳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용기를 가졌고 결단을 내렸던 것으로 잘 알려진 여자 순교자들도 있었다. 이 여자들이 여기서 어떻게 언급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1) 그들은 그리스도를 몹시 사랑했기 때문에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왔다. 그러나 남자들만이 유월절에 예배를 드리도록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의무가 있었다. 여하튼 그들은 긴 여행을 하면서 그를 따라왔기 때문에 그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가 이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고 고난 받은 것이 우리에게서 입증되어야, 그리스도를 끝까지 신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겼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허락만 받았다면 그들은 지금 얼마나 기쁘게 그리스도를 섬기려 할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섬겨야만 한다. (3) 그들 가운데 일부는 특히 이름이 잘 알려진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인물들로서 끝까지 칭찬받은 여자들이었다.
(2) 그들은 무엇을 했나 :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1) 그들은 '멀리서' 서 있었다. 그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그의 상처를 멀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더 가까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선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의 친한 친구들 가운데 일부가 그들을 꺼리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선 안된다. 만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든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먼저 이런 일을 당하셨다는 것에 대해 기억해야 한다.
2) 그들은 그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자 그들은 그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슬픔이 가득 찬 눈길이기도 했다. 이처럼 괴롭게 그를 바라보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가히 상상이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 및 그가 십자가에 달린 것을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의 크신 사랑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즉 그들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를 도울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계셨을 때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구경꾼들과 방관자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태복음 산상수훈 고난주간 설교말씀]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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