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갈라디아서 6장 주일설교말씀] 율법주의 할례 경계 말씀(갈 6:1-18)

성령의 능력 2024. 3. 17.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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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 주일설교말씀은 율법주의 할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참 복음을 들었는데도 율법주의 할례에 빠져 복음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거짓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을 것일ㄹ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거짓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율법주의 할례 경계 말씀(갈 6:1-18)

 

. 성도의 교제 6:1-10

1. 범죄한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라는 권고(1)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 의미는 돌발적인 유혹에 의하여 죄를 범하게 된다는 뜻이다. 계획적이고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과 '범죄한 일이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범죄한 일이 드러난 자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한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유의해 보자. (1) 범죄한 일이 드러난 자들을 바로 잡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다. '바로 잡다'라는 본래의 의미는 어긋한 뼈를 제자리에 맞춘다는 뜻이다. 우리는 용서를 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시키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시키면서 그들을 바로 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는 '온유한 심령'으로 이와 같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

형제의 실패를 보고 의기양양해서도 안되고 분노의 감정으로 대해서도 안된다. 매우 필요한 책망도 분노로써 할 때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나 관용을 가지고 책망을 받는 사람들의 복지에 대해 진심으로 염려하면서 책망을 하게 될 때는 그들도 당연히 감명을 받게 된다. (3)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온유함으로 책망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는 우연히 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들도 그와 같은 처지를 당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책망받게 될 것을 깨닫게 된다.

2. 서로의 짐을 지라는 교훈(2,3)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2). 이것은 앞절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이것은 서로에 대해 자제하고 동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더 일반적인 교훈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것은 우리가 여러 가지 시련이나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동정하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인 그리스도의 교훈과 일치하는 행동이며 또한 우리 때문에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된 그의 모범적인 행동과 일치하는 행위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짐을 지우는 대신 서로의 짐을 지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바울은 그가 칭찬했던 성도 간의 겸손이 교만 때문에 상당히 큰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교만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3).

바울은 실상 그 자신이 보잘것없으면서 상당히 대단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은 그 자신을 속일 뿐이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있는 척 가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 자신을 가장 기만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들은 과오를 범할 염려가 있으며 또한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자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과오를 범하고 유혹에 빠지기 쉬운 자들이다. 왜냐하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기만보다 더 큰 속임수는 없다.

3. 자기 자신의 일을 살피라는 권고(4,5)

우리는 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계획한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은 이런 행동들을 살피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이런 행동들을 하나님 말씀의 규칙에 따라 진지하게 음미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시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어울릴 것이다. 우리의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보다도 우리에게 더 편안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만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과 습관을 더 잘 알수록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더욱 동정하여 도와주게 된다.

[1] 자신을 살피는 것은 바로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음을 기뻐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아주 열심히 우리 자신의 일을 살필 경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평가했거나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얻은 좋은 평판을 통해 기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분께 입증시킬 수가 있다. 비록 우리 자신 가운데 자랑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기뻐할 만한 것을(한글 개역 성경에는 '자랑할 것'으로 되어 있음-역주)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 대해 증거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충분한 근거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기뻐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게'하는 참된 방법은 '자기의 일을 살피는'데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건 뭐라고 말하건 그리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2] 바울의 또 다른 논지는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는 것이다(5).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에 대해 낱낱이 진술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또한 바울은 그날에 심판이 있게 될 거소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참으로 어떻게 행했는가에 따라 선고가 있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장차 진술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면 우리는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실지 어떨지를 알기 위해서 종종 스스로 진술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4. 아무 값없이 자유롭게 사역자를 섬기라는 권고(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듯이 그런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서 가르치는 자들과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구별하게 되지만 성경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표명하고 있다. 사역자들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에 따라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말씀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들이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영적인 것으로 뿌리는 동안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 서로 공정한 것이다.

5.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라는 경계(7,8)

이런 잘못은 하나님이 단순한 신앙 고백으로 기만당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7).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허세를 보이면서도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자기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기 쉽다.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까지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만당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만홀히 여김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의 현시대는 씨가 뿌려진 시대와 같다. 그러므로 저 세상에선 큰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때에 우리가 지금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거두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준다. 즉 씨를 뿌리는 데 있어서 두 가지로 분류되듯 그 수확도 이에 따라 거두어질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8). 다시 말해 현세에선 소박하고 순간적인 만족을 얻는 데 불과하지만 세상 끝날에는 파멸과 불행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 참된 위로를 받을 것이며 또 세상 끝 날에는 영생의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분명 우리가 관계해야 할 하나님은 장차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우리가 실천한 것에 따라 보상을 해 주실 것이다.

6.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경계(9)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일에 너무 큰 상처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의무를 지키는 일에 피곤하여 싫증을 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열심히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보상을 받게 된다. 비록 우리가 받아야 할 보상이 지연된다 해도 우리는 분명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7. 모든 성도들에게 선을 행할 것을 권고함(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우리가 선하게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우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야만 한다.

[1] 이 의무의 대상은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우리의 관용과 자비를 너무 협소한 범위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가정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제외시켜서는 안 되겠지만 믿음의 가정들에게는 더욱더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2] '기회 있는 대로' 선을 행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법칙: (1) 우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또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을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것을 무시해서도 안되며 우리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 이러한 일을 하겠다는 핑계로 그것을 죽을 때까지 연기해서도 안 된다. 그때엔 다른 사람들에게 행할 선한 일들이 우리의 뒷전에 남게 됨으로써 더 이상 우리 스스로가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선을 행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의 일생사업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2)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모든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기회를 주실 때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그것을 선용할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믿음의 가정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다.

. 거짓 선생들의 정체 6:11-18

사도 바울은 여기서 본 서신을 마무리 지으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그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대필을 하지 않고 친히 큰 글자로 썼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재차 거짓 선생들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편지를 마무리 지을 수 없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들에 대한 바울 자신의 애정 때문이었다.

[1] 거짓 선생들의 정체 :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12). 그들은 종교의 형식에는 매우 열성적이었지만 참된 경건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었으며 스스로 율법도 지키지 아니하였다. 때때로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에 열심인 사람들이 종교의 본질에 관해서는 가장 문외한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억지로 이방인 개종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하였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그들은 안일한 생활을 하고 또 세상적인 재물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자기 자신들의 믿음과 양심이 파탄된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에 열심을 품기보다 세상적인 목적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할례 받기를 원했던 이유는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육체를 자랑하려 함'이었다.

[2] 반면 바울은 우리에게 그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1) 그의 유일한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 가뿐이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유대화된 선생들 자신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일과 구원에 필요한 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혼합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하였으며, 십자가 외엔 그 어떤 사상이라도 혐오하고 거부하였다.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지니고 있는 소망의 근거를 나타낸다. 그가 십자가를 자랑한다 함으로 그 어떤 시련이 그에게 올지라도 그는 그 시련을 받아들이며 그 시련 가운데서 기뻐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십자가를 기뻐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모든 기쁨과 소망이 그 십자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그는 위에서 십자가의 웃음과 고통을 둘 다 취하였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처럼 무관심하였다. 우리의 사랑하는 구세주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식어 버리게 된다.

3)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중점을 할례나 무할례에 두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인에게 두었다(15). 그들이 큰 관심을 기울인 것에 바울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할례와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참 종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참 종교의 본질은 그리스도들의 여러 종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존재하는 데 있다. 즉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곳에 참 종교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변화에 의해 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헌신하여 살아갈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주 예수를 믿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어떤 외적인 신앙 고백이나 특별한 명성으로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게 우리를 천거할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이 참된 신앙을 직접 경험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험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일에 제대로 관심을 쏟았다면 할례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전과같이 할례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바울이 바랬거나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소망과 기대를 갖게 한 축복은 '평강과 긍휼'이었다(여기서 소망과 기대란 말은 기도와 언약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축복은 그들 속에서 역사된 은혜로운 변화에 근거한다. 바울은 이 은혜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될 것으로 선포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유대적인 선생들은 할례 받은 사람들이 이 축복들을 받는 것으로 한정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이 규칙은 그들이 직접 고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 진정 이 규칙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평강과 긍휼을 얻게 될 것으로 확신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최선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장차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되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다.

[3]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을 받았다(17). 그는 이미 그리스도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가 가진 흔적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견고히 붙잡았기 때문에 그의 대적들로부터 계속적으로 받았던 핍박들을 나타낸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와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을 쏟기에 어울리는 온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로 그의 교회와 권위를 반대하거나 그를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괴롭혀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기꺼이 고난을 견뎌내는 가운데 그 진리들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한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매우 불의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고백에 어긋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도 고통이 되는 것이다.

[4] 사도는 그의 사도적 축복으로 서신을 맺는다(18). 바울은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애정 어린 기도로써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이것은 사도의 소원을 나타내는 고별사로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견고히 서고 또 인생의 모든 시련을 겪으며 죽음을 대하게 될 때 용기와 위로를 얻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다. 갈라디아에 있는 이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잃어버릴 정도로 행동하였지만 그는 그 교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그 은혜를 열심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에 있고 또 그들은 그 은혜를 통해 계속적으로 영적인 감화를 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우리는 더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없다. 바울은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이 은혜를 바라도록 용기를 주기 위하여 아멘이란 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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