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강해설교 말씀은 율법과 대언자들을 성취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말씀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율법과 대언자들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마 5:17-18)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모두 성취되리라.(마 5:17,18)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율법을 성취하시는가? 이 질문은 너무나 놀라운 것으로 우리를 경배와 숭배로 이끕니다. 주님은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정확한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하셨습니다(갈 4:4). 우리의 제한된 마음으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이 말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 아래 나셨다는 성육신에 관한 중요한 진리 중 하나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율법 위에 계시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율법을 지키셔야만 했던 분으로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율법 아래 두셨을 때만큼 분명하게 거룩한 율법의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특성을 보여 주신 적은 없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복음서를 읽으면 이 개념이 얼마나 완전하게 참된 것인가를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셨는가를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설명해 주셔서, 계속해서 율법을 확증하시고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주장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때에 '아무도 자신에게서 어떤 잘못도 발견할 수 없으며 자신에 대해 어떤 고소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에 대해 고소를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율법 앞에서 그분을 고발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충분히 성취하신 삶을 사셨고 완전하게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어떠한 작은 항목도, 일 점 일 획도, 범하거나 성취하는데 실패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탄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삶에서 율법 아래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전(全) 믿음의 중심인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묻게 됩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못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거듭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복음주의의 본질은 십자가에 대하여 말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참된 교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순전히 감상적인 태도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꾸짖으셨던, 이른바 십자가의 비극을 생각하며 슬피 울던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우리에게 일종의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전(全) 목적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안에서 연민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며,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일반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오직 율법의 관점에서만 이해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친히 자신의 거룩한 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정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며, 율법이 선고하는 판결은 사형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고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깨뜨린 모든 사람에게 필히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죄의 형벌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 형벌은 죽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께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율법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형벌을 따로따로 두실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그분께서 법령으로 정하신 형벌을 집행하지 않기로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과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여러분과 제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형벌이 그같이 죽음으로(역자주:그리스도의 죽음) 집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형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법은 완전무결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 있는 거룩하며 흠 없고 점 없는 자신의 아들의 몸으로 죄를 처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율법의 성취라는 엄밀한 관점에서 십자가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십자가 위의 죽음에 관한 성경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가장 이상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곧 죄로 인한 형벌을 친히 자기 안에 와 자기 위에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죽으심으로, 구약성경의 모든 예표를 성취하신 것을 봅니다. 레위기와 민수기를 읽어 보십시오. 태운 헌물과 희생물들에 관한 모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장막과 성전 의식과 희생단과 씻는 물두멍 등에 관한 모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상세한 말씀들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차린 빵(shewbread)과 대제사장과 기구(vessel)와 기타 이 모든 것들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들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최종적으로 성취될 것들의 그림자요, 예표요, 대언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님은 실로 이 예표들 하나하나를 문자적으로 성취하시고 수행하시고 실행하셨습니다. 혹자는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세부사항을 발견할 수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리가 되는 위대한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과 행하신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예표와 그림자의 완전무결한 성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이시며, 주님은 헌물(offering)이시며, 주님은 희생물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하늘에 드리심으로 의식법의 전 항목을 그분 안에서 성취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주님께서는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고 자신을 하늘에 드리심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님께서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와 우리를 통하여 율법을 성취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2-4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논거(論據)입니다. 바울은 매우 분명하게 이것이 왜 주님께서 죽으셨는가에 대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약하여 할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죄 때문에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이는 육신을 좇아 걷지 않고 성령을 좇아 걷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 방법을 함께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주님이 친히 율법을 성취하신 방법과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5 장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그분은 율법의 의(義)를 성취하십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성취해야 합니다. 둘은 함께 역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과 율법으로 사는 권능을 주십니다.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께 대적이 됨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느니라"라고 사도 바울은 같은 로마서 8 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받은 우리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적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율법에 복종합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에 복종합니다. 그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육신을 좇아 걷지 않고 성령을 좇아 걷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다음과 같이 보십시오.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새 언약을 맺고자 한다. 새 언약과 옛 언약과의 차이는 이 같으니, 내 법을 너희의 생각과 마음에 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내 법을 너희밖에 있는 돌판에 쓰지 않고 육체의 마음 판에 쓰겠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8장에서 다룹니다. 그는 8 장에서 새 언약, 곧 새로운 관계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 아래에서 율법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율법을 성취하는데 열심이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쓰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림으로 이 모든 것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율법과 대언자들에 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미 대언자들의 대언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성취되었는가를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성취되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율법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여드린 바와 같이 의식법(儀式法)에 관해서는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곳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의 삶에서 의식법을 준수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준수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의식법은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의 확증으로, 후에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죽으실 때, 이미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고, 마지막으로 성전과 성전에 속한 것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단이시며, 희생물이시며, 씻는 물두멍이시며, 향이시며, 그밖에 모든 것 되심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레위기의 율법 조항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분께서 나의 태운 헌물이요, 나의 희생물이요, 나의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의식법은 아직도 내게 적용되고 있으며, 내가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실현된 것을 보며, 그분을 믿고 그분께 나 자신을 복종시킴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법에 관한 입장입니다.
시민법은 어떻습니까? 시민법은 본래 특별히 하나님의 신정국(神政國)으로서 그 당시 특별한 상황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신정국가(神政國家)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사역의 말기에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의 왕국을 너희에게서 빼앗아, 그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21:43의 말씀으로, 대언과 관련하여 전(全) 성경에서 가장 중대하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9,10 에서 새로운 민족이 교회임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정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민법 역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도덕법이 남았습니다. 도덕법과 관련한 입장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기서 영원하고 영구한 것,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항상 존속해야 하는 관계를 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첫째가는 큰 명령이라고 칭하신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명령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명령은 단지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온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둘째 명령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도 역시 이스라엘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옛 의식법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 대한 영원한 상태요, 그분께 대한 우리의 영구한 관계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 신약성경에 의해 해석된 바와 같이 - 지금까지 존속해 왔듯이 지금도 존속하고 있으며, 시간의 끝까지 그리고 우리가 완전하게 될 때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 사도는 서신서를 읽는이 들에게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죄는 여전히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상기시켰습니다. 요한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여전히 율법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봅니다. 왜냐하면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율법은 아직 거기에 있습니다. 비록 내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비록 내가 유대인이 아니었을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죄를 범할 때 나는 율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현재 입장입니다.
미래에 관하여 저는 단지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궁극적으로 왕국이 온 땅에 미칠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말하는 돌이 온 세계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지금 진행 중이며, 마침내는 성취될 것입니다. 율법과 대언자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완전히 실행될 것입니다. 율법을 깨뜨린 자는 궁극적으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결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내 뉘우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죽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그들에게 내려질 선고는 "저주받는 자 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가 될 것입니다. 그들을 그와 같이 정죄하는 것은 율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은 모든 점에서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시된 것을 이용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義)의 표현인 율법의 정죄 아래 거할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필히 이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대한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행위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 장이 논증하는 전부입니다. 구원은 그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생활의 규칙으로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에 관해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가지려 하며, 율법을 은혜에 반대되는 무엇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때 율법의 언약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율법은 은혜와 반대될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은혜 언약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율법을 은혜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그리고 홀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가 지금 너희에게 율법을 준다. 너희가 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의 참 특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죄의 심히 죄 됨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약속이 주어진 후 430 년 후에 온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점과 우리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속에 많은 대언과 많은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은혜로 충만하여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율법과 관련한 모든 희생물과 의식(儀式)도 역시 동일한 일을 행하도록 계획된 것임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성경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태운 헌물과 의식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그러한 것들은 단지 유대인과 다른 이들이 사용한 것으로 비교종교의 관점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이교도 의식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약 복음을 실지로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예식과 의식은 하나님께서 상세하게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너는 삼가 모든 것을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만들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율법에 관한 이러한 모든 관점들이 단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율법에 관한 거짓 견해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은혜에 관하여 거짓된 견해를 갖습니다. 그들은 은혜는 율법과 별개의 것이며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소위 도덕율폐기론(Antinomianism)으로서, 죄악 되고 게으르며 나태한 형태의 영적 삶을 살기 위하여 은혜의 교리를 남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행하든 나는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 안에 거하겠느뇨?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은혜에 관하여 전적으로 잘못된 거짓 견해입니다.
은혜의 전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 단지 우리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점은 우리가 자주 이 점에서 거룩에 관한 거짓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성화(sanctification)를 받아야 할 체험으로 간주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받았다고 말하는) 소위 은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리적인 체험을 경험했는지는 몰라도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하며, 그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셨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분의 명령을 지키기를 열망합니다. "나의 명령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두 가지를 분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는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로 반드시 율법을 사랑하도록 인도하며 이 율법을 지키기를 열망케 하는 이 새 마음과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19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그러므로 가장 작은 이 명령 중 하나를 어기고 또 그와 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누구든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것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의 왕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죽으시기까지 삼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원히 영존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 장에서 주님은 이를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주님, 주님, 하고 말하는 자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요? 십계명과 도덕법입니다. 십계명과 도덕법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대속하시고,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정결케 하사 선한 일들에 열심인 특유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디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의가 성경기록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지 않고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너희가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주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어려운 것이었고, 동시에 영광스러운 진리에 관여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율법과 대언자를 보고, 이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며, 율법에 관한 보다 깊은 견해를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관점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 위에서 집행된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처형하셨다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속죄의 대속 교리는 그가 율법을 완전히 실행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완전무결하게, 능동적으로,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적극적으로 친히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모든 예표는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대언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구속 사역의 결과는 하나님을 거슬러 율법을 깨뜨리고 있는 우리 비참한 반역자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 곧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 놀라운 감정이나 체험을 경험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며, 모든 점에서 그분을 닮은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로 -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본문에 의하면 율법의 일점 일획까지 전부 없어질 수 있는 방법으로는 오직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즉, 반드시 하늘과 땅이 없어지거나 또는 율법이 성취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당신이나 내가 율법을 성취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율법을 없어지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율법이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동안 모두는 율법의 저주 아래 정죄를 받고 있다. 이것이 복음이 온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분의 일은 율법과 대언자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불의한 것이며 그분의 본성과 모순된다),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율법은 의로우며 하나님과 사람을 묶는 계약이다. 율법은 단순히 폐기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믿는 이들을 위하여 이 계약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셨다.
믿는 이들에게 율법은 지나갔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들은 육신을 좇아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걷는 자들이니라"(롬 8:1).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의(즉,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믿는이들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롬 8:3,4). 율법은 하나님의 축복과 죄를 위하여 지불해야 하는 영원한 죽음을 얻기 위하여 의를 요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의롭게 사셨고, 그들의 위치에서 그들의 마땅한 죽음을 대신 죽으셨다. 참된 믿는이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되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율법의 정죄와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사복음서 성경공부자료] 공생애 사역 이전의 예수님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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