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9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율법주의 이스라엘의 수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방민족은 야만인처럼 생각하고 부정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특정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판도는 달라지게 됩니다. 율법주의 신앙을 가졌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온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의를 얻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을 그대로 본받아서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행위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행위로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마지막 날에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주의 이스라엘의 수치(롬 9:30-33)
30절 티 운 에루멘 호티 에드네 타 메 디오콘타 디카이오쉬넨 카텔라벤 디카이오쉬넨 디카이오쉬넨 데 텐 에크 피스테오스
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0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이 표현은 14절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14절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반대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의미로 쓰였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나니 -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철저한 율법 속에서 의의 성취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이 버림받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의 죄악을 무시하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 된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받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변화는 오직 믿음에서 난 '의'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흑암에 거하던 이방인들 속에서 복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그들의 믿음으로 성취되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믿음에서 난 의요 - 이방인들이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방인 속에는 어떠한 윤리와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못한 윤리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거나 또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그 '의'의 개념은 윤리와 도덕이 아닌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asemann).
유대인들이 '의'의 성취를 위하여 그토록 노력하였으나 '의'의 성취는 불행하게도 이방인 가운데서 성취되었다. 사도는 이것은 믿음에서 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가 약속의 자녀요 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의로 여기신 바 되었던 것이다(3:28, 30).
사도는 마침내 이방인 영접과 유대인 배척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여기서 못 박고 있다. 물론 이들이 차이가 지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지만 그들의 찾아가는 노력에 차이가 있었으며 따라서 그 성공에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오?" 이 모든 논란의 결론은 무엇인가?
이방인에 관하여.
그들이 어떻게 의에서 소외되었는가. 이들은 그걸 쫓지 않았다. 이들은 아예 자신들의 죄와 비참상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치료책을 강구하려 들지도 않았다. 이들의 개종에서 선행적인 은총(preventing grace)이 돋보이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던 것이다(사 65:1). 이들 속에서 작용한 값없는 은혜가 아니고는 그 어느 것도 이들에게 그런 은총을 받게 할 것이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권과 절대 통치라는 방법을 통해 은혜 베푸시는 걸 즐겨하신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들이 의를 획득하게 되었는가. "믿음에 의해서"다. 곧 유대교에 개정하여 의식 율법에 복종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껴안고 그를 믿으며 복음에 복종함으로써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헛되이 변죽만 울리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라는 지름길을 통해서 이 의를 획득하였다.
31절 이스라엘 데 디오콘 노몬 디카이오쉬네스 에이스 노몬 디카이오쉬네스 우크 에프다센
롬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이스라엘의 실패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잘못된 의를 추구한 데 있다(10:2).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의를 추구하였으나 율법을 그릇된 방법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공로와 업적을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개인의 의를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써는 의를 성취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의 의는 육체의 법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 속에서 성취되었다(8:4). 한편 바울은 '좇다'(디오콘)라는 단어를 경주(競走)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여 유대인의 열심 있는 경주는 결국 이방인들에게 승리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역설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Harrison).
이방인의 승리는 그들이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믿음으로써 의가 주어졌다는 칭의를 증거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의를 추구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임을 폭로한다.
유대인에 관하여.
이들은 어떻게 자기들의 목표를 놓치고 말았는가. 그들은 "의의 법을 좇아갔다." 이들은 칭의니 성결이니 하는 말을 많이 떠들어대면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늘의 총아라는 점을 아주 자랑으로 여겼지만 그러나 이들은 이것을 놓치고 말았다. 곧 대다수가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들은 옛 유대 원칙과 의식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지키는 데서 행복을 찾으려 하고 그 실체가 이미 와 있는대도 그림자만을 껴안으려고 애썼으니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접에 못 미치고 말았다. 그의 백성으로 소유되지 못하고 의롭다 함을 받고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그들의 갈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되었는가. 이것이 목표를 놓치게 된 주원인이다(32,33절). 이들은 찾아 헤매기도 했으나 바른길을 따라간 것이 아니다. 겸손한 길이 아니요 지정된 길을 달리지 않은 것이다. "믿음에 의하지"않았으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며 복음의 조건에 복종하는 것이 율법의 참 생명이요 목표인데도 이걸 지키지 않은 것이다. 대신 이들은 마치 모세의 교훈과 의식을 준수하면 의롭게 되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길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율법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것을 단순히 지키고 순종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타락한 원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들을 여기에서 떼어 놓아 다른 공로와 만족을 통해 칭의 받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화합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는 거침돌이다. 이것을 그는 이사야 8장 14절, 28장 16절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이라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된다는 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눅 2:34).
길르앗 유향에서 돌이 뽑아지고 머릿돌이 거침돌이 되며 구원의 반석이 실족케 하는 반석이 되는 수가 있는데 그는 대다수에게 있어서 이런 존재다. 그를 배척한 불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그가 의식법에 종지부를 찍었기에 바로 이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를 믿고 있는 남은 자가 있으니 이들은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곧 그분을 통해 기다리는 칭의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율법에 의해 그걸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실망으로 끝나지만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해서 불신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배척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왈가왈부할 소지가 전혀 없게 되고 말았다. 이들에게 의, 생명 그리고 구원의 제시가 충분히 있었으며 복음의 조건도 제시되었지만 이들은 이게 싫어서 따르지 않았으니 그들이 망한다 해도 이것은 자업자득이요 그들의 피가 그들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
32절 디아티 호티 우크 에크 피스테오스 알르 호스 엑스 에르곤 노무 프로세콥산 가르 토 리도 투 프로스콤마토스
롬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9:32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 이 인용문은 사 28:16과, 8:14의 내용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말씀이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사 8:14).
바울은 이 두 구절의 핵심을 매우 능숙한 솜씨로 배합하여 한 문장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은 사 8:14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인 '거치는 돌'이 바울의 인용문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모든 특권을 누리던 이스라엘에게 제시된 복음은 거치는 돌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사야는 앗수르의 침략 속에서 그들에게 구원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손길을 반석으로 묘사하고 있다(사 8:13-15).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반석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자는 오히려 그 반석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부러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제시된 복음은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넘어지는 돌이 되었다(Bruce).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행위의 율법을 자랑함으로써 스스로 함정과 올무에 빠지게 된 것이다. 행위를 자랑하고 말씀과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유대 민족들은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과 십자가를 오히려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벧전 2:8).
33절 카도스 게그랍타이 이두 티데미 엔 시온 리돈 프로스콤마토스 카이 페트란 스칸달루 카이 파스 호 피스튜온 에프 아우토 우 카타이스퀸데세타이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9:33
내가 부딪히는 돌과...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이 '돌'(페트란)은 시편 118:22에 기록된 '버린 돌'과 사 28:16에 기록된 '시온의 기초 돌'로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눅 20:17). 이것은 또한 단 2:34절에 기록된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로 이는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시온에 두신 돌은 멸망과 저주를 선포하는 돌이 아니라 구원과 영광을 선포하는 피난처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이 돌을 거침돌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저주와 멸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고전 1:18, 23). 그들은 행위와 그리스도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으나 십자가는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Harrison).
여기서 바울의 결론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찾으려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Hendriksen). 믿음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피난처이신 시온의 반석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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