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원문 성경강해

[요한복음 16장 헬라어 주석강해] 보혜사 성령의 사역(요 16:5-15)

성령의 능력 2021. 5. 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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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16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보혜사 성령의 사역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먼저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믿음을 주셔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말의 능력을 허락해 주십니다. 구원의 확증을 주셔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구원이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보혜사 성령의 사역(요 16:5-15)

 

5절 뉜 데 휘파고 프로스 톤 펨프산타 메 카이 우데이스 엑스 휘몬 에로타 메 푸 휘라게이스

요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16:5

지금 - 예수가 7:33에서 '조금 더 있다가'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직 하던 일이 남아 있고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지금'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제자들에게 암시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 여기서 '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파고'는 14:2에서 '가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떠나가다'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그런데 예수는 목적지가 없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집'을 향해 가시는 것으로(14:2), 본절에서는 자신을 '보내신 이' 곧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보내신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 이 땅에 사명을 받고 오셨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라는 표현은 그 사명을 다 이루시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감을 가리킨다.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 이 말은 13:36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말한 베드로의 질문과 14:5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도마의 질문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 본문에서 '묻다'라는 용어가 부정 과거 형태인 '에로테세'로 쓰였다면 그 의미는 묻는 자가 과거에도 없었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요한은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예수가 말씀하고 계신 그 시점을 강조한다. 즉 예수는 자신의 교훈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6절 알르 호티 타우타 렐랄레카 휘민 헤 뤼페 페플레로켄 휘몬 텐 카르디안

요 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16:6

도리어...근심이 가득하였도다 - 1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하신다. 이 책만은 제자들의 영적 무분별과 관련이 있다. 즉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제자들과 공유하기를 원했으나(15:11),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기는커녕 오히려 근심이 가득 찼다. 그들이 예수가 떠나시는 목적과 의도를 명백하게 이해했다면 슬픔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14:18). 문법은 직설법 완료 능동태를 사용했다. 주님이 하신 말씀 때문에 제자들이 근심이 가득 채워졌다는 의미다.

7절 알르 에고 텐 알레데이안 레고 휘민 쉼페레이 휘민 히나 에고 아펠도 에안 가르 메 아펠도 호 파라클레토스 우크 엘류세타이 프로스 휘마스 에안 데 포류도 펨프소 아우톤 프로스 휘마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6:7

실상을...너희에게 유익이라 - '실상'(호 알레데이아)이란 말은 단순히 거짓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실 자체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9:1). 그러나 이 말은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8:45)라고 책망하실 때 사용하신 '진리'와 같은 용어이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본 구절에서 '알레데이아'의 의미를 약화시켜 번역하여 본절 전체의 의미도 약화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실상'보다 '진리'로 번역함이 타당하며 따라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진리를 펼쳐 보이시겠다는 강화된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편 예수의 떠나심은 세상에 오심과 같은 유익을 제자들에게 준다. 여기서 '유익하다'(쉼페레이)라는 말은 (1) 유익의 근거와 (2) 유익하게 되는 대상 없이는 매우 막연한 의미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수는 본절 하반절에서 이 두 가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유익의 근거이며 '너희'유익하게 되는 대상을 지칭한다. 보혜사는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영광을 얻기 전에는 오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며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신 후 성부께 가기 전에는 결코 오시지 않는다.

카이 엘돈 에케이노스 엘렝크세이 톤 코스몬 페리 하마르티아스 카이 페리 디카이오쉬네스 카이 페리 디카이오쉬네스 카이 페리 크리세오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8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본절에서부터 예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설명하신다. 14:26에서는 성령의 가르치며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본절부터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14:26의 대상은 제자들이지만 본절에서의 대상은 세상이다. 세상은 메시아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게 된다. 여기서 '책망하시리라'로 번역된 '엘렝크세이'는 '엘렝코'의 미래형이다. '엘렝코''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 '잘못을 꾸짖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2:36, 37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이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과 같이 '죄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convict)을 의미한. (2) '어떤 잘못에 대해 꾸짖는 것'(reprove)을 의미한다(KJV). (3) '세상의 잘못됐음을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J. Knox). (4) '허물을 드러내는 것'(NIV 난외주)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는 것'(Jerusalem Bible)을 의미한다. (5)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공동번역).

이처럼 제자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을 수행하시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세상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드러내는 사역에 의해 세상 중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성령의 판단은 단호하다. 그러나 성령의 단호함이 곧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것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폭로함으로 그리스도의 죄 없음을 증거 하고,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냄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의를 선포하며,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이미 심판에 처해졌음을 드러내신다.

9절 페리 하마르티아스 멘 호티 우 피스튜우신 에이스 에메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6:9

죄에...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하마르티아)'빗나감', '악행', '위범' 등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원래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용어는 예수에 대한 불신앙으로 국한되고 있.

성령께서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것이다. 이는 15:22, 24에서 예수에 의하여 명백히 선포되었다. 그들은 직접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으며, 예수를 보았지만 메시아로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워했다(1:11). 결국 자기들의 메시아를 아무런 연고 없이 미워하고(15:25) 핍박하여 십자가에 죽게 했다.

이러한 그들의 죄를 성령이 드러내신다. 이는 15:26에서 말씀하신 성령의 증거 사역과 일맥상통한다. (2) 예수를 보지 못한 세상의 죄에 대한 것이다. 성령 강림 후 복음이 세계 각처에 전파되는데 성령은 그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죄인임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자신을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지만(1:12)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리라(3:18)고 말씀하셨.

8:24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의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믿지 않는 자의 죄와 그에 따른 사망에 대해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어두움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각 사람의 양심에 빛을 비추심으로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셔서 죄에서 돌아서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도우신다. 이것이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10절 페리 디카이오쉬네스 데 호티 프로스 톤 파테라 무 휘파고 카이 우크 에티 데오레이테 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 ''(디카이오쉬네)는 본서에서 본절 외에 8절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본문에서 그 개념은 ''와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C.K. Barrett), '심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 ''9절의 죄와 문맥상 상관관계에 의하여 나온 말로 예수의 무죄를 의미한다. (2) 세상의 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의 의는 공의의 심판자 되신 하나님의 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따라서 예수의 무죄를 증명하는 ''는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는 ''로서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공의'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10:3) 오히려 의의 성취 자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다(7:2).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영접하지 않은 죄로 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의의 심판은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심으로 더욱더 확증된다. 특히 죄와 의가 재판의 상황에서 셈어의 동의어로 해석된다면 '죄책''무죄함'으로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B. Lindars).

한편 예수께서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것은 '하나님의 의'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의'(Perfect Righteousness)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성령은 인간 스스로 세워놓은 의의 규범이 불완전함을 세상에 드러내심으로 사람들이 완전한 의를 따라 살도록 책망하신다.

11절 페리 데 크리세오스 호티 호 아르콘 투 코스무 투투 케크리타이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6:11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 , 그리고 심판에 대한 성령의 책망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죄와 의에 대한 성령의 책망이 그리스도의 '무죄', '완전한 의'를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심판은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 한다.

세상 임금은 사단의 세력을 의미한다(12:31; 14:30). 이처럼 사단은 모든 죄인들 위에서 군림한다는 뜻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2:2), '어두움의 세상 주관'(6:12)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단에 대한 예수의 심판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며(8:29; 막 1:24; 3:11; 눅 4:41; 19:15)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게 사망의 권세 잡은 자들을 심판하셨다(2:14).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이 심판을 더욱 확증함으로써 사단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셨다.

성령은 이 심판을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한편 '심판을 받았'란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서 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예수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 예수에 의해서 귀신들이 쫓겨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5:27).

다만 성령은 예수의 심판하시는 사역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속시키실 것이다. (2)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될 승리를 내다보시고 완료형으로 사용하셨다. 예수를 믿는 자가 심판에 이르지 않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표현과 같이(5:24) 승리가 확정되어 있으므로 심판도 확정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12절 에티 폴라 에코 레게인 휘민 알르 우 뒤나스데 바스타제인 아르티

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6:12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감당하다'(바스타조)는 문자적으로 '훔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2:6). 그리고 어떤 때에는 '무엇을 옮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0:31). 또한 19:17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 적용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짐을 지는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15;10; 5:1).

본절에서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바스타조'가 사용되었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 (1) 제자들이 실제적으로 모든 교훈을 이해하기에는 그들의 영적 이해력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연약함은 성경의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다(16:6-12, 21-23; 17:17; 16:14).

그리고 이런 이해력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부끄러운 일들을 행했던 것이다(18:15-27; 14:50). (2) '지금'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가까운 미래 어느 시점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영으로서 임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듯을 다 아심과 동시에 예수가 선포하신 말씀의 목적을 아시며 또한 제자들의 생각도 아신다. 그는 영이시기에 무지에 싸여 잠자는 제자들의 영을 깨워 영적 비밀을 깨닫도록 하신다.

이때 제자들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며 그뿐 아니라 그 말씀이 그들 속에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삶이히 4:12)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들의 삶은 사도행전에서 명확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예수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증거자가 될 것이다(1:8).

13절 호탄 데 엘데 에케이노스 토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스 호데게세이 휘마스 에이스 파산 텐 알레데이안 우 가르 랄레세이 아프 헤아우투 알르 호사 안 아쿠세 랄레세이 카이 타 엘코메나 아낭겔레이 휘민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3

진리의 성령 - 혹자는 이 표현에 대해 성령이 진리를 가져와서 세상 사람들의 양심에 그 진리를 심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한다(Bernard). 이와 비슷하게 바렛(Barrett)이 말이 '진리를 전달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진리 가운데로'란 표현이 사본에 따라 두 가지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1) '엔 테 알레데이아':시내산 사본과 베자 사본을 비롯한 몇몇 대문자 사본(L, W,)과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그리고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본 구절을 '진리의 전 영역 안에서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하거나(C.K. Barrett), '모든 진리 안에서 교훈하심'으로 해석한다(Farrar, Fenton). (2) '에이스 텐 알레데미안':몇몇 대문자 사본 (L, W,)과 많은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그리고 터툴리안(Tertullian)과 바실(Basil) 그리고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같은 교부들도 이 독법을 지지한다.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는 헬라 고전 문학에서처럼 '에이스'가 항상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본 구절을 '성령의 활동하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진리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을 매우 잘 묘사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Dela Potterie).

그리고 모리스(L. Morris)도 이 독법을 지지하면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성령은 제자들을 점점 더 깊이 진리에 대한 지식 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본 구절을 해석한다. 여기서 어떤 독법을 취하든지 중요한 것은 성령이 진리와 관련해서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포치(Porch)의 진술대로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심으로 스스로 진리를 계시하셨으며 보혜사 성령은 이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며 성도들을 위해 그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드셨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 하는 일이다(15:26). 성령은 세상을 책망하시는 반면(16:8-11)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한편 '인도하다'(호데게오)는 70인 역(LXX)에서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 시편에서 이 용어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결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갈구하는 데 사용되었다(5:8; 27:11; 107:14; 143:10). 다른 곳에서 이 용어는 인도하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13:17;24:3).

이처럼 '호데게오'는 '인도하다'는 의미'가르치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으므로(Kittel) 본절에서도 '가르치다'란 의미를 취할 수 있으나 이 단어 뒤에 이어지는 전치사 '에이스'와 잘 조화가 되지 않으므'인도하다'가 적당하다.

자의로 말하지 않고 - 예수는 자기의 의도대로 말씀하지 않았다(8:26; 12:49; 14:10) 이와 같이 성령도 자기 임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씀한다. 비록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는 자신이 해야 할 모든 말씀은 다 드러내셨(4:25). 성령이 말하는 것은 예수가 선포하셨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보충이 아니라 성부께서 계획하셨고 성자가 선포하고 실행하셨던 전 구속 사역에 관한 말씀의 의미를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듣는 것 - 여기서 '듣다'는 현재 시제로 언급되어 성령이 끊임없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말씀을 듣고 사역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함께 사역 하심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장래 일을... 알리시리라 - '장래일'(타 에르코메나)은 문자적으로 '다가오는 일들'을 뜻하는데, 혹자는 이것을 장래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Bernard). 그러나 이 용어는 본서에서 유일하게 한 번 사용되었으므로 성령의 사역에만 이 용어를 적용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가 잡혀 가신 날 밤의 시점에서 본다면 '장래일'은 곧 닥칠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의미한다. (2) 세상을 책망하는 성령 사역의 관점에서(8절) 보면 '장래일'은 죄와 의와 심판을 선포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양자를 다 받아들인다 해도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인 사건은 단지 미래의 역사에서만 기대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복음서 안에서 시작되었으며(눅 7:19) 예수의 죽음과 부활 역시 종말론적 사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의 견해대로 성령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두 아시므로 제자들에게 장래 일을 깨닫게 하실 수 있.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요한의 계시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예언의 기능 역시 예수의 말씀과 별개가 아니라 철저히 그의 말씀과 결부되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장래 일'은 전체 구속사 중 남은 부분에 대한 것으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이후 성취될 일들이다. 성령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므로 그의 사역을 단지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제한시킬 수 없다.

14절 에케이노스 에메 독사세이 호티 에크 투 에무 렙세타이 카이 아낭겔레이 휘민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6:14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 앞에서 성령의 역할은 세상을 책망하며(8),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라(13) 소개되었거니와 여기서는 예수의 영광(Glory, NIV)을 나타내는 것이라 덧붙여 소개된다. 넓게 보면 본절의 이 역할은 앞에 언급한 두 역할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거의 동일한 의미를 시사한다. 본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는 비천한 말 구유에서 탄생하심부터 시작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외관상 초라한 생활을 하셨다(눅 9:58). 특히 영광과 위엄 가운데 지상의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리라는 제자들과 그들을 위시한 추종자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십자가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죽음을 당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그 십자가는 수치와 무기력과 절망으로 보였을 뿐이며, 예수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을 길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이 고난과 죽음의 관문(關門)을 거친 후 비로소 얻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죽음 자체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생생한 목격과 강림하신 성령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위엄과 영광은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울러 본 구절의 의미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로 연결되는 본절 하반절에 의해 뒷받침된다(15절 주석 참조).

즉 이러한 부활에 대한 증거 사역을 포함하여 성령은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예수의 신적 본성과 신분 및 장래 재림주로 임하실 사실 등을 증거함으로써 예수 당시에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명확히 밝혀 예수의 영원하신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셨고 또 앞으로도 드러내실 것이다. 요컨대 성령이 증거 하는 예수의 복음은 영광의 광채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4:4, 6). 또한 본문은 성령의 사역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임을 나타낸다. 즉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완수했듯이 성령의 사역 또한 예수의 사역 위에 기초하며 또 예수의 사역의 결실을 맺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15절 판타 호사 에케이 호 파테르 에마 에스틴 디아 투토 에이폰 호티 에크 투 에무 렙세타이 카이 아낭겔레이 휘민

요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15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 예수는 17:10에서 '내 것은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본문에서 성령이 나타내시는 것은 성자에게 속한 것을 근거로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성부의 것이다(3:35;5:20).

삼위 하나님은 구속(救贖) 사역에 있어서 상호 협동적이다. (1) 성부는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고(1:3-5; 벧전 1:2) (2) 성자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구속을 완성하셨으며(1:7) (3) 성령은 구속 사역의 의미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예수가 완성하신 그 구속을 각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신다(1:8, 9; 벧전 1:12).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성령의 역할을 본문에서 성자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편 예수가 소유하신 '내 것'은 자신이 성취하신 전체 구속 사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구속 사역을 바탕으로 한'장래 일'(13)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래 '은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전개될 것이며 또한 그 일은 성부가 계획하신 것이므로 역시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풍성'(3:8)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이 말씀을 근거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강해설교말씀] “선한 진리의 싸움을 싸워라”(딤전 1:1-20)

안녕하세요. 오늘은 디모데전서 1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선한 진리의 싸움을 싸워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 복음 앞에서 진리의 복음으로 맞서 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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