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린도전서 13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믿음 소망 사랑 제일은 사랑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해서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고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영원히 죽어야 할 인생인데 영원히 사는 영생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복음을 듣지 못하는 형제자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소망 사랑 제일은 사랑(고전 13:8-13)
8절 헤 아가페 우데포테 에크피프테이 에이테 데 프로페테이아이 카타르게데손타이 에이테 글롯사이 파우손타이 에이테 그노시스 카타르게데세타이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8
사랑은 언제 가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 여기 이 말씀은, (1) 사랑이 내세에까지 들어가서도 폐지되지 않는다는 것과 (2) 예언, 방언, 지식 등(知識等)은 내세에 이르러서는 폐지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사랑과 내세와의 관련성을 가르친다. 바울이 여기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라고 할 때에, 사랑이 이 세상에서도 존속(存續)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캄캄한 세상에도 내세의 요소(要素)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요일 4:8), 그의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시어 화목 제물로 삼으신 사건으로 나타내셨다(요일 4:10).
이 속죄의 사랑은 이 세상 어디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것은 물론 기독자의 심령에 움직이고 그 생활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움으로 이 사랑을 체현(體現)한다(골 1:24). 사랑은 수고이다(살전 1: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고난은 아니다. 대속적 고난은 하나님 아들께서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을 위하여 사람들이 당해야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기독자는 벌써 천국(天國)을 그 심령 속에 가지고 있다. 그가 사랑의 생활을 힘쓸수록 그는 더욱 천국 맛을 보게 된다. 고난에 참예함이 사랑의 생활인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세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이 빌 3:10,11에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다.
또 요일 4:16-18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고 하였다.
9절 에크 메루스 가르 기노스코멘 카이 에크 메루스 프로페튜오멘
고전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 호탄 데 엘데 토 텔레이온 토테 토 에크 메루스 카타르게데세타이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3:9,10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여기서부터 12절까지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받는 하늘나라의 지식이 부분적(部分的)의 것인 사실을 밝힌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내세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를 이름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내세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곧, (1) 이 세상은 죄악 세상이니,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형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죄는 곧, 어두움이다.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별 수 없이 내세에 대하여 전적 이해(全的理解)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이와 같이 어두움의 벌을 받아야 합당하다. 이 어두움은 그의 성결(聖潔)이 진보(進步)함에 따라서 조금씩 벗어진다.
그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좀 더 알기 위하여 더욱 착한 일을 힘쓰며 성결을 힘쓴다. (2) 죄 있는 인생으로서는 완전한 계시(啓示)의 빛을 감당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에서 베드로를 지도하시어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눅 5:8).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은 완전한 지식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지식으로 인하여 유해 무익(有害無益)한 반응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가령 우리가 별세할 날자를 알고 살기가 좋을까? 차라리 그 날자를 모르고 사는 것이 좋다. 하나님에게 속한 높은 지식은 도리어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 밝음 때문에 가리어져 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라고 하였으니(딤전 6:16), 어찌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전체적 나타남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그 사랑의 어떤 방면은 지금 땅 위의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렵다.
병아리가 바깥세상의 공기에 견딜만치 털이 자라나기 전에는 달걀 껍데기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것이 바깥세상에 나온 때엔 물론 바깥세상이 그에게 유익하고 편리하다. (3) 인생은 현세에서는 믿음을 연습하기 위하여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고 움직인다. 롬 8:24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영원토록 믿음의 관계니(고전 13:13), 신자로서는 땅 위에서 믿는 일을 전무(專務)하여야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하고야, 믿음의 연습과 연단은 생긴다. 벧전 1:7에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다.
11절 호테 에멘 네피오스 호스 네피오스 엘랄룬 호스 네피오스 에프로눈 호스 네피오스 엘로기조멘 호테 데 게고나 아네르 카테르게카 타 투 네피우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이 구절은, 위에 관설된 "부분적"지식이 어떤 것임을 밝혀 준다.
그것은 비유컨대 "어린아이"의 지식과 같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어떤 것인가? 어린아이의 지식은, 비판적(批判的)이 못되며, 사색적(思索的)이 못된다. 그들은 감각적(感覺的)이다. 이것은 사람이 현세 생활에서 가지는 지식 방법을 표본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중심(自己中心)이며 주관적(主觀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하나님에게 대하여는 무관심(無關心)하다.
여기 우리 본문에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판단력이 많아서 주관적 지각(主觀的知覺)보다 객관적 지식을 귀하게 여김이 아이들보다 많다. 이것은 내세에 사는 사람들의 지식 방법을 어느 정도 표본적으로 비유한다. 내세에 들어간 사람은 주관주의(主觀主義)를 전연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 한 지식을 실체화(實體化)하여 거기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어떠한가? (1) 그것은 참으로 어린아이들의 놀음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너무도 주관적이고 감각적(感覺的)이다. 과학적 지식(科學的知識)이란 것은, 감각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2) 현대인들은 당면한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지 않고 모스크바와 워싱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뿐이다.
계시록 4-5장에만도 하나님의 "보좌"란 말이 16번이나 나타난다. (3)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모두 상대적 가치(相對的價値)의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저렇게 역사적 원리로만 표준 삼아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논하고, 역사를 초월한 이적은 부인한다. (4) 이 세상 사람의 과학이, 다른 것은 다 행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인간의 심령을 통솔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마음을 통솔하는 것만이 세계 평화의 해결책이다. 그것을 통솔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장 낮추며 업신여긴다. 이것이 유치한 지혜이다.
요컨데 어린아이는 그 현재(現在) 그 현재만 느낄 줄 아나 미래(未來)를 예비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그 현재의 고통을 느껴 울 뿐이고 장래의 고통을 면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실유(實有)에 대하여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령한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어른들도 이 세상에선 아이들과 같다. 그들도 신령한 것을 업신여기는 일이 많다.
12절 블레포멘 가르 아르티 디 에소프트루 엔 아이니그마티 토테 데 프로소폰 프로스 프로소폰 아르티 기노스코 에크 메루스 토테 데 에피그노소마이 카도스 카이 에페그노스덴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옛날의 거울은 사람의 얼굴을 희미하게 나타냈다. 이 말씀은, 존재(存在)에 있어서 확실하나 그 정체(正體)는 전적(全的)으로 알기 어려울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별들이 많이 보이는데 어떤 별들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내세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내세를 깨닫고도 또다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약 1:23,24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데 건망증(健忘症)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더러운 못과 같다. 더러운 못에는 고기는 다 죽어 버리고 개구리만 성한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림에 있어서 셀바리우스(Cervurius)란 짐승과 같이 건망증이 있다. 셀바리우스는, 무엇을 먹다가도 머리를 뒤로 돌이키면 자기 앞에 놓은 식물(食物)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식물을 찾기 위하여 달아난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건망증이 있는 원인은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죄악과 이 세상 생명을 좋아하는 애욕(愛慾)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신자는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힘써야 된다. 그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될 것이다(벧전 2:2). 그 이유는, 그는 희미하지만 참된 내세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독자는 캄캄한 때에 더욱 빛을 사모하여야 될 자이다. 잎 속에 감추인 꽃을 더욱 보고 싶어 함과 같은 심리(心理)로, 그는 희미한 중에 가린 내세를 사모하여 들어가고자 하여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야 된다.
요일 3:2,3에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나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고후 3:18에 말하기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하였다. 조금 맛만 보고 전체는 소유되지 않는 그 심리는 얼마나 안타까운 심리일까?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 좁은 창문을 통하여 바깥 세계를 내다볼 때에 그 마음이 얼마나 바깥 세계를 사모하게 될까? 진실한 성도들은 모두 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9,10 절의 해석 참조.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하여야 될 일이 있다. 그것은 현세에 우리의 아는 것이 부분적인 것이지만 믿기에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본문에 바울이 "부분적으로 아는 것"의 가치(價値)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주석가 슐라테르(A.Schlatt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현세에 우리가 아는 바를 바울이 무가치하고 무용하다고 말함이 아니다. 그것이 멸절된다는 것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Was wir jetzt erkennen, heisst Paulus nicht und unnutz; es erfallt aber der Verganglichkeit, weil es nie etwas ganzes und vollendetes ist.-Erlauterungen zum Neuen Testament, 1909, Zweiter Band p.117).
우리가 정신만 차리면, 이런 부분적인 진리 지식에 의하여도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분은 전체를 증거 하는 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예화를 하나 들면, 이태리 사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역사가 타당할 것 같다. 그가 1492년 8월 3일 아침 여덟 시에 88명을 실은 세배(Sante Maria,Pinta, Nina)를 가지고 대서양(大西洋)을 건너가던 중 8월 17일엔 선원들이 콜럼버스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안정시켜 항해를 계속하던 중, 10월 7일에 철물(鐵物)에 붙였던 작대기 한 개와 판자 조각 한 개와 또 나뭇가지를 물에서 건졌다. 그것이 그들에게 큰 소망을 주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육지가 가까운 줄 알아 힘을 얻고 기뻐하였다. 과연 그날 밤 11시에 콜럼버스는 멀리 있는 불빛을 보았고, 12일 오전 2시에 그들은 신대륙(新大陸)을 발견하였다. 그때에는 전에 콜럼버스의 발 밑에 엎드리어 자복하며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다 흙에 입 맞추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한다(Encyclopaedia Britanica VI, 742-743). 그러면 우리는 이들의 여행에 있어서 부분적인 지식, 곧 나무 조각 같은 것을 보고서 전체(곧 大陸)의 존재를 확신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이 희미하다고 하여, 내세에 대한 확신을 못 가질 수는 없다.
13절 뉘니 데 메네이 피스티스 엘피스 아가페 타 트리아 타우타 메이존 데 투톤 헤 아가페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이 말씀은, 신 망 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곧, (1) 소망을 가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의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약 2:19). 특별히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2)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주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개인(個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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