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원문 성경강해

[민수기 20장 히브리어 강해] 가데스에서 미리암의 죽음 (민 20:1-9)

성령의 능력 2021. 5. 19.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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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민수기 20장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가데스에서 미리암의 죽음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전에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악평하고 40년 동안 방황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대로 광야에서 1세대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40년이 흘러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데스에서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고 있습니다. 40년 전에는 호렙산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는데 광야 1세대들은 여전히 40년이 흘렀는데도 원망 불평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성도의 입술에는 항상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물을 공급해 주십니다. 가데스는 이미 물이 있는 장소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르비딤도 이미 물이 있었던 장소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에서 왜 구원하여 광야에서 죽이느냐고 했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으면 항상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가데스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교훈 삼아서 우리는 항상 주님께 감사하는 신앙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가데스에서 미리암의 죽음(민 20:1-9)

 

1절 바야보우 베네 이스라엘 콜 하에다 미드바르 친 바호데쉬 하리숀 바예쎄브 하암 베카데쉬 바타마트 솸 미르얌 바티카베르 솸

민 20:1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20:1

정월에 - 출애굽 제40년째 되는 해 1(아빕월)을 가리킨다. 이것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장 호르 산으로 진행했고, 거기서 아론이 죽었는데, 그 연대가 출애굽 제40년 51일로 기록된 사실에서 확인된다(33:38). 한편 아빕월은 오늘날 태양력 3-4월쯤에 해당되는 봄철이다.

신 광야에 이르러서...가데스에 거하더니 - '크고 두려운 광야'(1:19; 8:15)라는 별칭을 지닌 '신 광야'는 대부분이 불모의 땅으로서 가나안의 남방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34:3, 4;15:1). 그리고 이 지역의 한 귀퉁이에 회한의 땅 '가데스 바네아'(13:26; 14:28-35)가 위치해 있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기나긴 방랑 생활에 들어갔고, 이제 그 38년간의 징계의 기간이 끝나고 다시금 그 땅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다음 도착지인 호르 산에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아론이 죽었는데, 그때가 51일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33:38),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이곳 가데스에서 약 3-4달가량 머문 것 같다. 그리고 체류의 주된 이유는 미리암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기간 때문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하니라 - 모세와 아론의 누이로서(26:59), 어릴 적에는 갈대 상자에 넣어져 강에 떠내려가는 동생 모세를 보호한 적이 있었고(2:4), 후에는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가 되어 백성들을 이끌던 지도자적 인물이다(15:20; 6:4). 그러나 한때는 교만한 생각으로 아론을 충동질하여 하나님의 전권대사 모세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12:1).

아마 그의 마지막 생이 이처럼 간략히 서술된 것도 그 일에 대한 견책의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미리암이 갈상자에 담겨져 떠내려가는 모세를 지켜보고, 또 바로의 공주에게 유모를 알선해 준 점에 비추어 볼 때(2:7), 아마 그녀의 나이는 모세보다 10살 정도는 위였으리라 추측된다. 따라서 이때 모세의 나이가 120세였으므로, 미리암의 나이는 130세 정도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38년 동안 사막에서 긴 행군이라기보다는 지루한 휴식을 취했다. 그들의 뒤에는 홍해가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 군사들은 다시 가나안으로 행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받아 다시 방랑의 길을 계속해야 했던 바로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금 와 있다. 지금까지 그들은 미로(迷路)와 미궁(迷宮) 속을 헤매었다. 그러는 동안 형을 받은 반역자들에 대한 선고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이 다시금 정도(正道)에 들어섰다. 그들은 가데스에 머물렀다(1절). 그러나 가나안 국경에 접해 있는 가데스 광야가 아니라 에돔의 경내에 있는 다른 가데스였으며, 약속의 땅은 아직도 멀었다. 그러나 급히 그리로 돌이켰던 홍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거기서 미리암, 곧 모세와 아론의 누이가 죽었다. 아마 미리암은 모세와 아론보다 더 나이가 많았던 것 같다. 모세가 갈대 상자에 담겨 강에 던져질 때 그것을 목격한 그 누이가 바로 미리암이라고 본다면 분명 그렇다(출 2:4).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1절). 그녀는 여자 선지자로, 이스라엘에게 많은 자비를 베푼 도구 노릇을 했다(미 6:4).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를 들고 이스라엘 앞에서 가며, 그들을 위해서 기사(奇事)를 행할 때, 미리암은 나팔을 들고 그러한 기사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 앞에서 갔다(출 15:20). 그러나 그녀도 한때는 원망을 했다(12:1). 그러므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2절 베로 하야 마임 라에다 바이카할루 알 모쎄 베알 아하론

민 20: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20:2

물이 없으므로 - 팔레스틴 남쪽 변방에 위치한 '가데스'는 일종의 사막의 오아시스 지역으로 본래 좋은 샘(시내)들이 여러 군데 있었다. 따라서 출애굽 한 백성들은 주로 이곳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아 생활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긴 방랑 생활 끝에 다시금 이곳으로 돌아올 때에는 당연히 물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해에는 심한 가뭄으로 인해 모든 샘과 시내가 말라버렸다(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따라서 백성들은 마치 곧 죽을 듯이 불평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때 백성들이 불평했던 장소에 대해 시 106:32에서는 정확히 '므리바'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출애굽 직후 '르비딤'에서도 식수가 없다는 이유로 해서 백성들은 불평한 적이 있었다(17:1-7). 물론 이 두 사건은 전혀 다른 별개의 사건이다.

공박하리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은 단순히 전치사로서 '...에 적의를 품고 대항하는'(against)이라는 뜻이다. 곧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킬 자세로 모세와 아론에게 따지고 대들면서 원망하였던 것이다(16:19, 42).

여기에 또 다른 므리바라는 곳이 나와 있다. 므리바란 곳은 이미 나온 적이 있다. 그들이 광야 여행을 시작하던 무렵이다. 그곳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으므로”(출 17:7) 므리바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에 또 므리바란 곳이 있다. 이것은 그 행군의 끝 무렵이다. 같은 이유로 같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를 므리바 물이라”(13절)고 했다. 처음에 있었던 일이 여기서 재연된 셈이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2절). 르비딤의 바위에서 나온 물은 그때 필요한 양만큼만 흘러나왔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보통의 수단으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때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일반 섭리가 물을 공급하고 있는 곳에서는 기적이 중단되는 것이 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저들은 물이 없는, 적어도 온 회중이 먹기에는 물이 부족한 곳에 당도했다. 우리도 부족함이 많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언제든 여러 가지 불편에 처하게 될 것을 오히려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물이 풍족한 것은 큰 자비다. 우리가 필요한 자비를 발견했을 경우에는, 그 자비의 진가를 고백해야 한다.

3절 바야레브 하암 임 모쎄 바요메루 레모르 베루 가바에누 비게바 아헤누 리프네 아도나이

민 20:3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20:3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 이는 10 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 이후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 그 당시 20세 이상이던 구세대가 37년간 광야에서 죽어가던 상황을 가리킨다(13:25; 14:26-35). 따라서 이러한 백성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그들 조상들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사(自然死)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하였도다 - 백성들의 경솔하고도 배은망덕 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실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아니라 '인내와 믿음'이었다(약 5:7-11).

그리하여 그들은 원망과 소동을 일으켰다(2절).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려고 팔을 들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다투었다(3절). 그들의 부모들이 하던 똑같은 말투였다.

그들은 잠시 하나님의 자비가 없어 보이는 곳에 처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악인들과 함께 죽어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하였도다!” 자기들을 살려 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들은 집행 유예를 내린 자비를 멸시하고, 하나님께서 더 큰 악을 베푸시려고 잠시 불 속에서 꺼내어 놓았다는 듯이 하나님의 자비에 도전했다. 그러나 실상 저들이 자기 형제들과 함께 죽었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 저들은 이미 잠시 후면 그들의 형제들처럼 죽을 자들이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암 5:18).

4절 베라마 하베템 에트 케할 아도나이 엘 하미드바르 하제 라무트 솸 아나흐누 우베이레누

민 20: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20:4

너희가 어찌하여...이 광야로 인도하여 - 백성들의 역사의식이 결여된 상태를 반영한 말로써 진정 노예의 상태와 자유의 상태를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불평이다. 아울러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것은 모세나 아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깨닫지 못하는 불신앙의 외침이다. 더욱이 이 말은 출애굽 초부터 계속되어온 불평인데(14:11; 16:2, 3; 17:3), 광야 40년 동안에도 변화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만큼 완악했는가를 알 수 있다.

실로 악인이 돌이키지 않는 이유는 그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보이신 기적이 부족해서가 하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총회 - 여호와께 부름 받은 이스라엘은 회중을 가리킨다.

자기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광야로 몰아넣었다고 분노했다(4, 5절). 그들은 모세와 싸웠다. 그러나 모세가 한 것은 여호와의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들은 어느 민족보다 큰 은혜를 받고도, 그것이 자기들의 권리 침해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유보다 노예를 원했다. 약속의 땅보다 속박의 집을 좋아했다. 저들이 당면한 어려움은 물 뿐이었지만, 저들에겐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이 가득했다. 자기들에게 포도나무나 무화과가 없다는 것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고생이라는 듯이 투덜거렸다. 다음 사실은 저들의 범죄를 가중시키는 것이다.

① 그들은 부모들의 불평과 불신으로 인해 지금까지 고생해 왔다. 그들은 그 부모들의 “패역한 죄를 지고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게”(14:33) 되었고, 이제 그 40년이 거의 차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의 전철을 답습했으니, 벨사살이 받은 책망과 같다.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단 5:22).

②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고, 모세와 아론의 관대함과 신실함을 경험했다.

③ 미리암이 최근에 죽었다. 그들의 지도자 하나를 잃었으므로, 남은 자들을 더욱 존경했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목자 없는 양같이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점점 무례히 행했다. 누이를 잃은 그들에게 조위(弔慰)를 표하기는커녕 더 괴롭혔다.

5절 베라마 헤엘리투누 미미츠라임 레하비 오타누 엘 하마콤 하라 하제 로 메콤 제라 우테에나 베게펜 베림몬 우마임 아인 리쉐토트

민 20: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20:5

악한 곳(하마콤 하라)- 직역하면 '아무 쓸모없는 땅'. '()를 제공하는 장소'이다. 즉 사람이 도무지 생존할 수 없는 죽음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에는...없고 ...없고...없고...없고...없도다 - 백성들이 머물렀던 가데스는 그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절대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육신적인 눈으로 그곳을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곳은 모든 것이 넘치는 충만의 장소였다. 즉 그들에게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고,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있었으며 계약 백성으로서의 미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정적인 발언은 결국 그들의 불신앙에서 나온 말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허락하실 것이라 하셨지, 그들의 말대'죽음의 땅'을 약속하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3:8; 13:5). 그런 고로 참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현실에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11:1).

6절 바야보 모쎄 베아하론 미프네 하카할 엘 페타흐 오헬 모에드 바이펠루 알 페네헴 바예라 케보드 아도나이 엘레헴

민 20:6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20:6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나타나며 - 모세와 아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회막으로 물러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알고자 했다(6절). 전과 같이 그들은 “엎드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탄원함이요, 하나님의 지시를 바람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언급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망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부복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롬 8:26) 그들을 위해 중재의 기도를 드렸다. 거기서 그들은 명령을 기다렸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문제를 해결하셨다. 죄인들을 그들의 죄대로 심판하시기 위해 법정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분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이다(호 11:9). 또 “항상 경책지 아니하신다”(시 103:9; 창 8:21 참조).

하나님은 영광의 보좌에 나타나셨다. 그들의 부당한 원망 소리를 제압하시기 위해서다(6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만민의 훤화를 진정”하시기(시 65:7) 위함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의 욕정을 제어하는 힘이 되고, 우리의 입에 재갈을 먹이는 것이 됨을 명심하자.

8절 카흐 에트 하마테 베하케헬 에트 하에다 아타 베아하론 아히카 베디바르템 엘 하셀라 레에네헴 베나탄 메마이브 베호체타 라헴 마임 민 하셀라 베히쉐키타 에트 하에다 베에트 베이람

민 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20:8

지팡이를 가지고 - 이 지팡이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17:8)가 아니라, 출애굽 당시 모세가 바로 앞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던 그 지팡이(7:15;9:23)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지팡이는 '르비딤 물 사건'에서도 사용되었었다(17:5). 그러므로 모세는 이 지팡이를 통해 지금까지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나타냈던 것이다. 그리고 보통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는 이 지팡이를 땅에 내려놓고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이 '지팡이'는 그 자체에 어떤 신통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적 도구에 불과했다.

그들의 목전에서 - 여호와의 이적이 공개적으로 실행되어 그의 영광과 능력을 여러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참된 능력과 진리는 항상 떳떳하여 가릴 것이 없다.

반석에게 명하여 - 여기서 '반석'(셀라)이란 '바위' 외에 '높은 요새'의미도 지닌다. 그러므로 이것은 출 17:1-7의 르비딤 물 사건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반석'(추르), 곧 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니라 절벽처럼 높다란 바위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단지 그 반석을 향하여 '물을 내라'는 명령만을 하도록 당부하셨다. 그 이상의 어떤 노력도 요구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1; 11:3). 그것을 운행하시는(11:36) 하나님의 능력으로 볼 때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분은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그들의 정당한 소망을 이루어 주셨다. 물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필연적이다. 비록 그들의 탄원 방식이 원망 조차 불법적인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물을 주지 않고 그들을 심판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즉각 요구에 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8절).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 번 명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전과 같이 그 백성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며, 아무리 그들이 역경에 처하고 자연적 조건이 극한에 처해 있더라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을 내실 수 있으며, 또 이미 그렇게 했고, 다시 그렇게 하실 수 있으니 그분의 팔이 짧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은 지난번 경우의 그 바위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못 가지게 하기 위해서―즉 그 바위 주위에 어떤 숨은 샘이 있었다든가―하나님은 다른 한 바위를 지시하셨다. 전번처럼 바위를 정해 준 것이 아니라 모세가 원하는 바위를 치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분에게는 어떤 것이든 마찬가지다.

9절 바이카흐 모쎄 에트 하마테 밀리프네 아도나이 카아쎄르 치바후

민 20: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20:9

그 명대로 - 출애굽 후 지금까지 모세의 순종은 완벽했다. 그러나 11절의 결정적인 불순종으로 인해 모세는 그가 이때껏 쌓아 올린 순종의 아름다움을 산산이 부수어 놓고 말았다. 이는 상징적으로 율법 준수의 한계를 암시한다. 즉 율법 계시의 전수자요, 공포자인 그도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가나안 입국 실패는 이러한 구속사의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하겠다.

하나님은 지팡이를 들라고 했다. 그가 애굽에 재앙을 불러들이고 바다를 갈랐던 그 유명한 지팡이로, 그의 손에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 지팡이는 모세와 그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위대한 사건들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고, 또한 지금도 하나님을 믿도록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이 지팡이는 회막에다 두었던 것 같다(9절). 복음이 그렇게 불리듯이,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 곧 “주의 권능의 홀”이라고 불렸다(시 110:2). 그 표현은 아마 모세의 지팡이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은 장로뿐 아니라 온 회중을 모아서 이 일의 증인이 되게 하라고 했다.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보면 저들의 불신앙이 부끄럽게 될 것이며, 또 확신도 커질 것이다. 하나님의 기사(奇事)에는 속임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은 빛을 피하지 않으며, 많은 증인들의 목격을 피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를 향해 명하라고 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려 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이 많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던 자들을 부끄럽게 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 바위보다 더 굳어 있었다. 굽힐 줄 모르고 복종할 줄 모르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 바위가 물을 내리라는 약속을 했고(8절), 그대로 되었다(11절). “물이 솟아 나왔다.” 이것은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신 32:13)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의 한 예증이요, 동시에 그렇게 죄 많은 백성들에게 행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한 예증이기도 하다. 이들은 새로운 세대들이다(옛 세대는 이때쯤 되어서는 거의가 죽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의 앞서 간 조상들처럼 악하다.

저들의 피 속에는 원망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거룩한 은혜에 대한 자격은 상실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인내하심 덕분이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인간이 아니시다. 그들을 아끼고 용서하신다. 나아가 그분은 그들이 먹은 물을 그들의 짐승들에게까지 풍족히 먹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8, 11절), 영적 축복을 상징하는 영적 물도 먹여 주셨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예레미야 33장 히브리어 강해말씀]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신 여호와의 비전(렘 33:1-9)

안녕하세요. 오늘은 예레미야 33장 히브리어 강해 말씀 중에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신 여호와의 비전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여호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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