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3장에서는 솔로몬이 가마를 타고 술람미 여인을 데리로 오고 있다. 이스라엘 용사 중에서 60명이 둘러서서 오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데리고 구름 타고 재림하시는 모습을 연상하게 만든다. 예수님도 성도를 데리러 이 땅에 오신다고 했다. 솔로몬 왕은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다. 영광 받기에 합당한 주님을 상징한다. 성도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찬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아 3:7-11)
"예루살렘 여자들"은 이 배우자를 찬미하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들의 찬사를 간과해버리며 그들의 칭찬에 으쓱거리지도 않고, 그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린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기한테서 눈을 떼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훈령을 내린다. 그들에게 그를 존경하라고 권장함과 아울러 그를 찬양하는 일에 직접 뛰어든다. 여기에서만도 그는 "솔로몬"이란 칭호를 세 번이나 받고 있다. 솔로몬이란 이름이 이 아가서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본 성구 이외에서는 모두 합쳐 봐야 세 번밖에 안 된다(1:5; 8:11, 12). 여기에서 의미하는 분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 곧 그리스도이시다. 솔로몬은 그의 지혜, 그의 재산, 특히 그의 성전 건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빛나는 예표가 되었었다. 여기에 이 여인이 그를 찬미하는 세 가지 이유가 나온다.
Ⅰ. 그의 침상의 안전함(7절). "그의 침상(우리 성경과 다름)을 보라." 이는 "솔로몬"의 침상과 같이 매우 호화롭고 아름답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휘장"도 그러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침상은 솔로몬의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라고도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당신의 머리둘 곳도 없으셨지만" 그의 침상은 솔로몬의 가장 훌륭한 침상보다 더 나은 것이다. 교회가 그의 침상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 "이것은 나의 영원한 안식처라. 내가 여기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신도들의 마음은 그의 침상이다. 즉 그는 밤새도록 신도들의 품 가운데 누워계신다(엡 3:17). 천국은 그의 침상이요, 그가 자기 역사를 마치고 나서 들어가신 안식처이다.
혹은 이것은 은혜로운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얻는 달콤한 휴식과 만족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것이 "그의 침상"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우리에게 그 침상이 허용되기 때문에 "우리의 침상"이라고 불리기는 하나(1:16), 우리에게 안식이 되는 것은 곧 그의 평안이 되기 때문이다(요 14:27).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것은 그 이름이 "화평"을 뜻하는 "솔로몬의 침상이다." 솔로몬 당시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전하게 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이 그의 침상을 칭찬하는 이유는 그 침상 주위에 둘러선 호위병들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는 자들은 편안하게 거할 뿐만 아니라(최대의 위험 속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편안하게 거하는 자들은 많다) 안전하게 거하기도 한다. 저들의 성스러운 고요는 성스러운 방호의 보호 아래 있다. "이 침상 주위에는 용사 육십 인"이 근위병으로서 혹은 한 떼의 사병(私兵)으로서 있었다. 저들은 "이스라엘인 용사"이었다. 다윗의 치세 시에는 담대하고 용감한 자들이 수없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호위병들은 잘 무장하고 있다. "그들은 다 칼을 잡고" 또 칼 잡는 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며 모든 전쟁 기술에 잘 숙달된 자들이다. 그들은 침상 주위를 따라 적당한 거리로 배치되었다. 그들은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각기 허리에 칼을 차고" 그 칼에 손을 대고서 여차하면 뽑아들 태세를 취하고 있으니, 이는 "밤의 두려움 때문이며 두려워할 만한 위험 때문이다." 군주의 생명, 특히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군주의 생명은 한층 더 고귀한 만큼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여늬 사람보다 더 많은 호위를 필요로 한다. 혹은 이 배우자가 위험에 대하여 "두려움"과 염려를 갖기 " 때문에"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 호위병들이 배치되었을 것이다. 즉 그 여인으로 하여금 "악에 대한 공포로부터" 평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신자들도 "악에 대한 두려움"을 배제하기란 어려우며 특히 그들이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의심을 받거나 평상시보다 더 많은 외적 환난 가운데 있는 때, 곧 "밤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사업을 하실 때 그의 아버지의 특별한 보호 아래 계셨던 것이다.
"그가 나를 그의 손 그늘 안에 숨기셨느니라"(사 49:2). 그는 마음대로 부리실 수 있는 여러 군단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계셨다. 교회는 잘 호위받고 있었고 교회에 대적하는 자보다 함께하는 자가 더욱 많다. 아무도 이 포도원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밤낮으로 그것을 지키신다"(사 27:2, 3). 개개의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와 더불어 휴식을 할 때에는 비록 그 시간이 밤이라고 하더라도 또 그들이 "밤에 두려움"을 가지더라도, 그들은 호위병들 한가운데에 있는 솔로몬만큼이나 안전하다. 천사들이 그들을 보호하며 사역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감시"하기 위해 이 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용감한"자들이어야 하며 영적인 싸움에 "익숙" 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잡아야 한다. 그들은 이 말씀의 칼을 "허리에 차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밤에 두려워하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언제라도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선 하나님의 모든 부속물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견고한 요새 속에 있는 것 같이 보호되고(벧전 1:5) "그의 이름 안에서" 안전함을 얻으며(잠 18:10), 그의 평강이 그들을 지배하고 지켜 주신다(빌 4:7). 그들 안에 작용하는 의로움의 공효(功效)는 "평안"과 "안전"이다(시 4:8). 우리의 위험은 "이 세상의 어두움을 지배하는 자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빛의 갑주"를 입으면 그때는 안전하다.
Ⅱ. 그의 연(輦)의 화려함(9, 10). 그리스도와 신도들이 쉴 때에는 충분하신 호위 아래에서 매우 안전하다. 또한 그들이 대중 앞에 나타날 때에는 으리으리한 마차 속의 임금처럼 아주 근사하게 나타난다. 이 연(혹은 수레)은 솔로몬이 직접 고안하여 만든 것으로 그 재료는 "은", "금", "백향목", "자색담"과 같은 매우 값비싼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이 연을 만들었으나 이것은 또한 "예루살렘 여자들을 위해서" 만든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녀들에게 은혜를 입히기 위함이었다. 혹자는 이 "연" 혹은 "수레"나 "역마차"(이 단어는 성서 안에서 딱 한 번 나온다)를 신성(神性)이 무개 마차를 타고 나온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은 신적 솜씨였다("몸은 당신이 저에게 예비하신 것이니이다"). 그 구조는 매우 정교하였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사랑 곧 인간들에게 대한 순수한 사랑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복음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복음이란 무개 마차를 타고 나타나시고 전차(戰車)처럼 승리의 행군을 하시면서 "무찌르고 정복하신다"는 것이다. "기둥", 즉 일곱 기둥(잠 9:1)이 "은"으로 되어 있음은 여호와의 말씀이 단련된 은과 같기 때문이다(시 12:6). 아니, 그것은 "수 천의 금은"보다 더 낫다. 그 수레는 "자색" 곧 제왕의 색깔로 설비되었다. 그 모든 장식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염색되었으며 여기에서 나타나는 빛깔도 바로 그 색이다. 그러나 그 영화를 절정에 이르도록 완성시켜 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 안에 사랑이 입혔구나." 사랑으로 그 안을 대었으되 태만하던 때의 솔로몬처럼 이방 사람들의 사랑으로 안을 입히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 곧 거룩한 "사랑"으로 입혔다. 은은 백향목보다 낫고 금은 은보다 낫다. 그러나 사랑은 금보다 나으며 모든 것보다 낫다. 사랑보다 나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다. 복음은 전부가 다 "사랑"이다.
더람(Durham) 선생은 이 말씀을 우리를 구원하는 수단이 되는, 구원의 언약에다 적용한다.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으로 고안되었고 또 성서 안에서 나타나 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사업이다. 이 안에서 죄인들에게 주신 그의 은혜와 사랑의 영화스러움이 가장 현저히 나타나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신자들의 눈에 사랑스럽고도 놀랄 만한 분으로 비치게 만든다. 사랑은 이 언약의 수레를 타고 인간들에게로 운반되며 또 인간(신도들)은 이 안에서 온전한 사랑에 이르게 된다. 즉 개선의 행차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나 신도들의 위로를 위해서 놀랄만하게 되고 비상하게 고안된 것이다. 그것은 "만사에 잘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신 것"이다(삼하 23:5).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기둥"을 가졌다. 그것을 결코 썩지 않는 "레바논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바닥은 가장 오래가는 금속인 "금"으로 되어 있다. 이 수레의 뚜껑은 짙은 "자색 담"곧 언약의 피로되었는데, 신도들은 이로써 신의 진노인 비바람이나 이 세상 환란의 폭풍우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있는 것, 이 수레의 모든 부분 중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며 그것은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다.
Ⅲ. 그가 호화찬란하게 나타날 때 보여 주는 그의 제왕다운 광채(11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시온의 여자들"에게 "솔로몬의 왕"의 영화를 잘 알라고 명령하고 있다. "나와서" 그를 "보라." 근사한 행렬의 아름다움을 덧보이게 하는 것은 무수한 관중의 수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복음 안에 나타나신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그런 자들의 수에 가담하여 관중의 수를 늘림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시온의 딸 외에 시온의 왕에게 영광을 드릴 자가 누구이냐? 그가 오실 때 그들은 크게 기뻐할 만한 이유를 가진다(슥 9:9).
(1) "그를 보라." 자기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즐겁게 바라보자. 믿음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정된 시선을 그에게 던지라. 여기에 볼 만한 장면이 있다. 그를 "보라." 그리고 감탄하라. 그를 "보라." 그리고 사랑하라. 그를 보고 그를 다시 알아라.
(2) "나와서" 그를 "보라." 주 예수 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아무런 아름다움이나 훌륭함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나오너라. 너 자신에게서도 나오너라. 그의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보고 네 자신을 기만하는데서 탈피하라. 삭개오처럼 그를 볼 수 있는 데로, 그가 통과하시는 거리로 "나오너라."
2. 그들에게 매일 볼 수 없는 것을 특히 주의해서 보라고 명령하고 있다. 즉 솔로몬의 "면류관"을 주목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석으로 장식된 금 면류관으로 그의 대관식 날 쓴 것이었다(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는 비록 그 왕관을 자기 아들에게 직접 준 것은 아니더라도 아도니야가 그것을 가지려 하자 때맞추어 솔로몬이 왕관을 획득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화관이었을 것이다. 그의 엄숙한 혼례식을 장식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 준 면류관으로서 갖가지 꽃과 푸른 가지를 리본으로 묶어서 만든 화관이었을 것이다. 아마 솔로몬의 대관식은 그의 결혼일 즉 "그의 혼인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그의 머리에는 백성들이 그에게 씌워 준 왕관에다 그의 어머니가 씌워 준 화관이 더해졌을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께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 그리스도께 무수한 영예가 바쳐지고 권세와 주권이 맡겨져 있다. "나와서" 예수 임금님을 보라.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씌우신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그때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왕으로써 자기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셨다." 또 그를 자기의 우편에 나아가 앉게 하셨으며 그에게 "하늘과 땅에서의" 지고한 권세를 다 주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엎드리게 하셨다."
(2) 그리스도의 박해자들은 그에게 불명예를 드렸다. 혹자는 이 면류관을 "그의 어미" 즉 유대 교회가 그의 사망일에 "그에게 씌운 가시관"이라고 해석한다.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날은 그가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날"(엡 5:25)이요, 자기 교회와 "혼인하신 날"이다. 그가 "가시관을 쓰고 끌려 나왔을" 때 빌라도가 입을 열어 "시온의 딸들"에게 "이 사람을 보라!"라고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3) 이것은 특히 그의 어미로서의 교회와 그의 모든 참신도들이 그에게 드리는 존귀를 의미하는 것 같이 보인다. 교회와 참다운 신자의 가슴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에 대해 "이들이야 말로 내 어머니요 자매요 형제니라"(마 12:50)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그가 하신 사업의 영광을 드린다. "교회 안"의 영광은 그에게 있다(엡 3:21). 신자들이 그를 자기 것으로서 영접하고 영원하신 언약 안에서 그에게 연합될 때는 다음과 같은 날이 된다.
1) 이 날은 그들의 영혼에 대한 대관식이 된다.
회심하기 이전에 그들은 스스로 면류관을 쓰고 다녔다. 그러나 참회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서는 그리스도께 면류관을 씌워드리기 시작하며 이 일은 그날로부터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머리(수령)로 삼고, 그에게 "모든 생각을 복종" 시킨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에다 그의 보좌를 설치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모두 그의 발 앞에 바친다.
2) 이 날은 그리스도의 "혼인날"이 된다.
그는 이 혼인으로 그들을 영원하신 인자와 자비 안에서 자기 연분을 맺게 하시며, 믿음과 사랑 안에서 자기와 연합되게 하시고, 약속 안에서 그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 주시며 그가 가지신 모든 것을 그들 것이 되도록 내주신다. "너는 다른 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 3:3). 그리고 그에게는 그들이 "정결한 처녀"로서 바쳐진다.
3) 이 날은 "그의 마음이 기쁜 날"이 된다. 그는 자기 백성이 드리는 존경을 기뻐하시며, 자기의 세력이 자기 백성 중에 퍼지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그들 앞에서 "사탄이 떨어지느냐?" "바로 그 시각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신다"(눅 10:18, 21). 회개하는 죄인들에게는 하늘에서 기쁨이 있다. 탕자가 돌아올 때는 온 가족이 반가워하는 것이다. "나와서" 죄인들께로 향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라." 이는 그의 "면류관"이요, 그의 가장 밝은 영광이다.
[에스더 3장 성경 주석 복음 말씀] 악의에 찬 하만의 제안(에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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