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민수기 33장 설교말씀 중에서 마라와 유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라 – 유다”(민33:8, 마1:2)
♣명제: 마라는 원죄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장소이다.
♣목적: 마라의 쓴 물은 원죄의 고통을 상징하며 달게 하신 물은 구원의 은혜를 상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믹돌에 진을 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앞에는 홍해였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들이 몰려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과 환경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에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너희를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병사들은 물속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우리들도 이와 같이 믹돌과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도와주시고 애굽 병사와 같은 문제 속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간사한 존재들입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에서 인도하여 수르 광야로 들어가 사흘 길을 걸어서 마라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마라에 도착하여 목이 말라 물을 먹으려고 하니 물이 써서 마시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홍해의 기적과 같은 놀라운 체험들을 경험하고 나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움이 또 왔습니다. 마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나의 삶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물질적 어려움과 건강의 쇠약함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우리들은 주님께 원망하고 있지는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다가도 조금의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원망하는 이런 신앙은 버려야 합니다. 마라로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라에 진을 치게 하신 것을 통하여 영적인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마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과 믿음을 이 시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민33:8 하히롯 앞을 떠나 광야를 바라보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 에담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마라에 진을 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히롯 앞을 떠나서 광야를 바라보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 에담 광야로 들어가 사흘 길을 가서 마라에 진을 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히롯’ פי החרת(피하히로트 6367) 목초지,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들어가야 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히롯 앞을 떠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하히롯은 목초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장소입니다. 이것은 육적으로는 먹고 살기가 편안하고 세상 적으로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곳을 떠나 홍해를 지나서 광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광야는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도 부족한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살아갈 수가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렇게 좋은 목초지를 버리고 육적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그럼 하히롯을 떠났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구원받은 백성들은 세상의 육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육적인 것들을 버려야 영적인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버려야 만이 홍해를 건널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홍해를 건너지 못합니다. 홍해는 교회에서 세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고전10:1-2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세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은 물세례를 통하여 구원의 표시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으려면 하히롯과 같은 세상의 육적인 정욕을 버리고 주님께로 나와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교회에 들어왔다면 세상의 정욕적인 것을 버리고 하히롯을 떠나온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에 빠져 살고 있다면 하히롯을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온전한 세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광야를 바라보고’ מדבר(미드바르 4057) 광야, 황무지, 라는 뜻이며 דבר(다바르 1696) 말씀하다, 안위하다, 강론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믹돌에서 진을 쳤다가 하나님께서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셔서 진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너가기 위하여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광야를 바라보면서 홍해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광야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직도 애굽에 속해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의 영향권 아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면 더 이상 애굽의 바로와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럼 광야를 바라본다는 것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들도 홍해를 건너서 세례를 받았다면 교회를 바라보면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광야는 황무지와 같은 곳인데 이곳에는 영적인 주님의 말씀이 터져 나오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매일같이 인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한 곳이며 주님의 위로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영적으로 충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았다면 교회생활을 통해서 항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항상 말씀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믹돌을 떠났다는 것은 율법의 삶을 완전히 버리고 홍해를 건너서 십자가 복음의 말씀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로 세우신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처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주님과 함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에담’ אתם(에탐 864) 그들과 함께,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에서 종살이시켰던 애굽의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복수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서 애굽의 병사들을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수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수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도 구원받은 백성들을 괴롭혔던 율법주의자들을 심판하셔서 구원받은 자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 에담 광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애굽의 삶에서 완전히 끊어주신 것입니다. 에담 광야로 들어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에담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함께하셨던 것처럼 광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출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에담 광야가 출애굽기에는 수르 광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담과 수르는 한 광야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수르’ שור(슈르 7793) 술, 이라는 뜻이며 שור(슈르 7788) 순회하다, 돌아다니다, 여행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르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은 앞으로 이들은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는데 여행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순회하고 돌아다니면서 살아갈 때에 많은 위험요소들이 있습니다. 광야는 불 뱀과 전갈과 뜨거운 태양과 추위들이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보호함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도 현재 이 세상의 삶이 나그네와 같은 광야의 삶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광야에서 순회하고 돌아다니면서 인생을 살아갈 때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도와주시고 그때그때마다 고통과 괴로움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앞날에 전갈과 불 뱀과 같은 존재들로부터 주님이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앞에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질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살기 때문에 불안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추락할 것을 염려하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일은 그날에 족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날을 아무리 걱정한다고 해도 해결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광야의 삶에 함께 하신다는 것만 믿고 주님과 함께 하면 모든 염려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여행을 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라’ מרה(마라 4785) 마라, 라는 뜻이며 מר(마르 4751) 소리 내어 울다, 괴롭다, 참혹하다, 대성통곡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에담 광야를 사흘 걸어와서 마라라는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 진을 치게 된 것입니다. 마라는 홍해의 남동쪽 약 75Km 떨어진 장소입니다. 이곳에 도착을 했는데 목이 마른 백성들이 물을 먹으려고 하자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소리 내어 모세에게 울부짖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왜 우리를 여기에 데려왔냐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현재 이들의 마음이 괴롭고 참혹하여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마라는 고통이 있고 쓴 맛이 있는 곳입니다. 원죄에 빠진 자들은 이와 같이 소리 내어 울면서 대성통곡하게 됩니다.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져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지 못한다면 영혼들이 참혹하여 결국 영원한 죽음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마라는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단 물로 바꾸어 주셔서 마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원죄에 빠진 영혼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원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것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예수님이 부정하여지시고 더럽혀지셔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마라와 같이 원죄에 빠져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된 자들을 살리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있을 때에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며 모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라에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습니다.
‘한 나무’ עץ(에츠 6086) 나무, 라는 뜻이며 עצה(아차 6095) 견고하게 하다, 눈을 닫다, 확고하게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것을 마라의 쓴 물에 던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한 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나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을 닫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불평의 눈이 열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눈이 열린 것이 아니라 육적인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라의 물을 달게 하시기 위하여 한 나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견고하지 못하고 물러 터진 믿음을 더 견고하고 확고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하여 사용한 나무입니다.
그럼 이것이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이 될까요? 나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조금의 어려움이 오면 금방 옛날 일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때에 나에게 한 나무를 주시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쓴 물과 같은 원죄에 빠져 죽었는데 주님의 생수를 통해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생명나무’라는 단어가 עץ(에츠)입니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셔서 내가 원죄에서 빠져 죽어있었는데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삶이 원죄에 빠져있었을 때에는 인생 자체가 마라와 같이 쓴 인생이었고 어떠한 일을 해도 풀리지 않고 괴롭고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기쁨도 없고 고뇌에 찬 인생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마라의 쓴 인생에 한 나무인 생명나무를 던져주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쓴 인생이 단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영원한 저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쓴 맛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특히 원죄의 쓴 맛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두 가져가셨습니다. 이제는 인생의 단 맛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쁘고 즐거워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입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과 영원히 새 예루살렘에서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마라의 장소와 연관이 되는 인물은 유다입니다. 유다는 레아의 아들로서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창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유다는 구속사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는 지파입니다.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다’ יהודה(예후다 3063) 유다, 라는 뜻이며 ידה(야다 3034) 인정하다, 찬양하다, 찬송하다, 감사하다, 라는 뜻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에는 찬송과 감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 진을 치고 마실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홍해의 기적을 보았지만 마실 물이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하면서 감사와 찬송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마라와 연관이 있는 유다를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마라와 같이 영원한 원죄의 고통에서 살아야 할 인생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 나무가 되시는 생명의 주님을 보내주셔서 영원한 원죄에서 건져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유다 지파를 통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존귀와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살았던 인생에서 감사의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교회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 진을 친 사건을 통해서 영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으로 끝내지 말고 우리들도 주님께 감사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바로 나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든지 나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불만을 토로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가 기분이 나쁘면 자신의 성격대로 불평을 교회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의 어려움이 나에게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의지하면서 유다처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비록 내가 마라와 같은 환경에 있을지라도 인내하시고 주님을 의지하시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단 물로 바뀌게 해 주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데스다 구약성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애굽기 31장 설교말씀] 보호 속에 부르신 하나님(출31:2-6) (0) | 2020.10.08 |
---|---|
[이사야 22장 설교말씀] 하나님을 중심으로(사 22:1-14) (0) | 2020.10.08 |
[구약성경인물 설교말씀] 레아 - 안력이 부족한 여인 (0) | 2020.10.08 |
[신년 주일예배 설교말씀] “풍성한 열매를 얻으리라”(사 65:17-25) (0) | 2020.10.07 |
[구약성경인물 설교말씀] 다니엘 - 큰 전쟁에 관한 이상 (0) | 2020.10.07 |
[창세기 1장 설교말씀] 하나님의 창조(창1:2) (0) | 2020.10.06 |
[구약성경인물 설교말씀] 단 - 우상 숭배의 중심지 (0) | 2020.10.05 |
[구약성경인물 설교말씀] 다윗 -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 (0) | 2020.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