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8장에서는 왕위 권위에 복종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은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왕에게 복종하라(전 8:1-17)
[1절]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 . .
본문은,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지혜자와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를 동일시한다. 사리의 해석을 안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일들,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섭리의 모든 일들의 이치, 그 원인과 진행방향과 예상되는 결과, 바른 대처방식 등을 안다는 뜻이라고 본다.
사람의 지혜는 그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며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한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표현이다. 요셉과 함께 감옥에 갇혔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그들이 꾼 꿈 때문에 그 얼굴에 근심 빛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의 기쁨은 기쁜 얼굴로, 마음의 슬픔은 슬픈 얼굴로 나타나며, 마음의 교만은 교만한 얼굴로, 마음의 겸손은 겸손한 얼굴로 나타나고, 또 마음의 간교함은 간사한 얼굴로, 마음의 착함은 선한 얼굴로 나타난다. 사람의 얼굴은 그 마음을 반영한다.
인간의 무지함은 마음에 긴장과 두려움을 갖게 하고 얼굴을 엄하고 사납게 만든다. ‘사나운 것’이라는 원어(오즈)는 ‘힘’이라는 단어로서 ‘굳음, 엄함(NASB, NIV), 사나움, 뻔뻔함(boldness)(KJV, BDB)’ 등의 뜻을 가진다.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한다(잠 21:29). 그러나 참 지혜는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고 그 얼굴의 거칠고 사나움을 변화시킨다. 지혜는 마음에 이해심, 여유, 평안, 기쁨, 선함을 가지게 하고 그것은 밝고 평온한 얼굴로 나타난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던 스데반은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성경은 말한다(행 6:15).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마음에 지혜와 이해심과 여유를 얻어 우리의 엄하고 사나운 얼굴이 밝고 평온한 얼굴로 변화되게 하자.
[2-4절]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 . . .
본문은,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고 말한다. 왕의 임직시 백성들은 왕을 존중하고 따를 것을 맹세한다. 역대상 11:3,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로마서 13:1-2,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교인들이 당회에 복종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본문은,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급하게]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고 말한다.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라’는 말은 ‘무례하게, 반항적이게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또 ‘일삼지 말라’는 원어(알 타아모드)는 ‘계속하지 말라, 고집하지 말라’(BDB)는 뜻으로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행했을 때는 그것을 즉시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뜻이다.
본문은 또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라고 말한다.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에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으나, 보통은 왕의 행동을 지적할 자가 없고 지적하기가 어렵다. 백성이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뜻이다. 단지, 왕의 명령이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될 때는 복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계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이나 그 세 친구들은 왕의 명령을 어겼고(단 3, 6장),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공회의 명령을 어겼다(행 4:19).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자.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지 않는 한,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하자.
[5-8절]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 . . .
본문은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느니라.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며 재앙을 경험치 않을 것이다. 이사야 48:18,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으리라.” 그러나 지혜가 없는 자는 그렇지 못하여 그에게 임하는 재앙이 심할 것이다.
본문은 또,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므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약 4:14). 내일도 계속 평안할지, 내일 어떤 화가 임할지 아무도 모른다. 또 사람은 자신이나 타인의 생명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없고(마 6:27) 죽음의 시간을 한 시간이라도 지연시킬 수 없다. 호흡이 떠나갈 때는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떠나가며, 죽음이 찾아올 때면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맞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은 자는 가장 지혜로운 삶,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는 꼭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결정을 하며 살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간섭하심으로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4:15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확실한 미래를 지혜롭게, 안전하게 헤쳐나가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9-13절] 내가 이런 것들을 다 보고 마음을 다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으며 . . . .
본문은, “내가 이런 것들을 다 보고 마음을 다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살핀즉 사람[한 사람]이 사람[다른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자신을 해롭게] 하는 때가 있으며,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고 선을 행한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다시 번역하면, ‘내가 본즉 성소에 드나들던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었고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행하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KJV, NASB) 이것도 헛되도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어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고 말한다.
일시적으로 혹은 예외적으로 악인이 평안하고 형통한 경우가 있으나(욥 21:7-13a),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일반 진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다(롬 2장)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곧 죄 짓는 일을 큰 잘못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피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며 평안하고 건강하고 장수하고 형통할 것이며, 그들이 영생을 얻고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 곧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자신의 무지와 욕심과 죄성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은 잘 되지 못하며 평안치 못하며 영생하지 못하며 죽음과 불행을 당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벌을 받지 않는 자도 마지막 심판과 지옥 형벌이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다 받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나,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행하며 모든 종류의 죄를 멀리하자.
[14-15절]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 . .
본문은,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는 고난을 받는 의인도 있고 평안을 누리는 악인도 있다. 전도서 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욥기 21:7-13a과 시편 73:3-5, 12 등도 악인의 평안과 형통함을 증거한다.
본문은,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고 말한다. 허무한 세상, 수고로운 세상, 때때로 모순이 있고 도덕적 무질서가 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쾌락주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고 허무하고 수고로운 세상에 주신 최소한의 위로와 복이다.
우리는 금욕주의로나 쾌락주의로 치우치지 말아야 하며, 먹고 마시며 낙을 누리는 복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인 줄 알고 감사히 누려야 한다.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전도서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우리는 이 허무하고 수고로운 세상에서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복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깨닫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누리자.
[16-17절]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 . .
본문은,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勞苦)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즉 해 아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사람은 지혜를 다해 연구하고 살필지라도 그 원인, 그 이유, 그 진행방향, 그 목적지를 다 깨달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다 알 수 없다. 전도서 3:11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 자체와 그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무한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심히 유한한 존재이다. 무한과 유한의 차이는 무한히 크다. 그러므로 욥기 11:7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말하며, 또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감추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케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50:10,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라고 말하며, 신명기 29:29는,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시해주신 만큼 하나님을 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그를 믿고 순종해야 한다.
[사도행전 8장 강해설교말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까지(행 8: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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