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서 11장에서는 정직과 겸손과 성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서는 구원받은 백성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겸손, 의, 신중, 구제(잠 11:1-31)
1-5절, 공평, 겸손, 의
[1절]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공평한 추는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명하신 바이다. 레위기 19:35-36,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신명기 25:13-15,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였다. 선지자 아모스는 그들이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자”고 말한다고 지적했다(암 8:5). 선지자 미가는 악인의 집에 있는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와 ‘부정한 저울’ ‘거짓 저울추’에 대해 언급하였다(미 6:10-11). 오늘날도 세상에는 불량 재료 사용, 원산지 속임, 가짜 상표, 허위 과장 광고 등 속여서 돈을 버는 죄악된 행위가 너무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시고 공평한 추를 기뻐하신다. 잠언 20:10,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저울을 버리고 공평한 추를 사용해야 한다. 공평한 추는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소득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면 복이 되지 못하지만, 적은 소득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복이 된다. 그러므로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2절]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 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잊었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며 자기 위치를 벗어난 것이다. 교만은 마귀의 죄이며(딤전 3:6)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육칠 가지 죄악들 중 하나이다(잠 6:16-17). 그것은 인간의 대표적인 큰 죄악이다. ‘욕’은 치욕을 가리킨다. 사람이 교만하면 치욕이 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기 때문이며 사람들도 그를 버리거나 따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영광보다는 수치를, 칭찬보다는 욕을 당한다.
마귀는 교만한 천사이었다(딤전 3:6). 그는 하나님의 원수이며 성도의 대적자이다(마 13:25, 39; 눅 22:31; 벧전 5:8). 그는 ‘마귀’ ‘사탄’ ‘온 천하를 꾀는 자’ 등의 악명을 가졌고 마침내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계 12:9; 20:10).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할 때에, 교만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 등은 당을 짓고 모세를 대적하였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땅이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들을 다 삼키게 하셨다. 그들은 산 채로 땅 속에 묻히었다(민 16:1-3, 32-35).
본문은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며 자신이 피조물이요 부족과 죄성을 가진 자임을 알고 자신을 낮추는 자이다. 그는 자기 위치를 지키는 자이다. 겸손한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칭찬과 높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언 15:3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하고, 18:12도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겸손한 자는 복된 지혜자이다. 그는 결코 실패치 않고 항상 승리할 것이다.
[3절]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하느니라.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자이다. ‘성실’이라는 원어(툼마)는 ‘온전함’이라는 뜻이다. 인도한다는 말은 어디로 인도한다는 뜻인가? 그것은 평강의 길로, 생명의 길로,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정직과 의는 평강과 생명과 천국의 길이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사야 48:17-1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옛날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승천하였고(창 5:24) 또 노아는 의롭고 온전한 삶을 살다가 홍수 심판 때에 방주에서 구원을 받았다(창 6:8-9; 7:1).
본문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한다고 말한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보그딤)는 ‘배신자’라는 뜻이다. ‘패역’이라는 말(셀렙)은 ‘비뚤어짐’이라는 뜻이다. 배신자는 양심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일을 행하는 자이다. 그는 결국 자신을 망케 하고 만다. 예를 들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를 배신하고 일시적으로 왕권을 탈취했으나 결국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죽었고(삼하 15장, 18장), 그의 최측근 참모로 그를 도왔던 아히도벨도 결국 목매어 죽었다(삼하 17:23). 주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주를 배신한 후 자살하여 창자가 터져 죽었다(마 27:5; 행 1:18).
[4절]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다. 돈이 평소에 유익이 많기는 하다. 돈이 있어야 음식도 옷도 사고 집도 차도 사고 문화적 혜택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날 곧 재앙의 날에 무익하다. 재물은,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에 걸렸거나 지진, 기근, 전쟁 등이 발생했을 때,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지 못하고 또 우리를 지옥 형벌로부터도 건져주지 못한다. 에스겔 7:19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의는 죽음을 면케 한다”고 말한다. ‘의리’(義理)라는 원어(체다카)는 ‘의’(義)라는 뜻이다. 의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 의는 죽음을 면케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질병이나 기근이나 전쟁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지만, 의는 영육의 죽음과 둘째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였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의에 근거한 것이다.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5절]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길이 곧게 되려니와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완전한 자의 의는 그의 길을 곧게 한다. ‘완전한 자’라는 원어(타밈)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이 세상에서 절대 완전한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함과 의를 요구하신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이었다. 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욥도 그러하였다. 욥기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완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장로의 자격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디모데전서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디도서 1:6-7, “책망할 것이 없고 . . .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우리는 재림하시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써야 한다. 베드로후서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의 길을) 곧게 한다’는 원어(테얏쉐르)는 ‘곧게 한다’는 뜻(NIV) 외에 ‘평탄케 한다’는 뜻이 있다(BDB, NASB). 그것은 장애물이 없이 평안한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완전한 자, 의로운 자는 그의 앞길이 평탄하며 평안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본문은 그러나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해 넘어지리라고 말한다. 악한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자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모든 말과 행동이 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근본 내용인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다. 악한 자는 그의 악을 인해 결국 넘어지고 만다. 넘어진다는 말은 실패하고 재앙과 불행을 당하고 마침내 죽는다는 것을 말한다. 죽은 후에는 지옥 형벌이 그를 기다린다.
우리는 불법하고 부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벌려 하지 말고, 적은 소득이라도 의롭고 정당하게 번 것만 우리에게 복이 됨을 알자.
우리는 결코 교만하지 말자. 교만하면 패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겸손한 자가 되자. 겸손한 자에게 지혜가 있고 승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직하고 온전한 자가 되어 복된 길로만 가자. 우리는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는 사특한 자, 배신자, 비뚤어진 길로 가는 되지 말자.
우리는 진노의 날에 무익한 재물보다 의를 구하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았으므로 이제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만 살아가자.
우리는 악을 버리고 의로운 길과 완전한 길로만 가자. 그것이 성도의 정로(正路)이다. 거기에 평안과 형통이 있고 복과 영생이 있다.
6-10절, 의인은 구원을 얻음
[6절]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해 구원을 얻는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자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실제로 의롭게 살아야 한다. 구원은 이 세상의 각가지 어려움들, 즉 마귀의 시험과 죄, 몸의 병과 죽음, 그리고 내세의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사는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영혼과 몸의 불행과, 현세와 내세의 불행에서 건져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의롭게 행하려 했던 다윗을 사울의 칼로부터 구원해주셨다(사무엘상). 의인은 그의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할 것이다(시 1:3). 성도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를 안위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시 23:4). 하나님께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롬 2:7).
그러나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사로잡힐 것이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보그딤)는 ‘배신자’라는 뜻이다. ‘자기의 악’이라는 원어(하우와)는 ‘(악한) 욕망’이라는 뜻이다(BDB, NASB, NIV). 배신자는 돈이나 세상 권세나 명예 등 세상 것에 대한 탐욕 때문에 배신한다. 그는 그의 악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예수님의 제자이었던 가룟 유다는 은 30개에 선생님을 배신하고 악한 무리에게 그를 넘겨주었다. 그는 돈 욕심에 사로잡혔다. 배신자들은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히며 마침내 영육의 멸망, 현세와 내세의 멸망에 이른다.
[7절]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진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계명을 어기며 사는 악한 자는 아무리 좋은 소망을 품어도 그 소망이 헛되게 된다. 실상, 악인의 소망이란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부요, 세상적인 권세와 영광, 육신적인 쾌락 등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헛되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이다. 이 진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도서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밝히 교훈하셨다. 사도 요한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면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간다고 증거하였다(요일 2:15-17). 우리는 악인들이 죽을 때 그들의 소망이 끊어진다는 것을 안다. 인생은 짧고 유한하다. 인간은 죽을 때 그의 세상적 소망도 함께 끝난다. 더욱이, 악인이 하나님의 징벌로 갑자기 죽을 때 우리는 그의 소망이 끊어짐을 실감한다.
또 불의의 소망은 없어진다. ‘불의’라는 원어(오님)는 ‘사악한 자들’ 혹은 ‘힘’(BDB)이라는 뜻 같다. 그것이 ‘힘’이라는 뜻이라면, 그것은 악인이 육신의 힘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고 소망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악한 자들의 소망, 혹은 그들이 의지하는 육신의 힘이나 세상 권세는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면 그렇게 건강하던 그는 병상에 눕게 될 것이며 그가 누리던 세상의 부귀와 권세는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이다. 악인의 소망은 참으로 헛되다.
그러나 의인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의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부활, 천국, 영생을 소망하며, 또 땅 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 일들을 소원한다. 의인의 그 소원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잠 10:24).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8절]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자, 곧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성경 교훈에 순종하여 의롭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의인이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의인도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함을 전제(前提)한 말이다. 세상에는 환난이 많고 의인도 환난을 당한다. 때때로 병에 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며 사람들의 미움과 핍박을 당하고 죽음의 위험도 당한다. 이 모든 일 배후에는 마귀의 시험이 있다.
그러나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건지시기 때문이다. 잠언 11:6,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욥기 5:18-20,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심한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셨음을 간증하였다(고후 1:8-10).
본문은 악인이 와서 그를 대신한다고 말한다. 악인은 의인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미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그 음모로부터 건져내시고 도리어 악인이 그 함정에 빠지게 하시는 것이다. 시편 7: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아 죽이려 계획했던 악한 하만은 도리어 자신이 그 나무에 달려 죽었고(에 7:9-10), 다니엘을 참소하여 사자굴에 던져 넣게 했던 자들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지워 죽임을 당했다(단 7:24).
[9절]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한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카네프)는 3절과 6절의 ‘사특한 자’라는 원어(보그딤)(배신자)와는 다른 말로서 ‘불경건하다’는 뜻이다(BDB, KB, NASB, NIV). 불경건한 자는 입으로 이웃을 망하게 하고 파괴시킨다. 그는 악하고 거짓되게 이웃을 비난하고 중상모략함으로 이웃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신임성을 떨어뜨리고 그를 사회에서 매장시키며 파괴시킨다. 오늘날 인터넷 ‘악플들’(악하고 거짓된 댓글들)은 이런 유의 것이다.
출애굽기 23: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디도서 1:10-11,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사람의 모든 말은 심판날에 보응을 받는다(마 12:36).
그러나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에 순종하여 의롭게 사는 자이다. 의인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구원과 내세에 대해 바른 지식을 가진다. 믿음은 지식을 포함한다. 의인은 그 믿음의 지식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경건한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 등이 그를 비난하며 느헤미야가 왕을 배반하고자 한다는 헛소문을 냈지만, 그는 그들에게 대꾸하지 않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기 할 일에 힘썼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원수들의 음모로부터 구원해주셨다.
[10절]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한다. 형통하다는 말은 몸의 건강, 사업의 번영, 직장에서의 승진 등 일이 잘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올바르게 사는 자들이 잘 되면 성읍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사람의 양심이 공의와 선과 진실을 다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인들이 잘 되면 양심적인 일반 대중은 동감하여 기뻐하는 것이다. 또 의인들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면 그 사회는 공의와 공평이 시행되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니 사람들은 더욱 기뻐할 것이다.
유다 역사에 보면, 왕자들을 죽이고 왕권을 취한 악한 여자 아달랴가 6년간 통치하던 중 경건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충성된 주선으로 정통 왕자 요아스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온 국민은 즐거워했고 예루살렘 성이 평온하였다고 열왕기하 11:20은 기록했다. 또 에스더 시대에 악한 신하 하만이 죽임을 당하고 모르드개가 왕 앞에 높임을 받았을 때도 수산성은 즐거이 부르며 기뻐했다고 에스더 8:15는 기록했다.
또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친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남을 해롭게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의인들을 핍박한다. 패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무서운 병에 걸리든지, 세상에서 지위나 신분상에 큰 어려움을 당하고 마침내 죽는 것을 말할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악인들의 패망을 기뻐한다. 그들은 무시당함과 핍박당함에서 놓여나고 억울함이 갚음을 받고 사회에서 공의가 시행됨을 인해 기뻐하는 것이다. 사람의 양심은 악인의 패망을 기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자가 되고 배신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로서 이제 과거의 모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 즉 성경의 교훈대로 순종하여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그것이 구원과 영생의 길이며 또 평안의 길이다.
우리는 악인의 소망, 곧 물질적, 육신적, 세상적 소망을 버려야 하고 오직 의인의 소망, 영적, 천적 소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의 몸의 영광스런 부활과 복되고 영광스런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을 소망하자.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이나 악인들의 비방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자. 구주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받은 의 안에서 의롭고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르고 선하게 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형통의 복을 누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는 자가 되자.
11-15절, 말, 조언, 빚 보증
[11절]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해 진흥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사는 자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사랑이므로 정직한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의 인격과 권리를 존중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읍을 위해 올리는 정직한 자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마음 속에 악을 품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지만(사 59:1-3), 정직한 자의 기도는 잘 들어주신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약 5:16).
성읍이 진흥한다는 말은 여러 방면에서 발전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속 사회가 전쟁이나 범죄가 없는 평안한 사회가 되고 또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세상 나라에는 전쟁의 위험이 있고 각종 범죄가 있고 각 분야에 불법한 일들이 있고 교육 분야에도 비정상적인 일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위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성읍은 악한 자의 입을 인해 무너진다. 악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없는 자이다. 그의 말들은 성읍을 파괴시킨다. 불경건한 자의 입은 이웃을 망케 한다(잠 11:9). 예컨대, 이북의 거짓된 악선전이 남한의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견해를 심어주었고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다. 북한은 6.25 전쟁을 일으킨 독재 정권이요 수많은 테러를 행하였고 300만명의 인민을 굶어죽게 하였고 자유와 인권 존중이 없는 사회이지만, 그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요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로, 미국을 남북통일의 방해꾼으로 선전하여, 우리나라를 혼란과 멸망에 빠뜨려 적화통일을 하려 하고 있다.
[12절] 그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지혜가 없거니와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지혜가 없다’(카사르 레브)는 원어는 ‘마음이 없다,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겸손의 마음, 사랑의 마음, 지혜의 마음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하는데,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그런 마음이 없는 자이다. 또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나 의지력이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자신의 부족은 보지 못하고 남의 부족만 보는 자이며, 실상 교만하고 지혜가 없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서서 자신을 세리와 구별하며 자신의 경건과 도덕성을 감사하였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눅 18:9-14).
본문은 그러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이웃의 부족을 부족으로 알지 못해서가 아니고 사람이 누구나 다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며, 또는 자신에게도 비슷한 부족이 있거나 혹은 더 큰 부족이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또 현재 그에게 그런 부족이 없다 할지라도, 자신도 언젠가 그런 부족에 떨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며, 또 시간이 지나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그 이웃도 그 자신의 부족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명철한 자는 그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13절]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한담한다’는 원어(라키일)는 ‘중상(中傷)하는 자’라는 뜻이다(BDB). ‘중상’(中傷)은 사실 무근한 말로 남을 비방하는 것이다. 두루 다니며 남을 중상하고 헐뜯는 말을 하는 자는 악한 자이며 불성실한 자이다. 남을 헐뜯는 말 하는 것 자체가 불성실한 일이며 또 악한 일이다. 성실한 사람은 남의 집에 두루 다닐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두루 다니며 쓸데없는 말, 거짓말, 더러운 말, 부덕한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해야 한다(약 1:19). 또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자이다(약 3:2).
본문은, 두루 다니며 남을 중상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한다고 말한다. 사람에게는 종종 비밀이 있다. 그것은 그의 실수와 죄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의 약점일 수도 있다. 그것은 그에게 슬프고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일 수 있고, 또 그의 명예에 관계되는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대체로 남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남을 중상하는 자는 그가 아는 남의 비밀을 감추어 두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남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것을 숨긴다고 말한다. 마음이 신실한 자는 믿을 만한 자, 성실한 자를 가리킨다. 마음이 신실한 자는 남의 비밀, 곧 남의 약점이나 실수, 혹은 그의 개인적 은밀한 일을 숨긴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사랑은 허다한 허물까지도 덮는데, 하물며 남의 은밀한 일이랴. 사람이 알 권리를 주장하지만, 남의 비밀까지 다 알 권리를 가지지는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숨긴다.
[14절]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도략’(鞱略)이라는 원어(타크불로스)는 ‘조언’(counsel)이라는 뜻이다(BDB). 그것은 좋은 조언을 뜻한다. 좋은 조언이란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하는 조언,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조언을 가리킨다. 나라가 어려울 때 좋은 조언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지만, 좋은 조언자가 많으면 나라가 평안을 누릴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회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무엇보다 도덕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폭력과 거짓과 음란이 엄하게 징벌되어야 한다. 가정이나 학교나 사회 곳곳에서 폭력이 근절되어야 하고,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및 불량식품이 근절되어야 하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음란의 풍조, 특히 인터넷 음란물들과 공공연한 성매매업이 근절되어야 한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체제가 재확인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자유와 인권 존중은 그 어떤 가치보다 귀한 가치이다. 우리는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의 적화(赤化)통일 계략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6.25전쟁의 원인과 그 처참함을 우리 자녀들에게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북한을 긍휼히 여기지만, 그 독재정권의 인권탄압, 특히 종교자유의 탄압은 규탄해야 한다. 또 우리는 6.25전쟁 때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도왔던 미국과 자유 우방에 대해 참으로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종교적 자유는 그들의 은혜를 크게 입었다. 우리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15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타인을 위해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한다. ‘타인’이라는 원어(자르)는 ‘낯선 자, 타인’이라는 뜻이다. 친구를 위한 재정 보증은 물어줄 만큼 가깝거나 물어줄 만큼 돈의 여유가 있다면 모르나 그렇지 않다면 낭패를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가족들 간의 보증도 물질적 손해와 정신적 고통을 얻는 경우가 없지 않다. 하물며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보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잠언 22:26-27은,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고 말하였고, 잠언 6:1-5는,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은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다고 말한다. 평안하다는 말은 안전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대신 물어줄 만큼 가깝거나 돈의 여유가 있다면 보증을 서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재정 보증은 안 하는 것이 좋다. 재정 보증은 사랑의 행위일지는 몰라도 분명히 어리석은 행위이다. 교회 안에서는 성도들 간에 시험이 않되도록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는 자기의 경제 형편에 맞게 검소하게, 절약적이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정직하게 살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위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자. 그리스도인은 애국자이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나라를 허물어뜨리려는 악한 자들을 분별하고 그들의 말을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의 부족을 볼 때 그를 멸시하지 말고 잠잠하며,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자.
우리는 두루 다니며 거짓말로 남을 비방하지 말고 또 결코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일에 충실하자.
경건하고 도덕적인 좋은 조언은 우리나라를 평안의 길로 이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가 속한 단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파괴적인 말을 하지 말고 좋은 조언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형제와 이웃을 위해 구제하는 것은 선한 일이며 해야 할 일이지만, 남을 위해 재정 보증을 서거나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일을 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교회생활은 순수해야 한다.
16-20절, 인자, 의, 온전함
[16절]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는다. ‘유덕한’이라는 원어(켄)는 ‘은혜, 덕,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적, 인격적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유덕한 여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잠언은 이런 여자를 현숙하고 덕행 있는 여자라고 부른다(잠 31:28-30). 여성도는 외모나 돈이나 옷이나 집 등에 가치를 두지 말고 경건과 도덕성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디모데전서 2:9-10,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덕스러운 여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곧 남편과 자녀들에게서나 주위 사람들에게서 존중히 여김과 칭찬과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이다.
본문은 또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고 말한다. ‘근면한’이라는 원어(아리침)는 ‘강한’(KJV), ‘무정한, 잔인한’(BDB, NIV)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것은 남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런 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때때로 무정한 자같이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정한 남자가 돈은 많이 벌겠지만, 그것이 큰 가치가 되지는 못한다. 돈은 결코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삶의 행복, 특히 죄사함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
[17절]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인자한 자는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한다. 인자함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우리는 상대의 처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누가복음 6:27,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로마서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인자한 자가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하는 것은 인자한 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힘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18: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인자한 삶은 결국 자신에게 복이 된다.
그러나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한다. 잔인함은 무정하고 무자비함이다(롬 1:31). 잔인한 자는 양심의 가책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가지며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린다.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나 악한 감정은 몸에 큰 해가 된다. 또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 있다.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아합과 이세벨은 순진한 백성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거하는 거짓 증인 둘을 세워 그를 돌에 맞아 죽게 하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나 그들은 마침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왕상 21-22장).
[18절]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악인의 삯은 허무하다. ‘삯이 허무하다’는 원어(오세 페울랏 솨케르)는 ‘거짓된 일을 한다’(KJV), ‘거짓된 삯을 얻는다’(NASB, NIV)는 뜻이다. 거짓된 일은, 경건한 듯하나 불경건하고, 기도하지만 형식적이고, 남을 축복하나 속으로는 저주하고, 선을 행하나 실상은 악을 행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의 수고는 현세적이며 육신적이며 쾌락적이며 이기적이다. 그것은 죄악되다. 그것은 의롭고 선한 일 같으나 실상 그렇지 않으며 결국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헛된 일이다. 요한일서 2:16-17,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나 그와 반대로,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다. 의를 행하는 자에게 확실한 보상이 있다. 성도의 의롭고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시고 그것에 대해 갚아주시며 상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주신다.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마지막 심판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9절]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른다. ‘의를 굳게 지키는 자’라는 원어(켄 체다카)는 ‘참된 의’라는 뜻이다(BDB). 본문은 “참된 의는 생명에 이른다”는 말이다. 참된 의는 거짓된 의, 외식적 의와 구별된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그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행하는 것이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요점은 사랑이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베풀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그것이 의이다.
참된 의는 생명에 이른다. 율법의 원리가 그러하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2:6-7).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여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 의(義), 곧 믿음의 의는 신자를 영생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순종으로 표현된다. 성도의 삶은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롬 6:22).
반면에,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른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모든 죄가 악이다. 타인의 생명과 정조와 재산과 명예를 해치는 모든 행위가 악이다. 악인은 망하고 죽고 죽은 후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므로 죄인에게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필요하다.
[20절]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 ‘패려하다’는 원어(익케쉬)는 ‘패역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성경의 교훈과 양심에 따라 올바르고 선하게 행하지 않고 반항적이게 악하고 거짓되게 행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패역한 자, 곧 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가진 자를 미워하신다. 잠언 6:16-19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대표적 죄악 여섯, 일곱 가지로 ① 교만한 눈, ② 거짓된 혀, ③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④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⑤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⑥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⑦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를 들었다. 또 잠언 8:13은,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미워하신다.
그러나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는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의 표현이다. 온전함이라는 말은 흠과 점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것을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며, 구원의 목표 곧 완전한 성화(聖化)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온전케 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모든 죄에서 구원을 받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행위의 열매로 그 구원을 증거하기를 원하신다. 경건과 도덕성, 즉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은 인간다움의 중요한 내용이며 인간의 가치이다. 시편 119:1은 행위 완전하여 하나님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다.
여성도들은 유덕한 여자가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그것은 외모의 단장보다 자신의 내면성과 인격성, 즉 자신의 경건과 의와 선에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덕이 있는 자이다.
우리는 결코 악하고 잔인한 자가 되지 말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일이며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할 뿐이다. 우리는 항상 선하고 인자한 자가 되자. 그것이 복되고 평안한 삶이다.
우리는 악인처럼 현세적, 육신적, 물질적 유익을 구하며 살지 말자. 그것은 다 거짓되고 헛되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지나가 버리는 덧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소망하며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의는 생명에 이르고 악은 사망에 이른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교훈하신 대로 의와 선만 행하자. 사망의 길을 버리고 생명의 길을 붙들자.
우리는 마음을 악하게 가지지 말자.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힘써 순종함으로써 행위의 온전함을 위해 힘쓰자.
21-26절, 의인, 아름다움, 구제, 이웃 사랑
[21절]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라는 원문(야드 레야드)은 ‘확실히’라는 뜻이라고 한다(KB, NASB, NIV, Keil-Delitzsch). 확실히 악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악인은 남을 해치는 자, 즉 말로나 물질로나 폭력으로 남을 해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며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며 악인의 악행을 다 보시고 아시고 판단하시고 노하셔서 악인의 악에 대해 보응하시고 벌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출애굽기 20:5,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러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바로 살고자 힘쓰는 자이다. 의인에게도 때때로 어려운 일이 생긴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 때문에 오기도 하고 단순히 신앙 인격의 훈련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에서 항상 그를 건져주신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또 그 고난은 그를 더욱 믿음 있게, 겸손하게, 거룩하게 만든다. 의인은 자손들도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다윗은 시편 37:25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말하였다.
[22절]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이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의 가치와 내면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대조해 말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외적인 아름다움에 큰 가치를 둔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외모, 즉 아름다운 얼굴, 고운 피부, 균형잡힌 몸매 등 외적인 아름다움을 크게 여기고 추구한다. 그래서 여인들은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비싼 화장품을 쓰고 피부 관리를 하고 성형 수술까지도 한다.
물론 외적 아름다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사람의 본래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내 사라의 나이 65세 때에 아브라함이 그에게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창 12:11),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름다웠다.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도 곱고 아름다웠다(창 29:17). 경건한 욥의 딸들도 아름다웠고(욥 42:15), 믿음 있는 에스더도 용모가 곱고 아름다운 처녀이었다(에 2:7).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참 가치를 외적인 데 두지 않는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는 말은 사려 깊지 못한 여인의 외적인 아름다움이 돼지코에 단 금고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사람에게 내면적, 인격적 아름다움은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도 여자들이 외모의 단장보다 염치와 정절과 선행으로, 또 온유하고 조용함으로 자신을 단장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2:9; 벧전 3:3-4).
[23절]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다. ‘오직 선하다’는 말은 그의 소원하는 내용이 오직 선할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오직 선하다는 뜻일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하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의(義)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의인의 소원은 선한 내용일 수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소원을 가진다. 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소원을 가진다. 즉 그는 부모님을 섬기며 가족들을 돌아보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의인의 소원은 그 내용이 선할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선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기쁘게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신앙의 좋은 열매는 선행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하게 살기를 소원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소원을 기쁘게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이다. 의인의 소원은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것은 선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룬다. 이 말씀은 앞부분과 대조를 이룬다. 소망은 소원과 비슷한 뜻이다. 악인의 소망은 그 내용이 악할 뿐 아니라 그 결과도 나쁘다. 악인은 이기적이고 남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아합의 욕심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이었다. 가룟 유다의 소원은 은 30이었다. 헤롯의 소망은 세상 권력과 명예, 또 물질적 부귀와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었다.
[24-25절]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본문은 구제를 교훈하며 권장한다. 율법은 구제를 교훈한다. 신명기 15:10-11,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약성경도 구제를 강조한다. 누가복음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구제 헌금]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신약성경이 말하는 헌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요한일서 3:17-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구제를 많이 한다고 가난해지지 않는다. 구제에 대해서는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 15:10, “이[구제]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26절]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다. 곡식을 내지 않으면 이웃이 굶게 되고 죽게 된다. 그것은 자기 배만 위하는, 즉 자기 생명, 자기 건강, 자기 행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일이다. 그것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 없는 행동이다. 어려운 이웃에게 구제하기는커녕 자기가 가진 것을 남에게 파는 행위도 거부하는 이기적인 사람에 대해 사람들은 “혼자 실컷 먹고 배가 터져 죽어라”고 저주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저장한 곡식을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기뻐하며 축복하고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사는 사회적 존재이다. 만일 사람들이 남을 위하는 물건을 만들지 않거나 그것을 시장에 팔려고 내놓지 않으면, 우리는 당장 매우 불편한 생활을 할 것이다. 오늘날 시장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함께 사는 존재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구제의 정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기가 넉넉히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살아야 하고 또 어려운 이웃에게 구제하며 살아야 한다. 율법은 반드시 구제하라고 명했다. 세례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눅 3:11). 사도시대의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행 2:44-45; 4:32).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 우리는 말로나 물질로나 심지어 폭력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악을 행하지 말자. 악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벌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외적 치장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고 내면적 인격성, 즉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이 되기 위해 마음을 쓰자.
우리는 이기적이고 죄악된, 세상적, 물질적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남에게 유익을 주고 자신에게도 복된 선한 소원을 가지자.
우리는 구제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구제와 구제 헌금에 힘쓰자. 또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도 풍족케 하고 윤택케 하는 것임을 알자.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서로 돕고 서로 돌아보며 살자. 성경의 요점은, 첫째,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며, 둘째,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다.
27-31절, 선한 자, 의인, 지혜자
[27절]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는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 즉 말로나 물질로나 힘으로 남을 돕는 것을 가리킨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것은 선을 행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돈을 쓰고 손으로 수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와 사람들에게 은총과 사랑을 받을 것이다. 잠언 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그러나 악을 좇는 자에게는 악이 임할 것이다. 악이라는 원어(라아)는 도덕적 악과 물질적, 환경적 악 곧 재난을 다 의미한다. 악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남에게 해를 주는 일을 가리킨다. 이런 자에게는 재난이 임할 것이다.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잠언 14:32,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로마서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라.”
[28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 돈은 인간의 삶에 필요하고 유용한 수단이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돈이 있으면 좋은 옷이나 차나 집을 사고 좋은 음식도 먹을 수 있지만, 돈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돈은 인간의 죽음을 막고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 돈은 인간에게 죄사함과 의를 줄 수 없다. 죄인들은 돈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
돈은 성도에게 큰 시험거리와 유혹물이다. 돈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사람을 해이하고 방탕하게 만든다.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성경은 돈을 의지하거나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 하라.”
그러나 의인, 곧 돈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푸른 잎사귀같이 번성할 것이다. 신명기 28장의 복의 약속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시편 1:3은,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하고, 잠언 4:18은,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29절]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자기 집 곧 자기의 가정과 가족들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다. ‘해롭게 한다’는 원어(아카르)는 ‘소란케 한다, 괴롭힌다, 근심과 고통을 준다’는 뜻이다. 자기 집을 소란케 하고 괴롭힌다는 말은 가족들에게 거칠게 대하고 가족들을 미워하고 비인격적인 말이나 행동을 하고 구타하고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 등을 말할 것이다. 이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가족들을 평안케 하고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의무를 저버린 행동이다.
자기 집을 괴롭히는 자의 소득이 바람이라는 것은 남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여 얻은 소득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가정의 행복의 요소는 부부가 사랑하면서 함께 늙고 자녀들이 효도하고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를 가지는 것 등이다. 그러나 가족들을 괴롭힌 자는 가정의 파탄, 곧 가족관계의 파탄을 경험할 것이며, 부부의 이혼이나 가족들의 뿔뿔이 흩어짐, 또 자녀들의 방탕과 부모 거역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남편들에게 해당하는 교훈이지만, 아내들에게나 자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그의 계명들에 순종함이 없고 교만하고 강포하고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며 그런 미련한 자는 일시적으로 성공할지 몰라도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 특히 지혜자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겸손과 온유, 사랑과 의, 선과 진실을 행하는 자들의 종이 될 것이다(신 28:43-44).
[30절]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이다. 생명나무는 생명을 주고 생명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상징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의지하며 그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하는 의인이 맺는 열매나 받는 보상은 생명이다. 본인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의 강건함 즉 심령의 평안과 몸의 건강을 얻고 영생에 이를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으나 의인에게는 강물 같은 평안이 있다. 또 의인에게는 몸의 건강도 보장된다. 잠언 3:7-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것은 근심 걱정과 질병과 가난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의의 결과는 생명이다. 그것은 평안과 건강과 영생을 포함한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또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는다. ‘사람을 얻는다’는 원어는 ‘영혼들을 얻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사는 의인이 지혜자이며, 그는 영혼들을 얻을 것이다. 물론, 지혜로운 자는 그를 사랑하고 아끼고 협력할 진실한 친구들과 동료들을 얻을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디모데(빌 2:20-22)나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으려 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롬 16:3-4)나 그를 위로한 오네시보로(딤후 1:16) 같은 동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혼들을 얻는다’는 말은 영혼들을 구원한다는 뜻을 가진다고 본다. 지혜자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영생의 길로 이끌 것이다(단 12:3). 의인은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자가 될 것이다.
[31절]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공의로 보응하신다. 즉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신다. 인간은 도덕적 존재이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한 순간도 놓침이 없이 성실하시다. 욥기 7:17-18,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동시에 도덕 세계의 이치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의 죄를 묵과하지 않으신다. 베드로전서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하나님을 경외했던 다윗이 간음과 살인의 큰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는 징벌을 내리셨다. 그의 아들 암논은 이복여동생 다말을 강간하였고 그의 오빠 압살롬은 그 형 암논을 죽였고 또 후에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叛旗)를 들었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된 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12:6, 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의인에게도 이런 징벌이 있다면, 하물며 악인들이 하나님께 받을 보응은 얼마나 더 무서우랴! 악인의 결국은 멸망 곧 지옥 불못이다(계 21:8).
우리는 결코 악을 계획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섭리자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벌을 내리실 것이다.
우리는 허무한 돈, 우리를 멸망케 하는 돈을 의지하거나 사랑하지 말고 오직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여 의를 행하자. 돈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는 돈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고 온유와 겸손, 사랑과 의와 선과 진실함으로 우리 자신의 집을 평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하자. 평안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복이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교훈하신 대로 의와 선을 행하는 의인이 되자. 그것이 평안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다. 그것은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길이다.
우리는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말고 악을 행치 말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그것이 평안과 형통의 길이며 영생의 길이다.
[욥기 강해설교] 엘리바스-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욥 2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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