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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설교] 갈릴리 가나에서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님(요 4:43-54)

성령의 능력 2024. 3. 1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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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 강해설교 말씀은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생겼는데 치유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가버나움에 병들어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예수님을 갈릴리 가나에 찾아와서 병을 고쳐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네 아이가 살아 있다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가버나움에 있는 신하의 아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님(요 4:43-54)

 

.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표적 4:43-54

1. 갈릴리로 가심(43-45)

이틀 후에 예수께서는 다른 동네에서 전파하셔야 하기 때문에 사마리아를 떠나셨다(눅 4:43).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셨다.

(1) 갈릴리 : 예수께서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시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여러 고장을 다니셨지만 나사렛에는 거의 다니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직접 증거하신데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하기 때문(44)'이었다. 주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거의 높임을 받아오지 못했으며, 특히 그들의 고향에서 그리하였다.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그의 가까운 형제들이 가장 그를 무시하였다(7:5). 사람들은 그 자존심과 시기심으로 말미암이 한때 자기 학교 동료나 소꿉 친구였던 사람들의 가르침은 비꼬기 쉽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가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복음 전파자들을 비웃는 사람들은 그 메시지가 줄 유익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2) 갈릴리에서 받으신 환영(45) :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결코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다. 혹 어떤 사람이 마땅한 대접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서 영접을 받는 법이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를 맞을 준비가 잘 되어 있었던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던 이적을 저들이 목격했던 까닭이었다(45). 갈릴리 사람들도 절기 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상경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공공 행사에 부지런히 찾아 참석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기대 이상의 신령한 혜택을 누리게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행하신 모든 일을 목격하였다. 그 모든 일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베풀어졌던 것이었으나, 그들보다는 갈릴리 사람들이 그 이적들에 의해 훨씬 유익을 얻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사람이 뒤섞인 대중 속에 전해진 말씀은 그때까지 끊임없이 들어왔던 청중보다는 우연히 참석했던 사람에게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3)갈릴리 가나 :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가나로 가셨는데 그곳은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었다(46). 복음서 기자는 우리가 보아왔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기적을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6-54)

이 기사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1) 환자의 보호자와 환자 : 환자의 보호자는 왕의 신하였으며 환자는 그의 아들이었다. 왕의 신하가 있어(46). 그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나 그 아들은 병이 들어 있었다. 명예로운 작위나 직책도 이와 같이 병마와 죽음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다. 환자가 있는 가버나움에서 지금 그리스도께서 계신 가나까지의 거리는 약 15마일 정도였다. 가족의 병으로 해서 이 귀족은 이렇게 멀리에 계신 그리스도께 찾아왔던 것이다.

(2) 이 보호자는 어떻게 의사에게 청을 드렸는가? 그는 자신이 직접 예수께 찾아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였다(47).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아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아들이 아프자 그는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고 아들의 병을 고치고자 하였다. 또한 우리 주 예수께 대한 그의 크나큰 존경심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명령할 수도 있는 당국의 관원이면서도 자지가 직접 찾아와 기다려 예수께 간청을 올렸던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아무리 위대한 사람들일지라도 간청하는 처지가 되어야 하는 법이다. 여기까지 달려온 그 관원의 믿음에서 우리는 혼합된 요소를 관찰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아들을 고쳐 주시리라 확실하게 믿고 있지만 자기 아들이 아파서 누워있는 곳까지는 오셔서 고쳐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그의 신앙은 확실한 부분도 있었지만 연약한 부분도 있었다. 우리는 기도할 수는 있으나 처방을 내릴 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즉 우리는 "주여 저를 고쳐 주옵소서. 그러나 말씀으로 하시든 만져서 하시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3) 이에 대한 온유한 책망 :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 하리라(48). 비록 그가 귀족이요 자기 아들의 일로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책망을 내리셨다. 먼저 예수께서는 자비를 받을 준비를 시키시기 위해 그에게 그의 죄와 연약함을 보여 주시고 그의 청을 들어주신다. 그리스도께서 후의를 베풀어 주시고자 하실 때는 불유쾌한 내색을 하심으로 그 사람을 먼저 겸손케 하신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다른 장소에서 행하셨던 기사들에 대하여 신빙성 있는, 확실한 얘기를 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직접보지 못하면 거의 믿지를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후한 대접을 받아 기분이 충족되지 않으면 도무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심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다양한 사건들을 목격했지만, 표적과 기사로 해서 결국 믿게 되는 그 정도였지 더 진보해 나가지 못하였다. 말씀의 신령한 권능도 그들에게는 별 감동이 없었고 매력이 없었으나 기적의 감각적인 힘만은 그들에겐 감동적이요, 매력적이었다.

(4) 끈덕진 간청 : 주야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49절). 이 신하는 예수님의 책망을 인내심 있게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 정중히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그 질책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따라서 거절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청을 드렸으며 청을 들어 줄 때까지 계속 간청하였다. 그는 온 신경을 가지 아이에게 쓰고 있어서 다른 것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여전히 그는 그리스도의 권능에 대한 그의 신앙의 약함을 보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내려 오시도록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도록 해야만 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병든 아이는 고치실 수 있지만 죽은 아이는 살려내지 못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는 너무 대가 늦었다는 듯이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라고 말한다. 그 사람은 엘리야도 엘리사도 죽은 아이들을 살려 냈었다는 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저들의 권능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가 얼마나 서두는가 보라. "내 아들이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고치실 때를 놓치실까 봐 두려워하는 듯하다.

(5) 그리스도의 평안의 답변 :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50).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권능의 일면을 보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병을 고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대단히 쉽게 고칠 수 있으시다. 여기에는 병을 고치기 위해 언급된 말이나 행위 또는 명령이 전혀 없다. 그러나 병은 이미 나아 있었다. 이 신하는 그리스도를 모셔 가서 병을 고치고자 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병을 고치시되 내려가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여 더욱 빨리 치료는 끝났으며 신하의 실수도 고침을 받았고 그의 신앙도 바로 잡아졌다. 이리하여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더욱 잘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청을 거절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합당한 것으로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왕의 신하가 그의 아들의 병으로 몹시 가슴 아파함을 아셨으므로 그를 책망하셨으나 곧 그 아들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확신시켜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녀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잘 알고 계시다.

(6)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그 신하의 신앙 :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방법에 만족했다. 그는 지금 어떤 표적이나 기적도 눈에 볼 수 없으나 기적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셨으므로 그 사람은 그 분을 믿었다. 그리스도께서 가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는 자기 길로 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의 믿음의 신실함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7) 신앙의 확인 : 그는 돌아가는 도중 자기 하인들을 만나 하인들의 보고와 비교해 봄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확인한다. 그의 종들은 그 아들이 나았다는 일치된 뉴스를 가지고 그에게 나아왔다(51). 그는 자기의 신앙의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분의 말씀을 부지런히 비교해 보는 일은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는 일에 대단히 유익하다. 이것이 바로 그 신하가 취했던 과정이었다.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52). 그 종들이 대답했다.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그 아들이 낫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갑자기 완전히 나았다. 그리하여 그 아버지는 그 때가 예수께서 자신에게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던 그때임을 알았다. 그 아버지가 믿음을 확증하는 데는 두 가지 사실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첫째, 그 아들의 회복이 점차적이 아니라 갑작스러웠다는 점이다. 그 종들은 어제 대략이 아니라 정각 제 칠시에 그에게서 열이 떠났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효과를 보기 위하여는 시간이 걸려야만 하고, 혹은 단지 기대만을 걸게 하는 약과 같이 역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즉각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루어지기 위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때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53). 이러한 사건의 동시 발생은 하나님의 섭리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 사람이 하는 일은 거리에 따라 시간이 지연되고 일이 늦어지게 되는 법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그런 법이 없다.

(8) 이 사건이 행복된 결과 : 이 아들의 치유는 그 가족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왕의 신하 자신은 믿었다. 그는 앞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심정을 사로잡는 방법을 다양하게 가지고 계시다. 그리고 일시적인 자비를 허락하시므로 더 고귀한 것을 위한 길을 예비하신다. 이와 같이 하여 그 신하의 전 가족이 믿게 되었다. 그들 모두 이 기적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이 기적은 그 가족의 소망의 꽃을 되살려 놓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들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왕의 신하였으므로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때는 그들 모두를 자기와 함께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그 아들이 병이 이 집안에 일으킨 변화는 얼마나 축복된 것이었던가! 이러한 사건으로 해서 우리는 환난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환난 뒤에 어떤 선이 뒤따라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9) 이 사건에 대한 복음서 기자의 언급 : 이것은두번째 표적이니라(54). 211절을 참고하라. 유대 지방에서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먼저 기적을 베푸셨으나 그곳에서 내몰리심으로 갈릴리에서 기적을 행하셨다. 이곳에서 그리스도를 환영치 않으면 저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환영을 받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한다면 자기 집의 창문을 닫아 햇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이 온 세상에 비쳐드는 햇살은 막아낼 수 없다. 이 기적이 두 번째 기적이라고 언급한 것은 우리에게 첫 번째 기적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전의 자선이 계속해서 자선이 베풀어지기를 소망하게 하듯이 새로운 자비는 이전의 자비를 기억나게 해 준다. 귀족 신분을 지닌 병자, 이러한 상류 사회의 인사가 직접 따라 왔을 것이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선량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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