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장 주석 강해 설교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입니다. 죄인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니 의롭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의 행위의 의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롬 5:1-21)
Ⅰ. 칭의의 열매 5:1-5
칭의로부터 나오는 귀한 은혜와 특혜들은 우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얻는데 열심을 내도록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1]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은 바로 죄이다. 칭의는 죄책을 없앤다. 그 장애물이 치워지면 곧 평화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팔을 붙잡고 그의 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이 평화에는 단지 불화가 그친 상태 이상의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친목과 자비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철저한 원수가 되시든가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요15:13-15). 사람이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것만큼 자기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즉 이것은 화평케 하는 자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화평을 조성하는 자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화평의 내용이시며 유지자이신 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2]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2절). 이것은 더욱더 귀한 특혜로서 평화뿐만 아니라 은혜를 또한 늘이는 것이다. 성도의 행복한 상태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미치고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하는, 은혜의 상태이다. 이 은혜 속에 우리가 들어감을 얻었다. 우리가 이 상태 속에 태어나지 않았으나 그리고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가 스스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우리는 소경이나 절뚝발이, 혹은 병약한 자드리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아가듯이 그리로 인도되었다. 우리가…들어감을 얻었으며, 우리는 이 들어감의 장본인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수단인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는다. 성도들은 이 상태 가운데 행복하게 서 있다. 우리가…서있는. 우리는 거기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서있다. 이 표현은 또한 우리의 진행을 나타낸다. 서 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간다. 우리는 도달한 것처럼 결코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둘러 가는 사람처럼, 그리고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시중드는 종처럼 서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 표현은 우리 인내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확고하고 안전하게 서 있다. 우리는 자기의 위치를 지키는 군인처럼 서 있다. 하늘의 군인처럼 서 있다. 하늘의 궁전은 높은 것일수록 미끄러지기 쉬운 지상의 궁전과는 달리 확고부동하며 안전하다.
[3]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절). 현재 누리고 있는 행복 외에 바라고 즐거워하는 행복이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자들은 장래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랄 수 있다. 은혜는 영광이 시작되었다는 표이다. 즉 영광의 확실한 전조이며 보증이나 장차 누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자들은 현재 즐거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4]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3절). 우리는 환난에도 불구하고 환난 중에서조차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행복이란 참으로 점점 증가하는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특별히 의를 위한 환난).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이므로 바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를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 환난은 여러 가지 원인을 거쳐 크게 소망을 이루는데, 사도는 그 원인의 사슬을 각각의 원인이 영향을 미치는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환난은 인내를. 환난이 인내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환난 가운데서 그리고 환난과 더불어 역사하기 때문이다. 쇠가 불에 의해 단단해지듯 이 환난은 인내를 시험하며, 시험을 통해 인내를 향상시킨다. 우리는 인내를 가져오는 환난을 기쁘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인내는 환난이 우리에게 끼치는 해보다 더 많은 유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환난 자체는 초조함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환난이 성도들에게 거룩하게 적용될 때는 인내를 가져온다.
인내는 연단을(4절). 인내는 하나님의 연단을 이룬다. 즉 인내로 고난을 견디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크게 경험한다. 인내는 우리 자신의 연단을 가져온다.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자신의 진실성을 시험하게 된다.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것이 드러날 때 인내는 인정을 받게 해 준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처럼 연단을 받아 황금같이 되어 나오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소망을 갖도록 용기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의 소망을 받쳐주는 버팀목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연단은 자신의 신실성을 증명하도록 돕는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5절). 이 소망은 우리를 속이지 아니할 것이다. 실망만큼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우리는 소망 때문에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 않는다.
그 소망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선하신 주님을 향한 것이므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이…부은바 됨이니. 이 소망은 의이신 성령으로 확증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은 다시 우리 안에서 그를 향한 사랑을 끌어낸다. 우리의 모든 위로와 성결 그리고 양자에 있어서의 이내의 근거는 하나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에 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 할 때 우리는 그에게 거는 우리의 소망이나 그를 위해서 받는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Ⅱ.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및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5:6-21
사도는 여기서 주 예수 죽으심 속에 놓여 있는 칭의의 원천과 근거를 기술한다. 그는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사실을 상술하는데, 첫 번째는 예수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에 대해서(6-3절), 두 번째는 그의 죽으심의 귀한 열매들에 대해서(9-11절) 기술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첫째 아담으로 인한 죽음과 죄의 전달과 둘째 아담으로 인한 생명과 의의 전달 사이의 대비를 설명한다(12-21절)
1. 이전의 우리의 상태(6-9)
[1] 우리는 슬픈 상태 가운데서 연약하게 있었다(6절). 우리 스스로는 결코 그 상태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의 구원이 '기약대로' 이르렀다고 하였다. 구원받을 자들이 연약한 상태가운데 있을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돕고 구원하시는 때이다. 소망이 다 끊긴 데서 도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2] 그는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즉 스스로 어떻게 도리가 없어 멸망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죄가 있으므로 멸망 받아 마땅한 피조물을 위해 죽으셨다. 그들은 경건치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비할 데 없는 사랑의 예로 설명하고 있다(7,8절). 이점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1) 사람들은 좀처럼 '의인' 즉 부당하게 정죄 받은 자를 위하여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자를 동정하지만 거의 아무도 그를 대신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2) 사람들이 혹시 의인보다 조금 더 나은 선인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다. 자기 스스로는 선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아무런 선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받는다. 그럴지라도 사도는 이 사실마저도 제한을 둔다.
즉 그렇게 선인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도 극히 소수이며 그것도 결국 '혹'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8절). 그처럼 무익할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죄를 지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즉 그 사랑을 입증 하셨을 뿐만 아니라 크게 확대하여 빛나게 하셨다. 그 사랑을 논의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놀라운 경이와 찬미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으시기 위하여 그 성령을 권하셨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렇게 하셨다. 그는 우리를 그냥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밖으로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때 우리는 아직 죄인이었었다. (4)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는 원수이었다(10절). 즉 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반역자이며 모반자이였다. 이 같은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야 했다는 것은 하나의 신비이며, 당연히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그 사랑에 놀라고 그것을 찬미하도록 하기 위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의 예이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분께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그의 나라의 한 법률로 삼으실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다.
2. 그의 죽으심의 귀한 열매들(9-11)
[1] 칭의와 화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맺어진 열매이다. 우리가 그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9절).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10절). 즉 죄게 용서되고 적대감은 사라지며 불법은 끝이 났고 대신에 영원한 의가 들어왔다. 우리는 믿는 즉시로 칭의와 화목 상태에 실제로 들어간다.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피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는 즉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 9:22). 모든 화목 제물에 있어서 피뿌림을 불가결한 요소였다.
[2]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이 발생한다.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절).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절).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수로 있었을 때에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와 화목하셨다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와 화목되었을 때는 더욱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원수인 우리를 친구로 삼으실 정도로 큰 일을 행하신 분께서, 우리가 친구 되었을 때 우리를 친구처럼 대하시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정도의 작은 일을 행하시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도는 몇번이고 더욱이라는 말과 함께 그 사실을 얘기한다. 우리가…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절). 지옥의 불이 곧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화목되었고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의 살으심은 육체로 계셨을 때의 생명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생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낮아지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되고 높아지신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는다. 죽어가는 예수께서 죄를 보상하시고 적대감을 없애는 일에 기초를 놓으셨으나 그 일을 완성하신 분은 살아 계신 예수이시다. 죽으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유산을 남기신 유언자이셨으나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그 유산을 나눠주시는 실행자이시다.
[3] 이 모든 것은 더욱 귀한 특혜로서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11절).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전혀 두려움이 되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즐거움'이시다. "우리는 화목되었고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었다." '이뿐 아니라' 그 안에는 아직도 끊임없이 흐르는 은총의 시내가 더 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항구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모든 돛을 다 달고서 의기양양하게 질주해 들어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위로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속죄의 공로로 이루어진다(이것은 바울이 거듭거듭 되풀이하여 주장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속죄함을 받는다는 것은 (1) 그 속죄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즉 복음의 방법으로 그리고 복음의 조건에 근거해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2) 그 속죄를 통하여 위로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우리는 참된 속죄를 받았으므로 그 안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3.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대비(12-21)
이 대비는 우리의 타락과 회복사이의 대응점을 보여 준다.
[1]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는 일반적인 진리가 바울의 강론의 기초로 깔려 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하나님은 아담을 그의 모든 후손을 대신하는 자로 그리고 그들 공동의 시초로 대하셨고 아담은 그런 자로서 행동하였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모든 자들의 머리로서 행동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신하여 죽고 그들을 대신하여 살아나시며 그들을 대신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가시는 등의 행동을 한 그리스도를 그들의 시조로 대하셨다.
[2] 대비의 상세한 설명.
1)아담이 어떻게 죄와 죽음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하였는가?(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왔나니. 우리는 죄와 죽음이 범람하며 불의와 재난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고 있다. 그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고 그는 곧 첫 사람이었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그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선하다고 선언하셨을 때(창 1:31) 세상에 죄라고는 전혀 없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그의 죄책이 후손에게 전가되었고 또 일반적인 본성이 되어버린 타락도 함께 전가되었다. 그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아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태어나는 이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한 그릇 안에서처럼 아담 안에 전 인류의 본성이 저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하자 그 본성이 죄에 물들고 부패하여졌다. 이리하여 그 안에서 우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둘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왔다. 왜냐하면 사망은 죄의 삯이기 때문이다. 죄가 들어오자 당연히 그와 더불어 죽음도 들어왔다. 셋째, 전염병이 마을을 온통 휩쓸며 통과하듯이 '사망이' 이르러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그래서 아무도 사망을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 보편적인 운명으로서 결코 예외가 없다.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14절). 아무도 죽음의 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망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이다(고전 15:26). 사도는 죄가 모세의 율법과 함께 시작되지 않고 율법이 있기 전에도 줄곧 세상에 있었음을 가르친다. 죄는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 가인의 살인, 옛 세상의 패역함, 소돔의 사악함 등이 이 사실을 증거 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사실로부터 율법이 있기 전에도 어떤 법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원죄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이 결핍된 것이요 실제적인 죄란 그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어떤 법 아래 있었다. 그 사실에 대한 사도의 증거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노릇하였다'는 것이다(14절). 이 말은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고 그것은 곧 원죄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사망이 실제적인 어떤 죄도 짓지 아니한 자들 곧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왕노릇을 하였기 때문이다.
2)이 사실에 대응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참된 모든 신자들에게 의와 생명을 전달하시는가? 사도는 여기서 유사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사랑의 전달이 아담으로 인한 죄책과 진노의 전달을 '능가한다' 는 사실도 보여준다.
①유사점(18,19절): 첫째, 하나의 범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정죄를 받았다. 아담의 죄는 불순종이었다. 그는 금지되었던 행동을 함으로써 죄를 범했다. 그런데 이 죄는 다른 죄들에게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그가 행한 일은 악한 것이 되었다. 죄의 악성과 독은 매우 강하고 잘 퍼진다. 그렇지 않으면 아담의 죄책이 그렇게까지 멀리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죄가 그렇게 심한 해악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아담의 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란 곧 모든 후손을 가리킨다. 죄인 된 것(19절). 이 말은 사법적인 행위에 의해 우리를 그런 자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모든 자들이 정죄함을 받았다. 인류의 모든 종족이 한 가정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과 같은 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둘째, 첫째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의와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고 그래서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여기서 먼저 그리스도의 의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어떻게 그 의가 주어졌는가? 그의 순종하심에 의해서 주어졌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은 우리를 파멸시켰고 둘째 아담의 순종은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순종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우리를 위한 한 의를 성취하셨다.
다음으로는 그 의의 열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에게 이르는 값없는 선물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구원은 일반적 구원 곧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구원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자들은 누구든지 이 생명수를 마실 수 있다. 이 값없는 선물이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것이다(18절).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칭의뿐만 아니라 생명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선물이다.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절). 마치 특허증을 받은 것처럼 의롭게 여겨질 것이다.
②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은혜와 사랑은 아담이 가져온 죄책과 진노를 능가한다는 점(15-17절): 바울이 이 사실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크게 돋보이게 하고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첫째, 만일 죄책과 진노가 우리에게 전달 될 수 있다면 은혜와 사랑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더욱 하나님은 은혜와 그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넘쳤으리라.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다른 어떤 속성보다도 그의 영광을 잘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형벌을 싫어하시고 자비를 보이시기를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둘째, 만일 우리를 정죄하는 한 사람의 죄 속에 그만큼의 힘과 효력이 있다면 우리를 의롭다 하고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 안에는 더욱더 큰 힘과 세력이 있을 것이다.
아담이 뿌리는 독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뿌리는 해독만큼 강할 수 없다 해독제가 더욱 강하다. 셋째, 우리가 책임을 지는 것은 단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한 죄책뿐이다. '한 사람을 인하여' 즉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다(16,17절).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17절) 받는다. 은혜와 의의 시내는 죄책의 시내보다 더 넓고 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범죄를 용서하신다. 넷째, 아담의 죄로 인해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왕노릇'할 특권을 받는다(17절).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잃은 것보다 더 크고 많은 특권들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고 그 안에 놓였다. 치료 연고가 상처보다 더 넓게 발라지며 치료가 상처보다 더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4. 율법이 하는 일(20-21)
율법이 하는 일은 죄 자체를 더욱 많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가지고 있는 많은 죄악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안경이 얼룩진 점들을 보여주지만 점 자체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과 같다. 방에 좀 더 밝은 빛을 비추면 전부터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을 뿐인 먼지와 오물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즉 율법의 공포는 복음의 위로를 더욱더 달콤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적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복자의 영광은 더욱더 위대해진다. 사도는 이 은혜의 풍성함을 21절에서 설명한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그것은 잔인한 유혈 통치였다. 그러나 은혜도 또한 왕노릇하여 생명 곧 영생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통해서' 즉 그리스도의 능력과 효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잠언 새벽예배 설교문] 정직, 겸손, 성실, 구제, 자비의 말씀(잠 1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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