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구약성경강해

[열왕기상 17장 설교말씀]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왕상 17:1-7)

성령의 능력 2021. 2. 13.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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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열왕기상 17장 설교말씀 중에서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결정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하루에 오늘은 무엇을 먹을 것인지도 결정합니다. 이렇게 많은 결정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우리는 영적으로도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아합 왕과 이세벨 때문에 영적으로 타락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결정을 내리고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과연 우리는 영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까? 좁은 문입니까? 넓은 문입니까? 주님은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합니다. 그런데 넓은 문은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문으로 들어가면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올바른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왕상 17:1-7)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 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7: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왕상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왕상 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 17: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왕상 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왕상 17: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 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오늘 본문 열왕기상 17장에는 네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엘리야가 이스라엘 왕 아합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절부터 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셔서 엘리야가 그곳에서 얼마간을 보낸 기록이 나옵니다. 8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셔서 사르밧의 한 과부의 집에 그를 머물게 하십니. 그리고 17절 이하에는 그 집 주모의 아들이 죽음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 엘리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가 관련된 이 네 가지 사건의 교훈은, 1724절의 여인의 고백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할 줄 아노라 하니라"(17:24). 바로 이런 고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 엘리야의 길이냐? 아합의 길이냐? =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그 이전에 한 번도 언급이 없었던 엘리야라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엘리야에 괜한 설명도 '길르앗에 우거 하는 사람들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전부입니다. 그 부모가 누구인지, 어느 지파에 속한 사람인지, 어떤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영적인 체험을 했는지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그의 출생이 신비한 만큼 그의 종말도 아주 신비합니다.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이 땅을 떠난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

 

이런 엘리야가 아합에게 나타나서 전하는 말씀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1)"는 말씀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어떤 사람인지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본문의 기록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길르앗이라는 곳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분할해 소유하고 있던 땅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므낫세 아니면 갓 지파의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길르앗 땅은 요단강 동쪽 끝에 있는 땅이고, 해발 800m 이상 되는 고지대입니다. 이 땅은 산약 지대이며, 바위가 아주 많아 농사짓기가 아주 어려우므로 이 지대의 사람들은 유목 생활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저 사람이 길르앗 남자다'라면 '양을 끌고 외지로 몇 달씩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저 사람이 뱃사람이다'하면 해풍에 얼굴이 그을리고 구릿빛 피부를 가진 튼튼한 사람을 연상하는 거소가 마찬가지입니. 자기 지역에 초장이 충분치 않으니까 몇 달씩 외지에 나가 야영생활을 하는 아주 체력이 강하고 성품도 강인한 사람들이 길르앗 남자들입니다. 수준 높은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문화 혜택을 누리는 도시 사람들도 아닌, 시골 한 구석에서 이와 같은 생을 사는 사람들이 길르앗에 우거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엘리야가 갑작스럽게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합 왕 앞에 나타나 엄청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가 가장 어둡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타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왕인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면 교육을 잘 받고 겉 보기에도 그럴듯한 사람이 해야지 저 길르앗 산골짜기에서 유목민 생활을 하던 그런 사람이 감히.. 하는 생각이 아합에게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더구나 아합은 바알 앞에서 비를 달라고 구하는 사람이고 바알과 아세라에게 축복받는다고 믿는 사람인데, 런 그에게 있어서 엘리야는 마음에 도저히 맞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런 대조적인 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마주 보고 서 있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등장한 후 여러 가지 사건과 말씀으로 이 백성들을 섬기게 되는, 이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것은 바로 '너희가 나의 이 말과 약속 앞에서 엘리야의 길을 찾아갈 것이? 아니면 아합의 길을 갈 것이냐?"라고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약대 털옷을 입은 엘리야 같은 모습인지 모릅니다. 비논리적이고 합리성이 부족하고 믿어 보려고 해도 믿을 만한 하지 못한 그러한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비논리적일 수 없습니다. 초논리적일 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합리적인가' 묻고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말하는 것이 과연 나의 말과 일치가 되느냐?' 너희들이 말하는 그 합리라는 것이 나의 말과 부합이 되느냐?"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합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우상, 이념, 철학이라는 잣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논리적이지 못하고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씨름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신실합니다 =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믿을만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입니. 본문은 1절에서 엘리야와 아합이 왕궁에서 대치하고 난 이후에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아합이 어떤 반응을 보였다는 설명이 없고, 갑자기 엘리야에게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말씀합니다 (2, 3) 이 말씀은 엘리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요, 우리가 생각해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엘리야를 통해 선포되었으므로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 앞에 빨리 확산되어야 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이 말씀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든 사람이 듣도록 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엘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비도 이슬도 오지 않는구나, 하나님은 참 신이시로구나"는 것을 백성들이 알 수 있게 해 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로 가서 숨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특심한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9:10, 14). 하나님을 향하여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순종하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엘리야에게 "지금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네가 목청을 높일 일이 없. 조용히 그릿 시냇가에 가서 가만히 엎드려 있어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개혁의 청사진을 다 보여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리야에게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고 오 년 후, 십 년 후에는 이렇게 하라는 구체적인 말씀을 하신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한 가지 명령은 ", 엘리야야, 그릿 시냇가로 가거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이끌어 가시는 인도하심입니다. 우리의 삶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다가 영원한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전체적인 그림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 년 후, 또는 십 년 후에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있을 것인가는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릿으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좇아 그릿 시내까지 가면, 그다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킴 윅스라는 한국인 맹인 처녀가 있습니다. 한국 전쟁 때 어린 나이에 맹인이 되었는데, 한 미군 중사가 불쌍히 여겨 미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후 킴 윅스는 인디아나 주립대학과 호주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빌리 그래함 전도대의 일행이 되어 찬양하고 간증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킴 윅스가 찬양을 하고 간증을 할 때 자주 간증했던 내용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었습니.

 

"사람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나를 인도할 갈 때 '100m 앞에 장애물이 있습니다. 200m 앞에 무엇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로 앞에 물이 있으니까 한 걸음 옆으로 떼십시오. 조금 앞에 계단이 있으니 발을 조금 높이 올리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을 자리를 나에게 알려주면 나는 그 말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함을 받아 목표했던 지점까지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신 것도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시각장애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살 것인지 암담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음 발 한걸음을 떼어 놓을 자리를 일러 주셨습니다. 그렇게 인도함을 받아보니까 내 삶 전부가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있게 되고,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그 목표지점으로 나의 생이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 내일, 혹 일 년 후, 이년 후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고 염려될 때가 있습니까? 그런 염려는 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늘 주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믿고 그 약속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그분을 따라가면,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 범죄 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

 

또한, 오늘 본문을 통하여 범죄 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크나 큰 사랑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엘리야의 등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 땅에 "앞으로 얼마 동안 우로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갑작스럽게 받은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8장에 이미 하나님께서 수백 년 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1절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잘 순종할 때, 가나안 땅에서 받을 축복이 나옵니다. 그리고 15부터 68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렇게 사랑해서 땅도 주시고 많은 것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받게 될 저주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 여러 가지 저주의 말씀 중에 2824절은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새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야가 수백 년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들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우상숭배 때문에, 이 부도덕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던 대로 앞으로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없을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았더라면 매도 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를 쓸어버리듯이 그냥 심판해 버리셨을 것입니다. 돌아오라고 매를 때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권면하시는 이 '사랑의 매'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매를 맞고도 깨닫지 못하다면 짐승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맙니다. 아합처럼 하나님이 진노를 피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들려주시는 하나님 =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또 하나 볼 수 있습니. 그것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신 말씀이 오히려 감추어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말씀이 희귀해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31절에 보면 사무엘이 아직 어린아이이고 엘리가 제사장과 백성들의 사사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그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백성들의 삶에서 그 말씀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말씀을 감추어 버리십니다.

 

바로 똑같은 일들이 엘리야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거역의 길을 갈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그릿 시냇가로 감추어 버리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모스도 똑같은 상황을 경험하며 외칩니다. 아모스 811절에 보면 "주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 8:11). 그러나 우리가 희귀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완전히 감추어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여전히 그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020절에 보면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에게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여전히 들려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귀에 쉽게 들린다 해서 그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있지만 여전히 필요한 것은 참 사람인 것처럼, 많은 말씀이 있지만 여전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있고 설교가 있지만, 그러나 말씀이 희귀해져 있는 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희귀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시고 우리를 권고하시는 사랑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가서 숨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 먼저 경험한 것이 까마귀가 음식을 물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엘리야로서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은 부분입니다. 까마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정한 새입니다(레위기 11:15). 이 부정한 새는 먹지 않을 뿐 아니라 만지지도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부정한 새를 시켜 엘리야에게 음식을 보냈을까요? 이왕이면 좀 멋있게 생긴 학을 보낸다든지 아니면 천사들이 아름다운 음악소리와 함께 음식을 갖다 준다든지 하는 좀 멋있는 방법이 많은 것 같은데 그 마음에 안 드는 부정한 새의 입을 통해 음식을 갖다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신 것은 하나님 자신은 창조주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인 까마귀는 하나님이 "까마귀야 물고 가라"하시면 꼼짝하지 못하고 물고 가야 하는, 바로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서 "수년 동안 비도 없고 이슬도 없을 것이다"라고 그랬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는 했지만 아마 걱정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엘리야가 까마귀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비와 이슬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결국은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가 지나니, 그릿 시내가 말라 버렸습니다. 물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에게도 고통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그는 지금 저 바깥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물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하여 엘리야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며 이 고통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엘리야가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 승리와 패배,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우리를 사랑하심, 그리고 우리를 승리케 하심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합처럼 하나님께서 전해주시는 그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힘으로 가 아니고 바알과 아세라의 힘으로 한번 이겨보겠다고 우길 것인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인가 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역시 돈이 있어야지, 역시 좋은 대학을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대학이 우리를 승리케 합니까? 부분적으로는 도와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승리케 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승리는 이 땅에서 보장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은 대학에 떨어지면 교회에 남아있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교회 책임도 있지만 그러나 가정에서, 그리고 본인 자신이 대학을 통해서만 인생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장보다 대학의 보장을 더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 5919절 하반절을 킹 제임스 번역에는 "수가 홍수같이 올 때 주의 신이 그를 대적하여 기를 들리라"라고 번역합니다. 원수가 홍수같이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상황입니다. 바알 아세라 숭배가 너무 엄청나게 육십여 년 동안 밀어닥치니까 왕도 섬기고, 유명한 사람들도 섬기고, 권세 있는 사람도 섬기고, 너나 할 것 없이 바알 아세라를 섬깁니다. 그 홍수같이 밀려오는 추세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소수의 무리를 빼놓고는 다 바알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돈, 돈 하고 돌아갈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정말 돈이 우리를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돈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쾌락을 좇아서 우리가 그렇게 살기도 하고, 세상이 우리를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우리가 잠깐잠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떠나보냈던 일들이 우리의 생애에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홍수 같이 우리에게 몰려올지라도 하나님의 신이 그 원수를 대적해서 깃발을 든다는 것입니다. 깃발을 든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발이 들린다는 것은 군대가 전투에 출병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홍수같이 밀려오는 그 원수들 앞에서 수없는 실패를 하고 수없는 쓰라린 패배를 우리가 안고 있었지만, 주님이 깃발을 들고 일어설 때 우리가 그 깃발을 보고 함께 따라 일어서면 주님이 승리할 때 우리도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자리에 서 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 인도하심과 사랑하심과 승리케 하시는 약속의 말씀이 우리 앞에 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따라서 행하며 엘리야가 갔던 그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어떤 핑계를 대고라도 그 말씀을 거역하고 아합이 갔던 길을 갈 것인가? 그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거침이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가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할 때 엘리야를 승리케 하는 자리로 옮겨 놓으셨던 것처럼, 연약한 나도 승리자로 바꾸어 놓으실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떤 슬픔과 패배의 경력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주님의 구원과 사랑이 우리를 승리케 하심을 확신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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