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사도행전 3장 성경 좋은 말씀] 앉은뱅이의 고침(행 3:1-11)

성령의 능력 2023. 1. 1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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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고쳤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다. 이 말씀을 들은 앉은뱅이는 즉시 일어나 뛰어다녔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의 삶에도 앉은뱅이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다.

 

앉은뱅이의 고침(행 3:1-11)

 

구체적인 사례가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도들로 인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다"는 내용이 기록되고 있다(2:43). 그러나 본문에는 그 한 예만 기록되고 있다. 사도들이 기적을 행할 때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기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의 목적에 부응하여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행한 모든 기적이 다 기록되지 않고 성령이 합당하게 여기신 것으로 거룩한 구속사의 목적에 알맞은 것만 기록되었다.

Ⅰ. 이 기적을 행한 사람은 사도들 가운데 중심인물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생존해 계신 동안 한 사람은 제자들의 대변자적인 역할을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이 제일 사랑하던 자였다. 지금도 그들은 같은 입장에 있었다. 수천 명이 회개하게 되자 교회는 여러 개의 모임으로 나뉘었고 아마 베드로와 요한은 누가가 가입해 있는 모임에 속한 것 같았다. 그러므로 누가도 그가 바울을 수행할 때 바울이 말하고 행한 것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처럼 베드로 요한과 함께 있으므로 그들이 말하고 행한 것을 자세히 기록할 수가 있었다. 여러 모임이 있으므로 이 모임들은 서로 다른 사도들이 행한 것을 본받을 수가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각기 제자들 가운데 형제가 있었다. 그들이 전도하러 나갈 때 형제들끼리 짝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다른 사도들 간에도 형제간의 사이 이상으로 밀접히 맺어진 것같이 보인다. 때로 "우정이 혈연보다 더 두터울 수가 있다." 형제 이상으로 더 사이가 좋은 친구도 있는 법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보다 더욱 친근해진 것같이 보인다(요 20:2). (내가 가정하여 말해 보건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즉 사랑의 제자였던 요한은 베드로가 뉘우치고 회개하자 또 그의 죄로 인하여 "더욱 슬피우는" 것을 보자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더욱 정을 느껴 부드럽게 대한 것이리라. 또한 그의 영적인 나약성을 염려함으로 강건케 하기 위하여 더욱 베드로에게 친절을 베푼 것 같다. 그리스도가 가장 좋아하였던 제자가 베드로의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회개함으로 베드로를 용납하셨다는 좋은 증거였다. 다윗이 범죄하고 기도하기를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시 119:76)라고 하였다.

Ⅱ.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가 기록되고 있다.

1. "성전에서" 일어났다. 성전은 모두가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함께 그곳에 올라갔다." 특히 오순절 명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이 사람들 가운데 복음의 그물은 쳐졌다. 이 그물에 많은 사람이 낚였을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성전으로 가서 예배를 드림은 좋은 일이요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는 일은 큰 위안이 됨을 기억하자. "그들이 내게 같이 가자고 말하였을 때 내가 기뻐하였으니" 최상의 사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회임을 기억하자.

2. 때는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즉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지켜지던 공중 예배 시간이었다. 시간과 장소는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두 필수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기와 장소는 덕을 세우기에 제일 적합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일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공중 예배와 함께 또한 기도하는 처소와 시간이 있어야 한다. 제 9시 즉 오늘날 오후 세시는 유대인들에게 기도하는 시간 중 하나였다. 그 외에 아침 9시와 정오 12시도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시편 55편 17절, 다니엘 6장 10절을 참조하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각기 강제성을 띄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작정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유익하다. "시기가 적절할 때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결과를 낳는 법이다."

Ⅲ. 이 기적적인 치료를 받은 환자에 대하여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2절). 그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가난한 앉은뱅이 걸인이었다.

1. 그는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앉은뱅이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중풍병으로 하체가 마비된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는 치료 기사를 보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7절).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가련한 경우는 늘 있다. 이들에게 우리는 사랑을 베풀고 연민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앉은뱅이인 것을 의식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능력이 임하지 않고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일할 수도 걸을 수도 없음을 알아야겠다.

2. 그는 걸인이었다. 일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그는 동냥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영적인 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친구들에 의해 "매일 성전문 앞"에 억지로 끌려오지만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구걸할 뿐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한 구경꾼에 불과한 것이다. 성전에서는 모임이 있었다. 도움을 간청해야 될만한 선한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이렇게 모였을 때야말로 도움을 청할 적절한 때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일할 수 없는 사람이 구걸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성전에서 매일 적선을 받지 못하였다면 매일 거기에 누워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동시에 간청해야 함을 기억하자. 고넬료의 기도가 그랬다(10:4). 우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우리가 바라던 것은 특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성전문을 출입하는 영적인 걸인들의 대부분이 어떤 도움이 없다고 낙심하고 만다는 것은 대단히 가련한 일이다. 그들이 늘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한 마리의 일벌을 굶기기보다는 여러 마리의 말벌을 굶기듯이 마찬가지로 열 명의 영적인 게으름뱅이에게 은사가 허락되기보다 받을 만한 가치가 인정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가 누워있는 성전 문의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미문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이 문이 외관상의 장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말하기를 이 문은 성전의 이방인의 지역에서 유대인의 지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그는 가정하기를 이 앉은뱅이는 이방인에게 구걸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므로 유대인에게만 구걸하였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이 문이 성전의 첫째 입구로 보며 많은 돈을 들여 아름답게 꾸민 것은 그곳이 엄위로우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의 정면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거기 누워 구걸한다고 이 문의 아름다움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었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적선해 줄 것을 구걸하였다(3절). 이것이야말로 그가 그들에게 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애로운 사람들로 평판이나 있었고 또한 많은 것은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으로 선행을 베풀었다. 성전에서 소경과 절뚝발이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고침을 받은 것이 불과 수주일 전이었다(마 21:14). 그런데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말씀을 전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왜 동냥하는 것 이상을 요구할 수 없었을까? 이해가 안 된다. 어쨌든 그는 그가 바라지도 않던 것을 얻게 되었다. 그는 적선을 원했지만 그는 병나음을 받았던 것이다.

Ⅳ. 우리는 본문에서 치료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1. 그는 기대로 부풀었다.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이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하듯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시선을 고정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정 어린 눈길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4절). 요한은 같은 행동을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이 기적을 행함에 같이 협력하였다. "우리를 보라"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주님을 향해야 한다(우리의 마음의 눈이 말이다). 그리고 그 외적인 표시로 몸의 눈은 그가 은총의 종으로 여기는 분들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이 사람에게 사도를 바라보라고 두 번 명령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벌써 "그들에게서 무언가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찼고 그러기에 곧 "그들을 주시하였다"(5절).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기대를 가지고 온 마음을 바쳐야 함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늘을 향하여 거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의하여 은총을 입기를 구해야만 하며 그리고 기도에 대한 평화의 응답을 바라야 한다. "내가 당신에게 나의 기도를 드리고 당신을 바라나이다."

2. 동냥을 얻으려는 기대는 좌절되었다. "은과 금이 내게 없으므로 은과 금을 당신에게 줄 수는 없소"라고 베드로는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약 적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이나 은이나 금 같은 것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가 귀하게 여기며 친구로 여기는 사람에게 세상의 부도 풍성히 누린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사도들은 가난하여 겨우 자기들이나 지낼 수 있었지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의 수중에 많은 돈이 있었다 해도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 생계유지에 쓰였고 이 돈을 자기들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헌납자의 의도를 떠나서 사용할 수도 없었다. 공적 신용은 엄격하고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

(2) 남을 돕고 싶어도 도울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은 반면 그럴 능력은 있으면서도 마음이 허락지 않아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3. 그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받았다. 베드로는 그에게 줄 돈은 없었다.

(1) 그러나 그는 돈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것은 하늘에서 유래된 능력으로 그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도 영적인 선물과 은사와 위로에는 매우 부유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확실히 영적 세계에서 우리는 은과 금에 비교될 수 없는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사서 얻는 것이 더욱 좋은 것이다(욥 28:12; 잠 3:14).

(2) 그는 그에게 더 좋은 것을 주었다. 즉 그의 병을 고쳐 준 것이다. 아마 병을 고칠 수 있었다면 이를 위하여 많은 금과 은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병 나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삶을 위해 일할 수 있었고 따라서 더 이상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이제 그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된 것이다." 기적적인 치료는 하나님 사랑의 표시이므로 수천 금은을 드리는 이상의 영예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줄 것이 없었지만 아직도 "네게 줄 것이 내게 있다"라고 그는 말하였음을 생각해 보자.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으나 자선할 만한 자금이 없는 사람이 있다. 비록 은과 금은 없다 해도 손과 발이 성하고 오관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으로 맹인과 절름발이와 병자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이 안 한다면 그들에게 은과 금이 생겨도 남에게 주지 못한다. "누구나 선물을 받으면 그것을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이제 어떻게 치료되었는가를 알아보자."

①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보내사 저희를 고치시다"라 하였다(시 107:20). 치유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치료하셨으나 사도들은 그의 이름으로 치료하였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재하지 않았다면 희롱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지하여 말한다. 이제 그의 권능에 의하여 병이 완치될 것이니 그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릴지어다"는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경멸을 나타내는 것이나 이를 사용한 이유는 세상에서 그에게 가한 명예 훼손은 지금 하늘에 계신 분의 영광을 더욱 돋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부르라. 그를 경멸하는 뜻으로 나사렛 예수라 부르라. 그 이름으로 인하여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스스로 낮추셨기에 이제 그는 가장 높임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 명한다. 그에게 능력이 있어서 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어나 걸으려 한다면 자기의 무력을 알고 그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한다면 그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 걸음으로 그 능력이 그에게 임한 것을 그는 입증하였다. 병 고침을 받은 그에게 남은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무력한 우리들의 영혼도 치료함을 받자.

② 베드로는 손을 뻗쳐 그를 도왔다(7절). 그는 그가 일어나 걸으라고 명한 바로 그 이름을 믿고 "어른 손을 받아 일으켰다." 만일 명령된 대로 효과가 생긴다면 그의 일으켜 세운 행위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된 것이 아니고 다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명백히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일어나 계명대로 행하라 명하실 때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의 능력 아래 우리를 맡기면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사 우리의 손을 받아 일으켜 세워 주신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까지 할 수 없는 은혜를 약속하셨다. 그 약속에 의해 우리의 본성은 새로워지고 은총은 헛되지 않게 된다.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그가 일어나려 하지 않고 또 도움도 받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없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그가 할 일을 했고 베드로도 그의 할 일을 했지만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에게 힘을 주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먹이 나누어질 때 양이 늘고 포도주를 쏟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같이 그가 발목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 할 때 그의 발에 힘이 주어졌던 것이다.

Ⅴ. 본문은 환자 자신이 치료받은 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면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1. 그는 일어나라는 명령에 복종하여 뛰어 일어났다. 그는 그의 발과 발목에 강련한 힘이 주어지는 것을 느꼈고, 그래 흔히 치료받고 점차 회복되어 가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슬며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힘 있고 경쾌하게 또 그의 힘이 아니라 다른 힘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힘이 생겼으므로 그도 자신의 일에 깜짝 놀랐다. 오랫동안 불구로 누웠던 사람이 기쁘게 자리를 거두고 떠난 것처럼 그도 이리저리 뛰었다.

2. 그는 서서 걸었다. 그는 어디 기대거나 떨거나 하지 않고 곧바로 서서 지팡이도 없이 걸었다. 그는 발을 굳게 디뎠고 확실하게 움직였다. 치료된 것이 나타났다. 더구나 완전한 치료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경험한 것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의 앞에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자.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의 앞에서 바로 행하자. 단호히 그의 편에 서서 그에게 받은 힘을 가지고 기쁨으로 그와 동행하자.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11절). 그가 왜 그들을 붙잡았는지 물을 필요도 없다. 내가 믿기로는 그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너무나도 기뻐서 여태껏 만난 최대의 은인으로써 그들을 포옹하였고, 광포할 정도로 매달렸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알리는 동안 그들을 잠시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들에게 그의 애정을 표했다. 그는 그들을 붙잡고 못 가게 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그를 떠나면 다시 앉은뱅이가 될까 보아 그들에게 매달렸다고 말한다. 여하튼 하나님에게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실 때 도구로써 이용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후에도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안다.

4. 그는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들에 대한 그의 강한 사랑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성전 밖에 붙들어 둠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의무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 친구의 열정 어린 친절에 의해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그와 함께 머물지 않는다면 그는 그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하였다. 또한 그는 거동할 수 없었고 또 구걸을 해야 했으므로 오랫동안 들어갈 수 없었던 성전으로 그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더욱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가 고치신 혈기 마른 자와 같이 그는 곧 성전에서 발견되었다(요 5:14). 그가 성전으로 들어간 것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 위한 것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그가 병 고침을 받았던 예수에 대해 사도들로부터 자세히 듣고 싶어서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욱 그리스도와 친숙하여지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5. 그는 거기서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주신 힘은 그를 찬양하는데 쓰여야 하며 우리는 그것으로 어떻게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 연구해야 함을 기억하자. 그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이름과 그가 주시는 힘으로 생활하여야 한다(슥 10:12). 그가 뛸 수 있게 되자 그는 곧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었고 그를 찬양하였다. 본문에서 성경이 응한 것을 볼 수 있다(사 35:6).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제 이 사람이 치유되어 새롭게 되자 그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넘쳤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를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회개한 젊은이들은 더욱 뛰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Ⅵ. 이 기적의 목격자였던 사람들이 이 일로 받은 느낌이 어떠했는가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1. 그들은 기적의 참됨을 알고 아주 만족해했고 아무런 논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았다"(10절). 그는 오랜 월 거기 앉아 있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은총을 입을 사람으로 택함을 받았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서 고치신 장님에 대해 의심한 것처럼 그가 정말 그 사람일까 의심할 만큼 악하지는 않았다(요 9:9, 18). 그들은 지금 그가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고(9절), 또한 그의 심중에 일어난 변화도 짐작하였다. 그는 전에 마음 놓고 구걸할 때처럼 힘껏 소리쳐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병이 완치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는 그가 병 고침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성별 될 때만이 자비는 완전히 성취된다.

2. 그들은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고"(1절), "크게 놀랐다"(11절).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성령이 임재하시므로 사도들이 행한 기적에 대하여 적어도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행하신 같은 종류의 기적에서 받은 이상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 사실이야말로 기적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임을 잘 보여 준다.

3.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모든 사람이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였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봄으로 그들의 호기심을 채우려 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설교야말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설교라 인정하고 그들에게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다. 무리들은 솔로몬이 성전 외곽의 행각을 세웠던 것이며 이방인들의 집회처인 솔로몬의 행각에 그들을 중심으로 모였다. 무리들은 또 헤롯이 제 이의 솔로몬이 되려는 야망을 가지고 솔로몬이 행각을 견고하게 세우고 자기의 이름으로 명명한 그 기초 위에 몇 개의 골방과 회랑을 세운 곳에 모였다. 여기서 무리들은 모여 이 놀라운 공경을 보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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