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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하나님 말씀] 유대인의 혜택과 반론 반박(롬 3:1-18)

성령의 능력 2023. 1. 1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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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에서는 전 인류의 죄에 대해서 말씀한다. 유대인을 하나님이 선택했지만 결국 죄인이다.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이 있다.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유대인도 예외는 아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유대인의 혜택과 반론 반박(롬 3:1-18)

 

Ⅰ. 여기서 사도는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반론에 대한 해답을 내리고 있다. 어떠한 진리도 이처럼 명확하고 단순할 수 없지만 사악한 재치와 타락한 육의 마음은 언제고 이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신의 진리가 이런저런 트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제1 반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 그처럼 동일한 입장에 있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두고 그 얼마나 유일무이한 민족(신 33:29)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특유한 보배며 자기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강조하셨던가. 그가 할례를 저들의 교회 회원된 배지요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의 인(印)으로 제정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평탄작업에 급급한 교의가 나타나서 그들에게 이 모든 특권을 부정하고 할례제정에 먹칠을 하며 하찮은 것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해답. 유대인들은 어쨌든 위대한 특권과 존귀를 누려 받은 백성으로 위대한 수단과 방편을 소유한 자들이다. 물론 이것들이 절대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2절) 그것이 주는 유익은 "범사에 많다." 문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다 열려 있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교회의 여러 가지 특권으로 해서 이 문에 이르는 데 보다 더 올바른 길이 주어져 있었다. 이 교회의 여러 특권이라는 것은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을 개선 발전해 나가지 않을 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로마서 9장 4,5절에서는 유대인의 특권을 여러 가지 들고 있지만 여기서는 단 한 가지[사실은 이것도 전체와 맞먹는 것이지만]를 들고 있다. 이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 할 때의 구약 성경, 그 중에도 "산 말씀"(행 7:38)이라 불려지는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련되는 모든 모형과 약속, 예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계시된 말씀으로 신탁으로서의 영원한 가치와 무오 한 진리성을 가진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우림과 둠밈을 가리켜, 곧 "신탁의 말씀"이라 부르고 있다. 성경은 성경이라는 갑옷의 가슴받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신탁의 유무를 가리는 데 있어 율법과 신구약의 증언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복음도 신탁의 말씀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히 5:12; 벧전 4:11). 이제 이 신탁의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위임된 것이니 구약은 자기들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모세와 선지자들도 자기 동족으로 자기들과 같이 살았으며 우선적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상대로 그리고 그들을 위해 전파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뒤에 오는 세대와 교회를 대신해서 이들이 수탁자 구실을 한 것이다. 구약은 이들의 손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후대에 전달되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도서관원으로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소용과 유익을 위해 그리고는 온 세상을 위해 이 성스러운 보화를 위임받았다. 그리고 이 문서를 보관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일점일획이라도 상실하지 않고 충실하게 보관하였으니 이점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감사치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이 구원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구원의 독점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첫째로"(프로톤 멘 가르. 3:2)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들의 최고 특권이요 본질적인 특권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의 향유야말로 한 민족의 첫째가는 행복이 아닐 수 없는데 맨 먼저 그들이 이 혜택을 입었던 것이다(신 4:8; 33:3; 시 142:20).

제2 반론. 유대인들이 "산 말씀"에서 누린 혜택에 비춰볼 때 그들 중 대다수의 불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신탁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방인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복음의 원수로 남아 있는데, 무슨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들에게 맡겨졌는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다"(3절).

해답. 아직도 유대인들 중에 더러는, 아니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사도는 이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 하고 딱 잘라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불신과 고집이 그들에게 맡겨진 신탁의 말씀에 담긴 메시아 예언을 무효화하거나 번복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더라도"(흠정역, 사 49:5) 그리스도는 존귀한 분이다. 한 세대가 있어 그들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라 떠들며 나팔 불어 봤자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될 것이요 그의 목적은 끝을 보며 모든 결말이 날 것이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발설하신 말씀을 지켜주시며 당신의 신탁의 말씀은 그 어느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아니 그러기에 오히려 우리는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을 명백히 해 두도록 하자. 하나님의 미쁘심을 의심하고 팽개치는 게 나을 것이다. 다윗이 인간 모두는 거짓말쟁이라고 한 말을(시 116:11) 여기서 바울은 일부러 사용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버릇은 저 옛 인간의 앞잡이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입고 나온 의복이다. 모든 인간은 정처가 없이 변화무쌍하며 "헛된 것과 거짓말"에 치우쳐 있으니(시 62:9) "한가지로 헛된 것"(시 39:5)뿐이다. 인간과 하나님을 비교하라면 인간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걸 들 수 있다. 사람 사람마다 거짓말쟁이라는 걸(인간 불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알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할 때"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하다는 걸" 생각하면 적잖은 위로가 된다(시 12:2, 6). 이것을 좀 더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시편 51편 4절의 "주께서 의롭다 함을 얻으시려고" 하는 말씀을 (시 51:4)인용하고 있다. 그 목적은 다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1. 첫째는 인간들의 이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보존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2. 둘째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결론이 내려졌으면 하나님을 의롭다 하고 그의 공의, 진리, 선하심 등을 어떠한 모양으로든 주장하고 보전하는 게 우리의 임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롭게 하며 그에게서 불의를 찾지 않겠다는 걸 자기 짐으로 여기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간에 대한 평판은 접어 두고 보자. 그게 물 속으로 가라앉거나 헤엄쳐 달아나 버리거나 중요한 게 못된다. 따라서 제 아무리 그 전체가 삐뚤어져 보여도 이것만은 곧"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하는 결론을 분명히 하도록 하자.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그가 심판하실 때(사 51:4), 아니 여기 표현대로 빌리면 그가 "판단받으실 때" 당신의 말씀에 있어 의롭다 함을 얻으시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과 그의 처사를 두고 싸우려 든다면 필경 그 심판은 하나님 편에 유리하기 마련이다.

제 3 반론. 여기서 인간의 못된 마음은 스스로 죄를 두둔하고자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과 타락상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의를 들어내게 하였다는 점을 얘기한 바 있다. 이제 이런 식의 질문이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 모든 죄악을 다 합쳐도 하나님의 영광을 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돋보이게 들어낼 뿐이요, 어쨌든 그의 목적은 이미 성취되어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손해 보는 건 하나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와 불신앙을 그렇게도 가혹하게 벌하신다는 건 불공평한 게 아닌가? 유대인의 불의가 이방인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냈다면 유대인들이 이처럼 지탄받을 이유는 뭔가?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5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뭔가?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이 질문이 반론 형식을 취하려면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 게 아니냐?(메 아디코스 호 데오스, 3:5) 불신앙의 마음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공평한 처사를 두고 트집 잡고 지극히 의로우신 그분을 정죄하려 들기 마련이다(욥 34:17).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곧 나는 이걸 못된 육의 마음에서 나온 말씨로 보고 반대한다는 뜻이다. 그런 제안은 어쩌면 헛되고 어리석으며 오만불손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답.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너무도 턱없는 생각이라는 얘기다. 하나님 편에 그리고 그의 공의와 거룩하심에 불명예를 돌리는 그따위 제안은 협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악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감히 그런 생각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6절)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하는 아브라함의 논리와 흡사한 얘기다. 틀림없이 그는 공의를 행하실 것이다. 만일 그가 무한히 공의롭고 의롭지 않다면 그는 만민의 심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공의를 미워하시는 자면 어찌 처리하시겠느냐?"(욥 34:7) 18,19절도 비교 검토해 보시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그걸로 영광을 거두신다 해서 인간의 죄악이 그만큼 덜 추악하고 비열해지는 게 아니다.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경우는 늘 있는 일이 아니라 어쩌다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저 죄인에게 감사할 일도 못된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생각만으로도 그의 공의와 공평에 대한 의심스러운 생각을 영원히 묵살하기에 충분하다. 절대적인 주권자의 처사를 운영하는 것은 우리의 하는 일이 아니다. 더 이상 상소할 데 없는 대법원의 판결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4 반론. 앞의 반론이 반복되고 있는데(7, 8절) 교만한 마음이 거하는 거짓의 피난처는 좀처럼 부서지지 않으면서 끝까지 속임수를 붙잡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반론을 더 이상 절묘할 수 없게 그들의 말대로 표현한 바울의 수법에는 이미 그 해답이 담겨 있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궤변가들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는 식이다. "만약 내 거짓말이, 곧 나의 죄악이(모든 죄악에는 특별히 가르치는 자의 죄악에는 거짓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와 성실성을 영화롭게 드러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 정죄받을 이유가 뭔가?"아니 오히려 여기에 힘을 입어 은혜가 더 풍성해지도록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게 좋지 않겠는가?" 얼핏 보아도 너무나 뻔뻔스러운 논리요 소름을 끼치게 하는 얘기다. 강포 한 죄인이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끈질기게 계속되기" 때문이다(시 52:1).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는 얘기는 죄인들의 입보다 마음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얘기로 스스로 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되고 있다. 이 악한 생각을 들춰 얘기하면서 그는 괄호 속에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생각을 바울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의 발상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들과 종들이 그처럼 터무니없는 내용을 유포하는 것으로 욕먹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바알세불과 한 짝이라는 욕을 먹지 않으셨던가? 자신들이 주장에 반대되는 것을 유포하는 것으로 욕먹는 사람들은 허다하다.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이처럼 먹칠하는 것은 사람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중상을 두껍게 발라 두라. 그러면 거기에 묻혀들 자도 더러 있으니까" 하는 식이다. 제 아무리 선한 인간도 제 아무리 튼튼한 진리도 중상의 피해는 입기 마련이다. "비방하여"(블라스페무메타, 987)라는 말을 쌘더슨 감독은 이렇게 풀어 얘기하고 있다. 통상 성경에서 말하는 비방(모독)은 최고급의 중상으로 곧 하나님을 두고 악평하는 것이다. 주의 종과 그의 교의를 중상하는 것은 보통 중상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으로 일종의 신성 모독이다. 왜냐하면 이건 그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소명과 일 전부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살전 5:13).

해답. 그는 이제 더 이상 반박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저들의 저주는 공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중상모략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당신의 진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공정하게 저주해 주신다는 얘기다.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명목으로 용감하게 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죄에서 선이 나올 것이라는 구실로 고의적으로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그 구실의 비호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거기서 저들의 저주가 정당화되며 더 이상 핑계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추측과 확신을 가지고 죄를 짓는다는 것 자체부터가 죄 가운데 머물고자 하는 속셈과 뜻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곧 고의적으로 죄를 선택하려는 악한 뜻과 죄에서 선이 발생한다는 구실로 그 죄를 얼버무려 버리려는 속셈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저주는 정당하며 어떠한 종류의 핑계를 가지고 저들이 놀아나든 그 어느 누구도 그 큰 날에 서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그의 모든 처사에 있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다 모든 육체가, 곧 지금도 그분에게 반항하여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있는 저 교만한 육체도 그분 앞에서는 잠잠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들이 불신가운데 고집과 독선으로 재촉한 유대인들의 교외와 유대 민족의 다가올 멸망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Ⅱ. 바울은 이제 이상의 반론을 물리치고 나서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인류 전반에 걸쳐 전반적인 죄악과 타락에 대한 주장을 다시 펴고 있다(9-18절). "하나님의 말씀을 부탁받은 우리는 아느뇨?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호감을 사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아니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서 믿지 않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보다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가? 무슨 말씀을!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요, 거저 주신 은혜가 있기 전의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의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한 가지로 타락해 있었다." "다 죄 아래 있는 것이다" 모두들 죄책 아래 있다는 얘기다. 곧 형 집행 하에, 영원한 멸망과 저주라는 속박의 굴레를 차고 있다는 얘기다. 지옥 맨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말 짐(시 38:4)과 같은 죄에 눌려 있다. 우리 모두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지고 있다(19절). 다시 말해서 죄의 통치와 지배아래, 마치 잔인한 독재자와 주인 아래 있듯이 거기에 매여 있어서 곧 악행을 할 수밖에 없도록 질질 끄는 멍에를 메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프로에티아사메다, 3:9). 이것은 법적 용어로써 우리가 이 사실의 형편없는 증거를 가지고 그들의 죄를 확정판결하였다는 얘기다. 이 선언과 판결에 대해서 그는 은혜로 억제하거나 은혜로 변화하지 않는 한 타락한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하는 구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우리의 타고난 모습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본 10, 11, 12절은 시편 14편 1-3절에서 인용한 것이요 이것은 시편 53편 1-3절에서도 반복되어 있는 것이다. 본문 이하의 말씀이 70인 역의 시편 14편에도 들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사도가 바로 이걸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여기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후기 70인 역에 바울의 강론이 종합되어 있다고 보고 싶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타락상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유대인이나(사 59:7, 8) 도엑(시 149:3) 같은 특별한 경우의 인물의 타락상을 인용하면서 한 사람이 지은 그 동일한 죄는 인간 모두의 본성에 일치한다는 점을 얘기하고 있다. 다윗이나 이사야의 시대로 말하면 좀 나은 시대였지만 바울은 이걸 예로 들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14편에서 얘기된 것은 분명히 "인생" 전부를 두고 한 말이요 그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의 관찰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6장 5절에서처럼 세상을 "굽어 살펴보신 것이다." 따라서 이 심판은 진리에 일치하는 것이다. 친히 만물을 지으시고 그 솜씨를 각각 보살피셨을 때 모두가 아름답구나 하고 기뻐하시던 그분께서 이제 인간이 모든 걸 망친 이후에 다시 굽어 보시니 모두가 더럽구나 하고 한탄하시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습관적인 면의 두 모습

(1) 선한 모든 것의 습관적인 결함

① "의인은 없나니" 곧 올바른 도덕관을 가지고 그 원리에 따르는 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을 때 차려입었던 바로 그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이 말은 곧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없다는 얘기다. 온 인류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눈 길은 한 사람 의로운 노아에게 멈췄던 일을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가는 얘기다. 은혜받아 의화 되고 성화된 자들 마저도 본성상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 인간 중에 의를 타고난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인간도 필경 죄 가운데 잉태되지 않을 수 없었다.

② "깨닫는 자도 없고"(11절) 문제는 이해력의 타락에 있다. 곧 눈이 멀게 되고 타락하여 삐뚤어져 버렸다는 얘기다. 인간들에게 미미한 지각이라도 들어 있다면 종교와 의가 주장하기에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지각이 없는 데서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죄인들은 바보들이다.

③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곧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들, 이들에게 지각이 없는 걸로 간주하는 건 당연한 얘기일지 모른다. 육적인 마음은 하나님을 찾는 데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그분 과 원수다.

④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12절)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이 이 지구상의 무용지물, 곧 귀찮은 짐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죄의 상태에 안주하고 있는 자들은 해 아래서 가장 쓸모없는 피조물이다.

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지구상에 죄를 범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자가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전 7:23). 죄인들이 선을 행하겠다는 뜻으로 행하는 그 행위에도 본질적인 잘못은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가 전무하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온갖 결함은 악의 근원이다"

(2) 악한 모든 것의 습관적인 결함. "다 치우쳐"(모두 탈선하고 말았다), 인생의 최고 목표인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다는 건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제길을,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으셨지만 인간은 그걸 제 발로 팽개치고 말았다. 인류의 타락이야말로 배도가 아닐 수 없다.

2. 실제적인 면. 이처럼 타락한 인류에게서 뭘 바랄 게 있겠는가

(1) 그들의 말 (13, 14절).

① 잔인성.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곧 가난하고 순진한 자를 삼키려 들며 할 수만 있으면 해를 끼칠 틈만 기다리고 있으니 마치 옛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바로 이 자의 이름이 아바돈이요 아볼루온이니 곧 파괴자이다. 설혹 이들이 공개적으로 이 잔인성을 내보이지 않는 경우라도 은밀하게 해악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곧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담겨 있는 것이다(약 3:8). 곧 자기 이웃의 명성을 질책으로 나팔 불며 그들의 생명을 거짓 증거로 앗아가는 불치의 독이다. 이 구절은 시편 5편 9절에서와 140편 3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② 속임수.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여기에 그들이 악마의 자손이라는 증거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말쟁이 요 모든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거짓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게 이들의 부단한 과제인 것이다.

③ 저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거룩한 이름에 모독을 돌리려 하며 형제들에게 악심을 품은 나머지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한 것이다." 야고보는 이것을 혀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 중에 하나로 꼽고 있다(약 3:9). 그러나 저주하기를 즐겨하는 자들은 이에 상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다(시 109:17-19).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이러한 죄를 범하는 가운데 스스로 아직도 죄의 통치와 지배 아래 있다는 걸 곧 태어날 때 그 상태에 아직 그대로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자들이 그 얼마인가!

(2) 그들의 행동(15-17절).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 곧 그들은 악한 일을 꾀하는 데는 약삭빠르며 그러한 기회를 포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 그곳에는 "파멸과 고생"이 따르고 있으니 이것이 저들의 동무다. 곧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들이 사는 사회와 이웃, 그리고 그들의 조국과 민족 마침내는 본인들 스스로에게 파멸과 비참이 따르고 만다. 그들의 종착역에 기다리고 있는 파멸과 비참(죽음이야말로 이 모든 것의 끝장이지만) 이외에도 그들의 죄가 바로 자신들의 처벌이다 자신의 죄에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인간에게 또 있을 수 있겠는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곧 그들은 어떻게 하면 타인과 평화롭게 사는 건지 또 스스로를 위해서는 어떻게 평화를 획득하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이 평화를 떠벌일 수는 있으나 그러나 그 따위 평화는 악마의 궁전에나 있는 것이요 진정한 평화에 대해서는 이들은 철저한 이방인이다. 평화에 관한 일은 모르고 있는 자들이다. 이것은 잠언 1장 16절 이사야 59장 7,8절에서 인용된 말이다.

(3) 이 모든 결과의 원인.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절). 하나님 경외가 여기서는 실제 종교의 전부로 묘사되고 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무서워할 줄 알고 신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우리의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악한 자들의 눈에는 이런 게 보이지 않는다. 곧 이들은 이러한 인생의 노를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다른 목표를 향해 다른 규범을 따른다는 얘기다. 이것은 시편 36편 1절에서 인용된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는 곳에 선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 경외야말로 우리의 영혼에 재갈을 물리며 제길을 달리게 하는 것이다(느 5:15). 반면 일단 이 경외가 사라지고 기도가 뜸해지는 날이면(욥 15:4) 만사는 잽싸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류의 전반적인 부패상과 타락상을 짤막하게나마 살펴본 셈이며 결론은 오, 아담이요! 그대는 뭘 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이처럼 인간은 가지가지 못된 일을 꾸며내고 만 것이다.

[아가서 3장 성경주석 복음말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아 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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