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구약성경강해

[고난주간 주일설교말씀]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욥 35:9-13)

성령의 능력 2022. 3. 2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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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십자가 고난을 주심으로 선택받은 백성을 살렸습니다. 고난주간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나의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제목: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욥 35:9-13절)

 

{서론}

인류 역사 이래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수없이 묻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분야의 문제는 여전히 신비의 부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고난과 고통이 임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분명한 해답이 얻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불쌍한 과부 하나가 자식 하나만 바라보고 천신만고의 역경을 헤치면서 살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밤새 화재를 당하여 자식이 그만 화를 당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실 이런 경우를 만나면 누구든지 입이 천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성경 말씀에 비추어지게 되면 어느 정도, 아니 완전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이유인즉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과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간의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섭리의 신비인 듯합니다. 이점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도 분명히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인간의 고난과 고통 속에서 어떤 섭리로 역사하실까요?

 

1. 밤중에도 노래하게 하십니다.

엘리후는 여기서 구체적인 고난과 고통, 즉 세력 있는 자들이 학대하고 짓밟아 대는 일을 이기지 못하여 울부짖고 있는 자들의 고난과 고통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의 -그가 계속해서 해왔던- 그다음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 학대의 고통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은 많아도, 저들 중 사람으로 하여금 밤중에 노래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고난과 고통을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역경 가운데서도 영적 기쁨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토록 만드시려는 데에 그 섭리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밤중이란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고난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런 고난 중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노래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기억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 발이 차꼬에 차인 채 밤중에 하나님을 찬미한 사실을 말입니다(행 16:24, 25). 그래서 바울은 신비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기이합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극치의 고난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이뤄가시니 말입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가져다줍니다(약 1 :12).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과 고통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은밀히 교육하십니다.

엘리후는 계속해서 말을 잇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교육을 시키신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 가운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라는 구절이 바로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사람들은 고난에 울부짖으면서도 이와 같은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 문제의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 치고 고난과 고통 그 자체를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은 쓰라리고 아파 형언할 수 없을 정도지만, 그것들이 우리에게 끼쳐 주는 산 교훈은 거의 무한의 값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라는 말씀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는 고백들이 고난의 교훈이 어떤 것인지 밝혀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고난과 고통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視覺)을 열어 줍니다. 이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영적 시각까지도 환하게 뜨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전에 미처 몰랐던 새로운 세계와 그 지식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태도를 온통 뒤바꿔 버리도록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싫어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기에 생명력은 더욱 강합니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 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북해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런던에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가지고 갈까 하는 것이었다. 모든 어부들이 아무리 잘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꼭 한 어부만은 북해에서 잡은 청어들을 싱싱하게 산채로 런던에 가지고 와서 큰 재미를 보는 것이었다. 동료 어부들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어부가 고민 끝에 말하기를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모든 어부들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모두 잡아먹지 않소?라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만 두세 마리밖에 못 먹지요. 그러나 그 통에 있는 다른 많은 고기들은 잡혀먹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열심히 헤엄치며 살려고 애를 쓰지요. 그래서 청어들은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다. 고난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삶이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의미는 욥에 그 고난의 의미와 이유를 알게 하는 데 있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인생의 주인이시며, 인간의 아무런 항의나 요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으로 더욱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신 것을 믿고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욥이 고난 후에 이전에 말로만 듣고 생각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에서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과 어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참된 평안은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조금 아프면 울 수 있지만 많이 아프면 울 수가 없다.

3. 탁월한 지혜도 주십니다.

엘리후는 계속하여 하나님은 고난 중에 더할 수 없는 지혜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 하신다”는 말이 이를 잘 드러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사람들은 고통 중에 울부짖으면서도 그런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자 우리 모두 가정해 봅시다. 엘리바스와 세 친구들이 큰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칩시다. 욥의 모습을 보고 무조건 정 죄만 했던 이들이 자기도 똑같은 고난을 겪어봄으로써 예전의 시각과 태도를 확 바꾸었다면, 사실 그것만으로도 저들은 자기 고난을 통하여 큰 지혜를 얻은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임하는 고난과 고통은 그런 정도의 지혜만 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실로 탁월한 하늘의 지혜까지도 가져다줍니다. 자기 고난을 통하여 비로소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을 사모하게까지 만드는 지혜까지 만드는 지혜가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 중에서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는 말씀 등은 다 이를 가리킨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것과 같게 승화시키면 그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와 동일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과 고통을 싫어하지 않는 정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그것들을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고난과 고통 문제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신비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들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들의 조명을 받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의 영적 의미까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고난과 고통 자체는 쓰라린 것이지만, 그것들이 깨우쳐 주는 정신과 영적 소득은 엄청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고난과 고통을 무조건 불평만 하려 들지 말고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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