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를 공부하면서 요셉이 알지 못한 왕이 나타났는데 이 왕조는 힉소스 왕조를 무너뜨린 애굽의 왕조이다. 요셉이 있었던 때는 힉소스 왕조로서 셈족이 애굽을 통치하던 시대였다. 이때는 요셉이 셈족이었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로 세워서 통치하게 했다. 그런데 이 왕조가 함족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함족이 애굽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삼았다.
II. 출애굽 당시의 애굽 왕조와 출애굽 연대
출애굽에 관한 정확한 연대를 추정해 내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 주변 국가의 역사 특히 출애굽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애굽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적 사실이 성경 자체의 증거뿐만 아니라 그들 나라의 역사적 사실들을 고찰해 봄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출애굽의 정확한 연대를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그 당시 애굽의 역사적 배경은 어떠했으며 모세가 활동했을 당시의 애굽 왕은 누구였나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1. 고대 애굽 왕조의 4기간
성경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고대 애굽의 왕조는 주로 4단계의 통치 기간으로 구분된다.
1) 강력한 세력의 12왕조(B.C. 1991-1730)
이 기간의 애굽은 이제까지의 봉건 영주 시대를 지나 막강한 권세와 통치력을 지닌 통일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진 기간이었다. 상애굽과 하애굽으로 나뉘었던 두 개의 애굽은 하나로 통일되었고 수도는 구 왕국의 수도 '멤피스'(Memphis)로 확정되었다. 그들의 힘은 국경을 넘어 이웃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였으나 외국에 대한 정벌은 행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무역은 성행하여 외부로부터 애굽을 드나든 사람이 많이 있었으니 그들은 대부분 셈족이었으며 그들 중에 어떤 자들은 애굽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지중해 전역을 여행한 한 애굽 의사의 여행 기록인 '시누헤의 이야기'(The Tales of Sinuhe)가 이때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2) 힉소스(Hyksos) 왕조의 침입(B.C. 1730-1584)
힉소스(Hyksos) 족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이들에 대한 확실한 근원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처음에 단순히 애굽인들과 공존하였으나 서서히 애굽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애굽인들이 그들의 세력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때에는 이미 그들을 물리칠 만한 힘을 상실하여 결국 B.C. 18c가 시작될 무렵에는 애굽 왕조가 무너지고 힉소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애굽의 수도를 '멤피스'(Memphis)에서 동북쪽 삼각주 지역에 있는 '아바리스'(Avaris)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추방될 때까지 계속 통치하였다.
3)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18왕조(B.C. 1584-1314)
힉소스 족이 애굽을 통치하던 시대에도 애굽의 13왕조로부터 17왕조까지는 미약하나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18왕조의 첫 통치자인 '아모스'(Amos, B.C. 1584-1560)가 나타나 힉소스 왕조의 수도인 아바리스(Avaris)를 탈환하고 그들을 멀리 북쪽 팔레스틴까지 쫓아냄으로서 애굽의 왕조는 다시금 강력하게 부활되었다. 이렇듯 아모스에 의해 강화된 애굽의 국력은 그의 손자 '투트모스 1세' (Thutmose I, B.C. 1504-1450) 때부터 제국적인 애굽으로 성장하였고 이때부터 애굽의 원정은 시작되어 '투트모스 3세' (Thutmose III, B.C. 1504-1450)를 거쳐 '아멘호텝 2세' (Amenhotep II, B.C. 1450-1426)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애굽의 영토는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까지 확장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애굽은 극도에 달하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4) 건설의 시대 19왕조(B.C. 1314-1194)
성경과 관련된 애굽의 네 번째 통치 기간은 19왕조 기간으로 18왕조에 뒤지지 않는 국력을 소유하던 때였다. 이 왕조는 약 100여 년간 유명한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90-1224)가 통치하였다. 그는 군사적인 면에서도 막강하여 18왕조 전성기 때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건설에도 주력하여 남북 애굽의 모든 도성들을 확장 또는 신축하였다.
2. 고대 애굽 왕조와 야곱의 아들들과의 연관성
1) 요셉의 총리대신과 애굽 왕조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때의 애굽 왕조에 대해서는 애굽의 12왕조 때였다는 학설과 힉소스 왕조 때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이 두 가지 학설 중에서 요셉의 때와 좀 더 유사한 왕조는 힉소스 왕조가 아닌 애굽의 12왕조 때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해 왔을 때 요셉이 그들에게 준수토록 한 관습이 힉소스의 셈족 관습이 아닌 애굽의 관습이었고(참조, 창 46:34), 요셉 역시 애굽의 관습을 따르고 있었으며(참조, 창 43:32), 당시에 애굽이 힉소스 왕조의 침입을 서서히 받고 있었으므로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였던 당시의 상황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때는 힉소스 왕조가 아닌 애굽의 12왕조 기간으로 보아야 하며 출애굽의 연대를 1446년으로 볼 때 430년 전의 사건이라 가정한다면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때의 애굽 왕은 '세소스트리스 2세' (Sesostris II, B.C. 1894-1878)까지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출 1:8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한다. 이 왕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행했던 이스라엘의 탄압과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을 두려워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이 후에 애굽의 적들과 결탁하여 자신들을 칠 것으로 생각하여 이스라엘에게 핍박을 가하기 시작한 왕이었다(참조, 출 1:8-10). 그렇다면 그가 적으로 생각했던 애굽의 적은 누구였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애굽에 침입하여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했던 힉소스족이었을 것이며 요셉을 알지 못했던 그 왕은 이스라엘 역시 힉소스족으로 동일하게 취급하여 박해를 가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미루어 생각할 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힉소스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왕, 즉 힉소스족을 미워하여 그들을 물리치기에 최선을 다한 왕이라 생각할 수 있으며, 애굽의 역사상 이렇듯 힉소스족을 미워하고 그들을 미워한 왕은 18왕조의 창시자인 '아모스' (Amose, B.C. 1584-1560)였으므로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아모스'였음이 분명하다.
3) 유아 살해를 명령한 애굽 왕
'아모스'의 히브리인 학대 정책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은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애굽의 또 다른 바로 왕은 이제 히브리인의 모든 남자아이를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였는데 그가 바로 애굽의 위대한 정복자 '투트모스 1세'(Thutmose I, B.C. 1539-1514)였다. 이러한 증거로는 출애굽의 연대를 들 수 있는데 출애굽의 연대를 B.C. 1446년으로 생각한다면 모세가 출생한 연대는 80년 전인 B.C. 1526년이었고 이러한 연대는 투트모스 1세의 통치 기간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4) 모세의 구출자 바로의 딸
이제 출애굽의 배경에 관한 애굽 역사의 마지막 사건으로서 모세를 구출한 바로의 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바로의 딸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가 '하트셉슈트'(Hatshepsut, B.C. 1504-1483) 공주로 일치하고 있다. 그녀는 '투트모스 I세'의 딸로서 아버지 '투트모스 1세'가 죽자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투트모스 2세'(Thutmose II, B.C. 1514-1504)와 결혼하였고, 그가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하자 자기 딸을 '투트모스 2세'와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투트모스 3세'(Thutmose III, B.C. 1504-1450)와 결혼시킴으로 그들 위에 올라 왕의 권한을 가지고 애굽을 통치했던 여자였다. 그리므로 그녀는 모든 히브리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 속에서도 모세를 주워 기를 수 있는 권력과 대담성을 지닌 유일한 여성이었다.
4. 출애굽 연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나온 연대에 대해서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인다. 첫째는 출애굽을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 B.C. 1450-1426) 치하의 B.C. 1446년으로 보는 견해이며, 둘째는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90-1224) 치하의 B.C. 1290년으로 보는 학설이다. 이제 이 두 가지 학설 중에서 먼저 B.C. 1290년으로 생각하는 B.C. 13c설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B.C. 13c설에 관한 견해
①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B.C. 13c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가장 강력한 증거는 출 1:11의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제 동원되어 건축한 라암셋 성은 당시의 통치자인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90-1224)의 이름을 본떠서 지은 것이며, 따라서 만약 B.C. 1446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면 그보다 약 150년 후에 건설된 라암셋 성을 지었다는 성경의 기사는 거짓이 되므로 출애굽의 연대는 '람세스 2세' 치하의 B.C. 1290년이라는 것이다.
② 15c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모압과 에돔의 정착민들
13c설에 대한 두 번째 증거로는 모압과 에돔의 문명이 B.C. 1900-1300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데스에서 모압 족속에게 막강한 저지를 당하여 우회하였는데(참조, 민 20:14-21) B.C. 15c에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당연히 모압과 에돔이 존재한 후인 B.C. 13c로 보아야 타당하다.
③ '라기스'와 '드빌'의 13c 멸망
이들의 세 번째 주장은 여호수아의 손에 의해 멸망당했던 '라기스'와(참조, 수 10:32) '드빌'의(참조 수 10:38, 39) 멸망이 고고학에 의하여 B.C. 1230-1200년경의 13c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당연히 B.C. 1290년이어야 하며 그래야 모세의 40년과 여호수아의 통치 기간을 합친 때와 '라기스'와 '드빌'이 멸망한 연대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제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2) B.C. 13c설의 견해에 대한 반박
① 모세 출생 이전에 건설되었던 '라암셋 성'
먼저 '라암셋'에 대한 주장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라암셋 성이 '라암셋 2세'의 이름을 본떠 지은 것으로 '람세스 2세'의 통치 기간인 B.C. 13c에 건축된 것이라 하지만 이는 세밀한 성경 연구의 부족으로 인한 착각이다. 왜냐하면 창 47:11에서 이미 '라암셋'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그 당시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었던 12C 왕조 말기였고 따라서 '라암셋'성은 '람세스 2세' 통치기간에 최초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미 요셉의 시대인 12왕조 말기에 건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 1:11의 '라암셋 성'의 건축은 이미 지어져 있었던 '라암셋 성'을 증축하거나 개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라암셋 성'이 당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라암셋 성'의 건축이 모세의 출생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참조, 출 1:11; 2:1-4). 그러므로 '라암셋 성'이 그들의 주장대로 B.C. 13c에 건축되었고 그때에 출애굽의 사건이 일어났다면 모세는 출생하자마자 80세의 고령이 되어 출애굽의 사건을 인도하였다는 엄청난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라암셋 성'은 요셉의 시대인 12왕조시기에 이미 건축된 것을 '람세스 2세'가 개축한 것이었고 이러한 증거에 의하여 '라암셋 성'의 건축 연대로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를 B.C. 13c로 추정한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② '팀나 성전'(Timna Temple)에서 발견된 유물 등
13c설의 주장들은 13c에 모압과 에돔 족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최근 그곳을 조사한 고고학자 '랭카스터 하딩' (Lancaster Harding)에 의하면 '팀나 성전' (Timna Temple)에서 주전 1600-1399년의 애굽 돌항아리와 자기류가 발굴되어 요단 동편과 '네겝'(Negeb) 지역에 일단의 정착민들이 살고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③여호수아에 의해 불살라지지 않은 '라기스'와 '드빌'
13c 설의 주장들은 여호수아에 의해 멸망당한 '라기스'와 '드빌'이 B.C. 13c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나 이러한 주장 역시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의 정벌 정책은 성읍의 거류민들만을 도륙하였을 뿐 도성 자체를 완전히 불사르거나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의 중요 실례는 북부 전투를 묘사하고 있는 여호수아서 11장에서 잘 나타난다. 그 전후에서 북부의 여러 왕들이 '하솔' (Hazor)성을 중심으로 여호수아에 대항하였는데 모든 성읍 중 특별히 하솔 성읍만이 이스라엘에 의해 불살라졌을 뿐 다른 성읍들은 '그들의 언덕에 세워진 채' 그래도 남겨졌기 때문이다(참조, 수 11:13). 그러므로 '라기스'와 '드빌'은 여호수아에 의해 완전히 불태워진 것이 아니라 그 후의 다른 침략자 즉 애굽의 '메르넵타'(Merneptah) 등에 의해 불살라졌을 것이다.
3) B.C. 15c 설에 대한 여러 가지 증거
① 성경의 증거
a. 왕상 6:1
15c 설에 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보다 480년 앞서서 출애굽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왕상 6:1의 진술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는 솔로몬 재위 4년의 B.C. 966년이었으며 따라서 966년에 480년을 더하면 출애굽의 연대는 정확히 B.C. 1446년이 된다.
b. 삿 11:26
15c 설에 관한 두 번째 증거로는 B.C. 1100년경에 활동했던 이스라엘의 여덟 번째 사사인 '입다'의 진술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시대까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여 블레셋에 거한 기간인 300년간 이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1100년과 300년을 더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한 때는 B.C. 1400년경이 되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는 1400년에 광야 생활 40년을 더한 B.C. 1440년이 된다.
c. 여리고 성의 멸망
여호수아에 의해 멸망된 여리고 성(참조, 수 6:1-27)의 연대 역시 15c 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성경적 근거이다. 영국의 고고학자 '존 가스탱' (John Garstang)의 발굴에 의하면 여리고의 파괴는 B.C. 약 1400년경으로 판명되었는데 특히 성벽이 외부로 무너진 지층을 나타내는 D성(City D)의 파괴는 B.C. 약 1400년경에 이스라엘 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② 성경 외적인 증거
a. 애굽 왕조와의 역사적 일치성
애굽 왕조와 성경적 사건들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출애굽의 연대는 B.C. 1446년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출애굽의 연대를 B.C. 1290년으로 생각할 때 모세를 구출한 바로의 딸과 모세가 미디안에서 광야 생활을 할 동안의 많은 사건들이 애굽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연대를 B.C. 1446년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보다 8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 모세의 구출 사건이 '하트셉슈트'(Hatshepsut, B.C. 1504-1483) 공주였다는 사건과 일치하며, 모세가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할 정도로 40년 이상을 통치한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90-1224) 이전의 유일한 왕인 '투트모스 3세'(Thutmose III, B.C. 1504-1450)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외에도 모세 탄생 시 이스라엘을 박해했던 애굽 왕과의 일치성이나 그 후의 열왕기 시대의 성경 연대 등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B.C. 1446년에 출애굽 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b. '꿈 석비'(Dream Stele)
'아멘호텝 2세' (Amenhotep II, B.C. 1450-1426)의 뒤를 이은 '투트모스 4세' (Thutmose IV, B.C. 1426-1408)는 원래 '아멘호텝 2세'의 장자가 아닌 차자였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디로 갔는가? 이에 대해 '웅장한 스핑크스 (The Great Sphinx)의 발 사이에서 발견된 '투트모스 4세'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즉 꿈에 비록 그가 장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다음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스핑크스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멘호텝 2세' 당시에 애굽의 장자가 죽은 10재앙의 사건이 일어났음을 증명하므로 출애굽의 사건을 '아멘호텝 2세' 치하의 B.C. 1446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c. '텔 엘 아마르나 서신'에 나타난 '아비루족'의 침공에 관한 보고
B.C. 1400년에 기록된 '텔 엘 아마르나 서신'에는 팔레스틴과 시리아에 있는 애굽의 도시 국가와 영지들이 '아비루'(Apiru)라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으니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호소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아비루' (Apiru)라는 용어는 지금의 바벨론어 Habiru와 구약성경의 '히브리'(Hebrew)라는 말과 일치한다. 따라서 그들을 침공한 자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가나안을 정복했던 히브리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13c가 아닌 15c임을 말해 준다.
4) 출애굽 연대의 결론
출애굽 연대에 관한 연구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연구가 아닌 역사 연대의 해석일 뿐이므로 어느 연대기설을 따르든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감소되거나 출애굽 사건의 역사성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연대기설 중에서 어느 것을 따르든 커다란 교리적 논쟁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차피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성경의 증거뿐만 아니라 성경 외적인 상황과 이스라엘 주변 국가의 역사와 잘 조화되는 15c설 즉 B.C. 1446년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욱더 성경적이며 앞으로의 성경 해석에도 더욱 유리할 것이다.
[출애굽기 40장 성경주석 설교말씀] 모세가 성막을 세움(출 4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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