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자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면서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았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제목: “기쁨의 단을 거둡시다”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시 126:1-6
요절: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시 126:6)
주제: 한해를 결산하면서 눈물로 뿌린 것으로 기쁨의 단을 거두자
계획 인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냥 하루를 살지말고 반드시 미리 계획을 세우고, 한 주의 계획, 한 달의 계획, 한 분기(quarter)의 계획, 한해의 계획 등을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면서 중간 점검을 하고, 매달 혹 매년 마지막에 평가를 가져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데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며, 계획적인 삶을 살며,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데 강합니다. 목회도 계획을 세워 연말 당회 때 내년도 교회 표어, 목표, 예산 수립을 하며, 한 해를 반성하고 점검합니다.
오늘은 올해 한해를 결산하는 날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니 반드시 주인이 먼 출장에서 돌아와 세 종들의 일을 결산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의 돈으로 열심히 사업을 하여 갑절로 남겼습니다. 이에 주인의 칭찬을 듣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Well done, thou good and faithful servant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 25:21, 23)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땅을 묻혀 놓은 것을 가지고 왔을 때 주인은 크게 화를 내며 “악하고 게으른 종아 Thou wicked and slothful servant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6)며 그 한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에게 주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겠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까? 앞으로 천국에 입성할 때도 각종 면류관을 받는 착하고 충성된 성도가 될럽니까? 아니면 면류관은 고사하고 천국 입성도 거부받는 “악하고 게으른 성도”가 될렵니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처럼 송년 주일에 미리 연습하며 앞으로 한해를 알차게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찬송가 597장(통 378장)을 부르면서 더욱 우리의 신앙자세를 새롭게 합시다.
1절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다
지극한 그 은혜 내게 넘쳐 날 불러주시니 고마워라
2절 나 받은 달란트 얼마런가 나 힘써 그것을 남기어서
갑절로 주님께 바치오면 충성된 종이라 상주시리
3절 천하고 무능한 나에게도 귀중한 직분을 맡기셨다
그 은혜 고맙고 고마워라 이 생명 바쳐서 충성하리
4절 나 하는 일들이 하도 적어 큰 열매 눈앞에 안 뵈어도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 얻으리라
찬 325장(통 359장) 4절 가사에 보니
“주께서 심판하실 때 잘했다 칭찬하리니 이러한 상급 받도록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가사를 깊이 마음에 새기고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도록 날마다 주를 섬기며 딴 길로 가지 맙시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시에 보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에서처럼 오늘 한 송이의 국화꽃의 결실까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참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한 해를 지내왔습니다. 각 뉴스매체는 10대 뉴스를 선정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공동체에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뉴스를 선정하며 한해를 회고합니다. 오늘 기쁨의 곡식단을 수확하는 분들도 계시고, 아픔의 상처로 한해를 지나고 계신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오늘 봉독한 시편 126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BC 588~538년)에서 귀환될 때 부른 감사의 시입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른 찬양(시 120-134편) 중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시편입니다.
1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2절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3절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절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절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He that goeth forth and weepeth, bearing precious seed, shall doubtless come again with rejoicing, bringing his sheaves with him.
지난 50년간 바벨론 포로생활에 나라 없는 서러움과 특히 예배를 마음껏 드리지 못하는 아픔이 심했습니다. 날마다 예루살렘 회복을 위해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며 기쁨의 열매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귀환의 기쁨의 순간을 맞이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오늘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에벤에셀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날입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지금까지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은혜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찬송 301장(통 460장)에서 지금까지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쟎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이런 기쁨과 은혜의 곡식단을 수확할 때 눈물의 씨앗을 뿌리는 수고와 아픔이 있습니다. 혹 이 시간 이런 기쁨의 곡식, 회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내년에는 기필코 울며 씨를 뿌려 반드시 연말에 기쁨의 단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눈물이 메마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 가기 전 1980년대 새벽기도나 금요철야나 개인 금식할 때, 또 나라와 민족의 제단을 쌓을 때 많은 눈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대각성 운동이 있을 때도 눈물의 기도가 많았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의 불신자 가정에서 매일 새벽 교회에 장례식이 있냐고 물을 정도로 회개의 눈물이 교회 마룻바닥을 적셨습니다. 35년 만에 귀국해 보니 한국교회가 눈물이 더 이상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회개 기도회에 참석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민교회에서 집회하거나 목회하면 그래도 눈물의 기도가 있고 통곡의 기도를 하는 교회가 더러 있습니다.
다윗은 얼마나 눈물의 기도를 많이 했으면 ‘눈물의 병’(the bottle of tears, the tears bottle)을 언급했습니다. 시 56:8에 보니 “나의 유리함(wanderings)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여기서 유래되어 서양의 귀족들의 장례식 때 가족들과 친구들의 눈물을 받아 병에 넣어 시신과 함께 관에 보관한 것을 후손들이 오랜 시간 후 눈물의 병을 가보(家寶)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대영박물관, 루블 박물관에 가보면 이런 병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골고다의 주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린 것을 눈물병에 보여주면 어떠할까요?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십니까?
(1) 겟세마네 동산(=올리벳, Olivet, 행 1:12)에서 땀과 눈물이 핏방울이 되어 이마를 적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같은 상황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눈물 속에는 인류의 절망적 운명을 뒤바꾸어 놓게 될 십자가의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하십니다.
(2)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5-36)”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한 그녀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은 어떤 의미입니까? 병 앞에서 힘없이 죽은 나약한 한 친구 나사로를 향한 연민의 정과 더불어, 오빠를 잃은 두 자매의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은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고, 그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고국이요 사랑하는 동족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흘리는 예수의 눈물 속에는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애국심이 담겨 있습니다.
최근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습니까? 슬픔, 기쁨, 감사, 좌절, 분노, 감격
자연스럽게 나오는 눈물, 실컷 웁시다.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에 가서 엉엉 울고 있으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여인이여 어찌하여 우느냐? 고 물었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님을 인하여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통곡해야 합니다.
한 번은 갈릴리 지방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으로부터 식사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시는데 이 동네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난 여인이 예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는 자기의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자기의 엄청난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드린 예배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이런 통곡을 드려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리자 이사야가 그를 심방하여 죽을 준비를 시키며 유언을 남기라고 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하며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십니다.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 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시며 그 증거로 아하스의 일영표(태양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사 38:1-8). 이처럼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 밀레도에서 다시 한번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이 도착하니 저희에게 말하되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17-3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패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렘 9:1-2)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 (렘 14:7)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 42:3)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시 137:1-4)
자녀가 부모를 위해 눈물 중보기도, 부모가 자녀를 위해 부둥켜안고 울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더 빨리 역사하십니다. 모니카의 11년간 눈물의 기도가 어거스틴을 회심시켰습니다.
자녀를 위해, 조국을 위해, 교회를 위해, 목회자를 위해, 전도 대상(땅끝)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주일학교 학생, 청년과 기도 친구 만들기, 중보기도, 함께 부둥켜안고 기도할 때 눈물이 나오도록 기도하면 더욱 좋습니다. 말로 상처를 받은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 적 있습니까? 한 성도를 위해 목회자 혼자 금식하며 작정 기도하게 하지 마시고 함께 동역 기도하십시다.
복음송가 63장: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126:5)
한 목회자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한 권사님 댁에 심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권사님의 남편이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남편이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었다.
때로 울면서 기도를 하고, 기도를 하다가 중단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남편의 영혼을 생각하고 불쌍하여 다시 기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질문을 하였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많이 응답하셨는데 제 남편을 위하여 하는 기도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들으시기 아니하십니까?”
그러자 권사님에게 하나님께서 영적인 체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권사님에게 큰 컵을 보여 주시더랍니다. 그리고 네 눈물이 이 잔에 차지 아니하였단다 라고 하시드랍니다.
그래서 그 컵을 보니 자신의 눈물이 바닥에 겨우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 환상을 보고 권사님은 한없이 하나님 앞에서 울었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남편을 영혼을 생각하면서 울면서 기도하지 못한 것을 인하여 그렇게 울었답니다. 그런 후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눈물 병(the tears bottle)은 고대에 중동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눈물병의 모양은 보통 넓은 바닥과 가느다란 몸통, 깔때기 모양의 아구로 된 유리병이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굽지도 않고 광택도 내지 않은 단순한 토기로 만든 병을 사용하였습니다.
식구들은 제각기 눈물 병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으며, 집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답니다. 눈물 병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병 속에 담긴 눈물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과 슬픔, 죽음 등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그의 삶이 담긴 눈물 병을 함께 무덤에 넣어 장사 지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동에 고대 무덤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눈물 병들이 출토가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누가 심하게 아프거나 죽으면 모든 친척들은 제각기 눈물 병을 챙겨서 그 집으로 모인다. 슬피 눈물을 흘리면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각자는 눈물 병에 흐르는 눈물을 담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슬픔을 기억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시 56:8).
다윗이 말하는 주님에게 있는 눈물병은 그 시대에 사람들이 가지는 눈물 병과 다른 것입니다.
주님의 병은 주님에게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가지고 있는 눈물 병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당시의 눈물 병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자신의 눈물을 보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에 나의 눈물이 흘러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입니다. 우리 민족을 위한 눈물, 내 가족을 위한 눈물, 하나님이 주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눈물도 은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도 울었고, 히스기야도 울었고, 모세도 많이 울었고, 바울도 눈물로 목회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고 방지일 목사님도 고 김준곤 목사님도, 고 한경직 목사님도 눈물로 목회하신 분들이셨습니다. 제 자신의 영성의 위기를 느낄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눈물이 마른다는 것입니다.
사막 교부들은 “눈물이 흐르면 우리 마음의 사막에 생명의 비가 내린다. 그때 우리 마음의 사막에는 강이 흐르고 강변에는 은혜의 꽃이 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사막에서 살고 기도하며 사막의 위험을 잘 알던 그들은 “사막의 가장 큰 위기는 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막의 건조함보다 더 두려워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은혜의 눈물이 메마른 마음이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신 100살을 넘기신 방지일 목사님이 최근에 다시 쓰신 책 가운데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는 책의 한 대목입니다.
“눈물은 내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한다. 무지개를 보여 주기도 하고 살게도 한다. 눈물의 사람이 되어 강퍅한 것이 다가오지 못하게 됨도 느꼈다.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내 기도의 한 제목이다. 눈물은 억지로 흘리지 못한다. 의지적으로 울게 되어 배우 노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깊은 눈물은 흘리고자 해서 흘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눈물 흘리는 것도 은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 역시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은 비관론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눈물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게 해달라는 말이다. 눈물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지름길인 것이다.”(pp.30-32)
교회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새벽 첫 닭이 울면 일어나 기도하고 늘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날 이후 울보가 되었고 너무 울어 그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항상 짓눌려 있었다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오순절 부흥이 일어나던 날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고 설교를 마무리하는 기도를 하며 그가 “주 예수님, 제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입니다.”고 고백하는 순간 갑자기 통곡이 쏟아져 나왔고 그리고 바로 그때 다락방에 모인 모든 회중들에게서 가슴을 쥐어뜯는 통곡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회개의 눈물이 거룩한 부흥을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입니다.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간절한 기도제목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여 저에게 거룩한 눈물을 주시옵소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송년을 하면서 내년에 더욱 울며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올해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에벤에셀 제단을 세웁니다.
우리가 울면 우리 자녀가 살고 우리 민족이 살고 한국 교회가 살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을 망각하면 자녀가 죽습니다. 가정이 죽습니다. 교회가 죽습니다. 우리 민족이 죽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거룩한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마음의 눈물이 메마르면 은혜도 메마릅니다. 은혜의 눈물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면서 새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은혜의 생수의 강이 우리 교회에 흘러 넘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지난 한 해도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섭리를 감사드립니다. 이제 내일 송구영신예배를 드릴 때,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새 술은 새 부대의 정신을 가지고 깨끗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게 해 주옵소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신앙을 회복하옵소서. 에벤에셀의 제단을 주님께 드리며 다시 오실 예수님의 아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가복음 12장 예수님 말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막 1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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