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지막 날에 부활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심(요 11:1-57)
1-32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2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남동생]러라.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었던 것 같다. 베다니를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마을’이라고 표현한 것은 마리아가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긴 일로 더 잘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었고 누가복음 10:39에 보면 마리아는 주의 말씀에 대해 더 간절하였던 것 같다.
[3-5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께서는 후에 나사로를 ‘친구’(필로스)[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셨다(11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에게 구하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3-14). 야고보는 신자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교훈하였다(약 5:13-16). 나사로는 그 병으로 죽었지만 그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모든 신자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 죽음은 슬프고 두려운 사건이 아니고 천국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요 장차 부활할 소망을 가진 죽음이다. 신자의 죽음은 불행의 극치가 아니고 이생을 충실하게 마치는 신앙 훈련의 절정일 뿐이다. 신자는 죽음을 생각하며 더욱 분발한다.
[6-8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조급하지 않으신다. 그는 시간이 많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조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생할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때가 언제인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제자들은 유대로 가자는 주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인간편에서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고 그때 우리는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인도하심이 최선의 길임을 믿고 인내하며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9-1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일상 생활의 예를 비유로 드셨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빛이 있으므로 넘어지지 않고 밤에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넘어지기 쉽다. 낮 열두 시간은 그에게 일하실 시간이며 예수께서는 일하시는 동안 아직 죽지 않으실 것이다. 그의 일하실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은 낮이었다. 제자들은 두려워 말고 그와 함께 활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직 죽음을 겁낼 때가 아니었다.
[11-14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죽음을 잠자는 것에 비유하신 것은 죽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의미하신 것이 아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죽은 영혼도 의식을 가진다(눅 16장). 죽은 자는 단지 몸의 상태가 잠자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 잠자는 자를 깨울 수 있듯이, 주께서는 마지막 날 죽은 자를 깨우실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슬픈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죽어 없어지는 멸절의 사건도 아니다. 성도의 죽음은 마지막 부활의 소망을 가진 채로 잠드는 것이다.
[15-16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통하여 제자들이 자신의 신성(神性)을 믿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었으나 더 믿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 중 한 사람인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가능한 가장 악한 상황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주님을 믿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담대함이 없었고 오직 죽음의 두려움만 있어 보였다.
[17-19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5리’라는 원문은 약 3킬로미터이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 몸은 부패되기 시작했을 것이다(39절). 모든 사람은 병에 걸리며 마침내 죽는다.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도 죽는다.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이다(히 9:27).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에 왔고 세상의 한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인 증거이기도 하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구주가 필요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20-24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원문)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주님’이시며 그에게 병고침의 능력이 있음을 믿었다. 그는 예수께서 이제라도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줄을 알았다. 마르다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기도를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 또 그는 그의 동생이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 줄을 안다고 말했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도 믿었다. 다니엘 12:2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했다(단 12:2). 마르다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 하나님의 기도 응답,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다. 그의 믿음은 매우 좋았다.
[25-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결코](원문)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몸의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다. 그것은 성경에 전제되어 있고 밝히 증거된 바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창조된 본래의 모습대로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부활과 영생으로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실패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 그것은 첫째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생명의 능력이 있으시다. 그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 그 자신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사실 것이다. 둘째 그것은 그의 대속 사역 때문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었으나, 그의 대속 사역의 결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과 영생이시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를 믿는 자는 복된 부활과 영생에 참여한다. 또 그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믿어야 그 생명에 참여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죽은 후에는 기회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서 그를 믿으면 몸의 복된 부활과 영생에 참여할 것이다. 또 그를 믿는 자는 순종할 것이다. 물론 사람이 그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27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페피스튜카)[믿었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적 믿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 것이며 여기에 영혼의 구원이 있다.
[28-32절]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원문)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남동생]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병 중에는 죽을병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병도 있다. 나사로의 병은 그를 죽게 만들 치명적인 병이었다. 모든 병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 질병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도 때때로 병에 걸린다. 그러나 그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병이다. 성도는 병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겸손해지고 거룩해진다. 성도에게 허락하신 질병은, 비록 물질적, 시간적 손실이 있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큰 유익이 있다.
둘째로, 성도의 죽음은 육신적인 측면에서 잠자는 것과 같다. 주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죽은 자는 잠자는 자와 비슷하다. 성도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의 부활을 예상하는 말이다. 잠자는 자가 깨움을 받듯이, 죽은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영광스런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된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영원토록 누릴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문제이며, 부활과 영생은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은혜이며 영생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이다. 요한복음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또 몸의 부활과 영생을 얻는 진리를 전한다. 여기에 인간의 가장 불행한 문제인 죽음의 해결책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해결책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죽음의 해결자로 오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우리의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의 복의 가치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자. 또 이제는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즐거이 말씀에 순종하자.
33-57절, 나사로야, 나오라
[33-34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통분히 여기다’는 원어(엠브리마오마이)는 ‘크게 요동하다’는 뜻이며, ‘민망하다’는 원어(타랏소의 수동태)는 ‘괴롭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심정을 가진 자이셨다. 그가 심령이 크게 요동하시고 괴로워하신 까닭은 그의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고 그의 죽음을 인해 여형제들이 슬피 울고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며, 또 본래 영생할 수 있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죽게 된 불쌍한 처지를 슬퍼하신 때문일 것이다.
[35-36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사랑과 동정을 가진 자이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본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동정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덕목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고 웃는 자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 모습이다.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악한 감정을 버리고 선함과 긍휼과 사랑의 덕을 가진 내면적 성품에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면모이며 성화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딛 2:14).
[37-39절]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는 친구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인간은 한번은 다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한번 죽는 죽음을 막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주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특별한 예이었다. 나사로의 시체는 무덤 속에 놓여 있었고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므로 벌써 냄새가 났다. 나사로는 확실히 죽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물론 그의 회생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40-4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그러므로 그들은 그 죽은 자가 놓여 있는 곳에서](전통본문)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항상 기도로 교통하셨고 아버지께서는 그의 기도의 말을 들어주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매우 친밀하셨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는 그의 말씀은 그가 나사로를 살려주실 것을 기도하신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아버지의 허락 속에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다. 또 이 일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43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그는 나사로의 몸을 떠나갔던 영혼을 부르셨고 잠든 몸을 깨우셨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셨거나 아버지께 호소하신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권위로 그를 부르셨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도 친히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의인과 악인, 즉 믿고 순종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베’라는 원어(케이리아)는 ‘붕대’ 혹은 ‘수의’를 가리킨다. 죽은 나사로는 수의를 입은 채로, 얼굴이 수건에 싸인 채로 나왔다. 그는 예수께서 부르신 그때에 살아났다. 아직 수의나 수건을 벗을 겨를도 없었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사건이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이 일어났다.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자가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神性)과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증명하셨다.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그는 전에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고(눅 7:11-17) 야이로의 외동딸도 살리셨다(눅 8:40-42, 49-5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구주이시다.
[45-46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었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똑같은 사건 앞에서도 믿는 자들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이끄시는 자들만 예수께로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 요한복음 6:37, 4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47-48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객관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원수들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은 심령이 굳어서 그를 믿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아지면 로마인들이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하여 다시 그 땅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왕이 아니셨다. 그의 왕권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었다.
[49-57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을 본받자.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사랑하셨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셨다. 그것은 그의 인간다운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눈물을 본받자(요 13:34; 엡 5:2).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많은 증거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는 믿을 만하지 못한 어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미신적이거나 불합리한 교훈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을 만한 증거들을 보고 믿으라고 말하는 복된 소식이다. 주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신적 구주이심을 증명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확신하고 따르자.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믿을 만한 증거들을 들었음에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창세 전에 택한 자들만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우리가 죄와 진노 아래 있는 것과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누가복음 16장 주일설교말씀] 돈을 사랑치 말 것(눅 1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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