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누가복음 16장 주일설교말씀] 돈을 사랑치 말 것(눅 16:1-31)

성령의 능력 2022. 3. 24.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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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 것(눅 16:1-31)

 

1-18, 불의한 청지기

본문은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 중의 하나이다.

[1-7]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 . . .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 관리인이다. 그런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다. 주인은 그를 불러 말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그 청지기는 해고한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말했다.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그가 기름 백 말이니이다라고 말하자,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고 말하였고, 또 다른 이에게 말하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그가 밀 백 석이니이다”라고 말하자,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고 말하였다.

그 청지기가 생각해낸 방법이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임의로 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해고된 후에 그들이 그를 그들의 집으로 영접해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하나씩 불렀고, 기름 백 말을 빚진 자에게는 오십 말로 감해 주었고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팔십 석으로 감해 주었다. 이것은 기왕의 그의 불성실에 더하여 주인의 재산에 더욱 더 큰 손해를 끼친 일이었다.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자기 멋대로 처리했으니 옳지 않은 청지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주인은 그 청지기가 지혜 있게 행하였다고 칭찬하였다. 그것은 주인의 재산을 바르게 잘 관리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머리를 썼다는 뜻이다. 물론 그 청지기의 지혜는 선한 지혜가 아니고 세상적인 지혜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고 본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재물이라는 원어(맘모나스)는 ‘재물, 재산, ()’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왜 재물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표현하셨는가? 그것은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돈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 건강, 재능,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와 비교하여 말씀한 것이다. 인간의 세상 생활은 청지기의 생활과 같다. 우리는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불의한 방식으로 빚쟁이들에게 선심을 써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재물로 하나님의 일에 힘씀으로써 하나님과 친근해지면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또 우리가 재물로 구제와 선행에 힘씀으로 믿음 안에서 가난한 형제들과 친근해지면, 우리의 구제와 선행으로 도움을 받은 가난한 성도들은 천국에서 우리를 기쁘게 대하며 영접할 것이다. 이것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너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다(6:19-21).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쓰는 것을 말하였다(눅 12:33; 딤전 6:17-19).

[10-12]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주의 말씀에, ‘지극히 작은 것은 문자적 의미뿐 아니라, 세상 재물을 가리키며, ‘큰 것은 천국 보화를 가리킨다고 본다. 천국 보화와 비교할 때 세상 재물과 부()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다. ‘불의한 재물도 땅의 재물을 가리키며, ‘참된 것은 천국 보화를 가리킬 것이다. 이 세상의 부와 재물은 헛되지만, 천국의 보화는 참되다.

또 주의 말씀에, ‘남의 것도 세상 재물을 가리키며, ‘너희의 것은 천국에서 받을 부()와 영광을 가리킨다고 본다. 세상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청지기처럼 하나님의 것을 맡은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기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주께서 교훈하고자 하시는 바는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바른 물질 생활에 대해서이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같이 주인의 물질을 낭비하지 말고 충성된 청지기같이 물질을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재물을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할 때,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더 큰 것, 참된 것, 영원히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을 받으며 누리게 될 것이다.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 . . .

주께서는 사람의 물질욕과 명예욕과 정욕에 대해 좀더 말씀하셨다. 그는 말씀하셨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본절은 청지기 비유의 결론과도 같다. 집의 종들은 두 명의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한 사람을 미워하는 셈이 되고 한 사람을 중히 여기면 다른 한 사람을 경히 여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또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9:23; 14:26, 33). 또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또 사도 요한은 신자들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겨야지 세상이나 재물도 함께 사랑해서는 안 된다.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 . . .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을 듣고 그를 비웃었다. 물질욕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고 완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라도 배척하고 멸시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는 악한 태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었다. 오늘날도 사람이 물질욕을 가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배척하게 될 것이다.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주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뿐 아니라,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마음과 사람들 중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음을 보셨다. 그것은 교만과 명예욕이었다.

특히 사람들 중에서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일이다. 요셉이나 모르드개나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자연스러운 상황을 주셔서 높임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 거짓되게 혹은 정당치 않게 높아지려는 마음은 교만이요 명예욕이다. 주께서는 그렇게 높임을 받는 것을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미움을 받는 것이라는 말은 가증한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주시지 않은 명예는 가증한 것이다.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 . . .

예수께서는 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별을 말씀하신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시대는 요한의 때까지이었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며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듯이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전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셨다(4:17). ‘나라통치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사람들의 범죄로 죄와 마귀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특별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와 생명으로 시작되었다.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 . . .

예수께서는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시대에 율법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주께서는 율법의 작은 한 부분도 폐지되지 않고 다 성취될 것을 강조하셨다. 그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10:4; 고전 1:30). ,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의롭고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6:13).

[18]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 . . .

주께서는 또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의 도덕적 결함의 다른 중요한 한 요소인 정욕의 죄를 지적하셨다. 사람의 이 죄악성은 결혼 생활의 불성실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그것이 간음의 죄악이다. 또 남편에게 버리운 이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결혼 관계는 사람이 나눈다고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모든 이혼과 재혼을 정죄하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32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합법적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이혼의 합법적 이유이다. 또 사별(死別)한 경우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합법적 이혼을 한 경우, 재혼은 합법적이라고 본다. 성경은 이혼이 아닌 별거(別居)를 정죄하지는 않는다(고전 7:11). 특별한 경우, 성도는 별거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물질을 바르게 관리하고 사용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이며, 우리는 단지 청지기 즉 관리자에 불과하다. 우리의 돈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 건강, 재능,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에 욕심을 품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돈을 정당하게 벌어야 하고 불의한 이익을 구하지 말고 탐욕을 품지 말아야 한다. 아내는 직장 생활로 집안일이나 자녀 교육의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며 그가 맡겨주신 나의 모든 것을 바르게 관리하고 그의 뜻대로 전도와 구제를 위해 바르게 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명예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지 말고 또 높임을 받으려 하지 말고 남을 존중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피차 복종하라”(5:21),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2:3),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12:10)고 교훈하였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높이실 때까지 겸손히 그의 처지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악한 정욕을 버려야 한다. 악한 정욕은 부정한 욕망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와 남편으로 만족해야 한다(5:18-19). 결혼한 이들은 결혼 관계를 귀중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고,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나 혼자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형편과 처지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으며 생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고 간음죄를 짓게 될 것이다.

19-31,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19-23]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 . . .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셨다.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즐기며 살았다. 또한 나사로라는 이름의 한 거지가 있었다. 그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전통본문)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하였고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그러나 부자는 그 거지를 동정하거나 돕지 않았다.

어느 날 그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이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간다.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어느 날 그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그의 장례식은 매우 거창하고 호화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은 지옥에 떨어졌다. 본문의 음부지옥을 가리킨다. 지옥은 악인이 죽은 후 그 영혼이 들어가는 형벌의 장소이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눈을 들어 멀리바라본 것을 보면, 지옥은 낮은 곳에 있고 천국은 높은 곳에 있으며 천국과 지옥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다. 엘리야도 예수께서도 하늘로 올리우신 것을 생각하면 천국은 확실히 높은 하늘에 있고, 지옥은 땅 아래, 지구 속 어떤 곳에 있는 것 같다. 지구 속에는 매우 뜨거운 불이 있다. 부자는 지옥에서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고 아브라함과 말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지옥에서 천국을, 또 천국에서 지옥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가 지옥에서 천국을 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단지 교훈을 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24-25]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 . . .

그 부자는 아브라함을 부르며 말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 부자는 지옥에서 불꽃 가운데서 고생하였다. 그는 지옥에서 뜨거운 불로 인한 심한 열기와 갈증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말했다. “,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들 곧 의식주의 풍요로움을 누렸다. 그러나 그때 그는 영적으로는 실상 빈곤하였었다. 그는 하나님도, 그의 계명도,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도 알지 못하고 단지 죄 가운데 낙을 누리며 살았다.

한편,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았었다. 그는 육신적, 경제적 궁핍 속에서 살았다. 그의 몸에는 헌데가 있었고 먹을것도 부족한 거지이었다. 그는 의식주에 부족함이 있는 자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 즉 구약성경을 알았고 믿었다. 물론, 가난한 자가 다 성경을 믿고 죽은 후에 위로와 안식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거지 나사로는 가난과 질병 속에서 자신의 허무함과 죄인됨을 깨달았던 것 같고 하나님을 찾아 만났고 그를 믿었다. 실상, 외적인 부유함보다 이것이 인생에게 큰복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렸던 그 부자는 죽은 후에 고통과 고민 가운데 있었고, 세상에서 고통을 당했던 나사로는 내세에서 위로와 안식을 누렸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몸이 죽은 후에도 의식이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있었다.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면, 만일 현세와 내세에 그의 공의로운 심판과 보응이 없다면, 인간 생활에서 종교와 도덕의 이유와 가치를 알 수 없고, 종교와 도덕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 . . .

아브라함은 또 말했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이 끼어 있다는 원어(카스마 메가 에스테릭타이)는 ‘고정된 큰 간격이 있다는 뜻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간격은 고정되어 있다. 이것은 거기에 들어간 영혼들의 상태도 고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사람은 죽음으로 그의 내세의 상태가 고정된다. 지옥에 들어간 이는 천국으로 올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간 이는 지옥으로 갈 수도 없다. 죽음으로 고정된 사람의 상태는 아무도 변경할 수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의와 선을 행하라고 명하시고 불의와 죄에 대해 경고하시고 내세에서 그는 엄격한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그 보응은 엄격하지만 이미 공적으로 경고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며 그의 공의도 변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신 대로 공의의 보응을 내세에서 내리실 것이다.

[27-28]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 . . .

그 부자는 말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지옥은 실재(實在)하는 곳이다. 그곳은 악인들의 형벌의 장소이다. 그곳은 불이 있는 곳이다. 지옥의 공포는 이방인들도 양심으로 느꼈던 공포이다. 모든 악인들은 그곳에 가게 될 것이다(21:8).

그 부자는 지옥의 고통 중에서 세상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기억하였다. 자기에게 아무런 소망과 위로가 없음을 안 그는 세상에 남아 있는 다섯 형제들의 미래를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내 형제 다섯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호소한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은 이 처지를 돌이킬 수 없을지라도, 나사로가 세상에 다시 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어 그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기를 소원하였다. 지옥의 고통을 경험한 자는 당연히 그런 소원을 가질 것이다.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바로 그 이유이다. 죄를 회개치 않는 자마다 그곳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사실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할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29-31]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 . . .

아브라함은 말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는 말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으라는 뜻이다. 구원을 갈망하는 자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어야 한다. 성경책에 증거되어 있는 복음을 듣고 믿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16).

그 부자는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그에게 또 말하였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부자는 아브라함의 말을 인정치 않았고 성경의 효력을 믿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통해 회개와 구원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죽은 자가 살아서 그들에게 돌아가 전도하면 그들이 회개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생각과 같았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믿지 않는 자는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교회시대에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사람을 구원하셨고 또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23-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고 성경주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도 구원은 기적 체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고 성경에 증거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도 기적을 전하지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한 부자같이 살지 말아야 한다. 그의 특징은 사치하고 연락하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거나 선을 베풀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옛날에 유황 불비로 멸망한 소돔 성의 사람들과 같았다(16:49). 주께서도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들은 주의 형제 한 사람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지 않았고 벗었을 때 옷 입히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25:41-46). 야고보는 사치하고 연락하는 악한 부자들을 책망하였다(5:1-6). 그러나, 의인 욥은 배고픈 고아를 먹이고 빈궁한 자에게 덮을 것을 주었다(31:16-20). 사도 바울은 부자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18). 우리는 악한 부자같이 살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내세를 알고 준비해야 한다.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 천국에 들어갔지만, 부자는 지옥에 들어갔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말했다(25).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 또 아브라함은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말했다(26). 사람의 내세의 상태는 바꿀 수 없다.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을 진실히 믿고 성경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야 하고 또 가족들이나 이웃이 살아 있는 동안 그에게 전도해야 한다. 죽은 후에는 그의 상태가 고정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내세가 있음을 알고 잘 준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구원의 길이 성경말씀뿐임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말했고 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이다(딤후 3:15).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는 데로 인도한다.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능력이다(1:16; 고전 1:21-2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구원의 유일한 복음이다(28:19; 16:15-16). 기적을 전하며 기적 체험을 강조하는 은사주의는 바른 길이 아니다. 우리는 거짓된 기적주의를 조심해야 한다(24:24; 살후 2:9-10).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8장 주일 설교말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행 8:1-40)

 

[사도행전 8장 주일 설교말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행 8:1-40)

사도행전 8장에서는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으로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사도들은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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