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18)
성탄절은 매년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 절기를 통해서 구속자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념해야 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베들레헴에서 탄생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마 2: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엡 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빌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성탄의 계절에 (1) 말씀이 육신된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을 축하합시다. 말씀(Logos)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참 생명이요 참빛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요 1:3-13). 이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을 성육신이며 육화(肉化)라 합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임마누엘이라 합니다. 일찍이 세례[침례]요한이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했습니다(요 1:15).
(2) 우리와 함께 거하신 임마누엘(God be with us) 사건을 매일 매 순간 경험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두려움도 걱정도 스트레스도 필요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불, 물, 폭풍도 염려 없습니다. 사 7:14에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남국 유다 왕 20명 중 제12대 왕은 웃시야의 손자인 아하스(혹 여호아하스 735-716, 16년간 통치)였습니다. 그는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바알을 섬기고 자기 아들을 몰록의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산당과 작은 산 위에와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악한 이방 민족의 풍습을 좇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기물인 번제단과 물두멍을 자기 마음대로 옮기게 하여 성전을 훼파하기도 했습니다(왕하 16:14-18).
아하스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하스를 친 나라는 바로 같은 피를 나눈 북조 이스라엘 왕 베가와 동맹한 아람왕 르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는 하루 동안에 유다 용사 12만 명을 죽이고 아하스의 대신들을 죽이고 부인, 아이 할 것 없이 관민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건 치명적인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조 이스라엘만 해도 유다로서는 당할 수 없는 세력인데 거기다가 강국인 아람이 합세를 했으니 유다는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심산은 유다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저희들 마음대로 다부넬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 신국을 건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역대하 28:5에 보니 이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를 아람의 손에 붙인 연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활동한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아하스 왕을 찾아가 ‘왕이여 삼가시고 조용히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아무리 노한다 해도 그들은 연기나는 두 부지갱이에 불과합니다.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왕이여 저들이 아무리 연합 전선을 펴고 쳐들어 온다 할지라도 65년 내에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왕이여 지금은 중대한 때입니다. 왕은 앗수르 왕을 믿지 마십시오. 아람 군대를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왕은 오로지 여호와께 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십시오.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여호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의 대답은 “나는 구하지 않겠노라.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노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징조(약속을 확증하는 징표)를 구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아람과 이스라엘을 폐하시리라는 약속을 믿고 수납하라는 말입니다. 그가 징표를 구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말로는 징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니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아하스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람과 못지않은 세력을 가진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왕이여! 아람과 이스라엘이 나를 치나이다. 청컨데 왕은 올라와서 나를 저들의 손에서 구원하소서’ 그러면서 성전과 왕궁의 은금을 가져다가 예물로 바쳤습니다. 앗수르왕은 황금을 보고 전쟁에 출전하여 다메섹을 쳐서 파하고 아람왕 르신을 목베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은 한 걸음 후퇴했다가 다시 쳐들어 왔습니다. 아하스는 또 다시 앗수르 왕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아하스는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거두어다가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앗수르 왕이 응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스의 마음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은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유다 왕국은 존폐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하스의 불신과는 상관없이 이사야의 입을 통해 놀라운 메시아 강림에 대한 징표를 선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버터와 꿀을 먹으리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새벽을 알리는 복음의 종소리입니다. 이것은 가시밭에 풍기는 백합의 향기요 돌무더기에서 발견한 황금덩이와 같습니다. 조상들이 대대로 듣고자 한 소리가 이 소리입니다. 조상들에게 메시아는 두꺼운 베일로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멀리 비취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은은히 들려오는 종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러던 하나님이 이사여의 입을 통하여 아하스 왕에게 들려주신 복음의 음성은 너무도 똑똑하고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저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리라고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이유를 밝힌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독생자에게 붙여 준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예수로만 불린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로도 불리어야 합니다. 예수는 예수로 불리기 전에 임마누엘로 불리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이 인생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 없이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예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를 먼저 마음속에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서로가 같지 않고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갈 수 없고 하나님이 사랑에게 올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간다면 하나님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온다면 사라밍 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 중에 가능한 것은 하나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고 자기를 희생하고 자신을 죽는데 까지 내어 주면서 사람과 함께 된 것은 오로지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의 예수가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은 끝이 없고 한량이 없습니다. 만사 해결, 만사 극복, 만사형통, 만사 향유가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이 풍성한 임마누엘의 은혜와 축복이 성탄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임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grace upon grace)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요 1:16-18). 우리가 드리는 영광보다는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어 최고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축도문도 임마누엘의 은총을 강복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니라” (고후 13:13). 주님의 중심에 모신 가정이 임마누엘의 가정이요, 주님 중심 한 목회가 임마누엘의 교회요 나라입니다.
랏셀 로우엘의 작품 중에 라운풀 공의 꿈이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중세의 청년 명사 라운풀 공은 팰생의 사업으로 예수께서 최후만찬에 쓰시던 금잔을 찾아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뜻을 단행하여 국사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말을 타고 성문을 나섰습니다. 바로 그때 남루한 옷차림의 문둥이 한 사람이 공 앞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더러운 것이 재수 없게, 자 이거나 가져가’하고 돈 한 푼을 내 던지고 말에 채찍을 하며 장도에 올랐습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공은 갖은 고초를 겪으며 금잔 찾기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빈곤에 시들고 머리에는 백발이 서리었습니다. 천추의 한을 머금고 뜻을 굽히게 된 공은 이제 고국 땅에 묻힐 양으로 발길을 돌리었습니다. 몸에는 남루한 외투를 걸치고 손에는 지팡이를 끌며 엄동설한 눈보라 속을 헤매어 그 성문에 돌아왔을 때의 공은 감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문둥이가 공 앞에 손을 내밀며 도움을 구하고 있었는데 그는 틀림없이 수십 년 전 이곳에서 공이 떠날 때 손을 내밀던 문둥이었습니다.
이때 공은 측은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몸에 지닌 한 개의 빵을 반으로 나누어주며 ‘형제여 내게 있는 것이 이것뿐이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받으라’ 그리고는 길가 도랑에 내려가 얼음을 깨고 허리에 찼던 표주박으로 물을 떠다가 문둥이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 순간 거지는 홀연히 변하여 빛나는 흰 옷을 입으신 예수로 나타나 라운풀 공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시기를 ‘보라 내니 두려워 말라. 거룩한 잔을 찾아 일생을 헤매면 무엇하노! 보라 금잔이 여기에 있으니 도랑물을 떠다 준 표주박이라, 반 나누어주던 빵은 내 찢긴 몽이오, 시원한 그 냉수는 내 흘린 피라.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먹은 것, 그것이 참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대접함이라’ 공은 깜짝 놀라 깨니 그것은 처음부터 꿈이었습니다. 깊이 깨달은 라운풀 공은 사랑으로 구제하고 사랑으로 정치를 하니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화평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와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죄인과 같이 살다가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사랑을 완수했습니다. 내 마음에 싫어하는 사람까지고 사랑하는 심정으로 성탄을 맞이해야 진짜 성탄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말씀 망대를 세우는 자와 전쟁에 나가는 임금의 예수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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