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원문 성경강해

[아가서 2장 히브리어 주석강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아 2:13-17)

성령의 능력 2021. 4. 2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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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아가서 2장 히브리어 주석 강해 중에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구속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사랑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여우가 들어와 포도원을 망쳐놓고 있습니다. 그 당시 봄이 되면 포도나무에 꽃이 피게 됩니다. 봄에 꽃이 피어야 만이 가을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우는 포도원에 있는 쥐를 잡아먹으려고 들어와서 다 헤쳐놓게 됩니다. 그러면 포도원의 포도나무가 꽃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을에 열매가 열리지 않아 한 해 농사를 망쳐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에 이단들이 가만히 들어와 주님과 성도가 만나지 못하도록 거짓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포도원의 여우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니 교회는 망하게 됩니다. 거짓 이단들 때문에 교회가 망하게 놔 둘 수가 없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성도가 포도원에서 만나야만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런 방해하는 자들을 몰아내어 구원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아 2:13-17)

 

13절 하테에나 하네타 파게이하 베하게파님 세마다르 나테누 레아흐 쿠미 레키 라크 라에야티 야파티 우레키 라크

아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 무화과는 뽕나무과의 낙엽관목으로서 소아시아가 원산지이며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 자생한다. 이는 성경에서 에덴동산으로부터 언급될 정도로 그 역사가 길다(3:7). 일 년에 두 번 열매를 맺는데, 첫 열매는 3월 경에 맺혀 6월 경에 성숙하며, 둘째 열매는 첫 열매가 성숙하는 동안 그 나무에 또 맺혀 8, 9월 경에 익는다.

이 무화과는 식용(삼상 25:18) 또는 약용(38:21)으로 사용되었다. 본 구절의 '푸른 열매'3월 경에 맺혀서 익어가는 열매를 말한다.

한편 '익었고'에 해당하는 '하나트''향기를 내다', '냄새를 내다'라는 뜻으로서 무화과가 점점 성숙해 가면서 향내를 풍기는 것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무화과는 그 맛이 달콤하여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의 안정되고 번영된 생활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왕상 4:25; 4:4; 슥 3:10).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 일반적으로 포도나무는 가지에서 열매를 맺은 후에 약 5, 6월 경 그 꽃을 피운다. 따라서 포도나무에 꽃이 폈다는 것은 이미 봄이 도래했고 그 나무에 열매가 확실히 맺혔음을 암시한다. 한편 성경에서 탐스러운 포도송이는 풍성함,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다." 이로써 "우리는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안다"(마 24:32). 이때가 되면 푸른 무화과 열매가 익어서 사용하기에 알맞을 만큼 된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대지는 "꽃"을 피울 뿐만 아니라(12절) "열매"도 맺는다. 열매 자체는 물론 유용하나 그 향기에 있어서도 단지 관상용의 즐거움밖에 되지 않는 꽃의 향기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뱀은 소위 포도나무 향기에 도망을 간다고들 말하는데 우리는 옛뱀이 누구이며 참 포도나무가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4절 요나티 베하게베 하셀라 베세테르 하마드레가 하르이니 에트 마르아이크 하쉐미이니 에트 콜레크 키 콜레크 아레브 우마르에크

아 2:14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2:14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 본절은 산비둘기가 바위틈이나 낭떠러지 절벽 사이에 그 집을 짓고 사는 점에 착안한 말이다(48:28). 혹자는 이를 비둘기로 비유된 술람미 여자가 인적이 뜸한 깊은 산지나 외지에 살고 있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주장한다(Delitzsch).

그러나 이처럼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술람미 여자가 규방 깊숙이 기거하며 수줍어하는 모습(G.L. Carr) 혹은 남자가 감히 엿보지 못하게끔 철저히 순결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 한편 솔로몬 왕은 1:15에서 술람미 여인 자체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온순하며 아름답다고 말한다(10:16).

1. 이제 그의 사랑은 그의 "비둘기"가 되었다. 다윗은 교회를 하나님의 "멧 비둘기"라고 불렀다(시 74:19) 그와 같이 이 여인도 본문에서 비둘기로 호칭된다.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힌 비둘기"(시 68:13)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며 결백과 평화의 상징이다. 은혜로운 심령은 비둘기 같은 심령이며 무해하고 정적과 청결을 사랑하며, 산비둘기가 그 짝에게 하듯 그리스도께 신실한 마음이다.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리셨듯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크리스천에게 내려오셔서 그들의 "심령을 온유하고 조용하게" 만들어 주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둘기"이다. 그가 교회를 자기의 소유로 인정하시고 교회를 기뻐하시는 때문이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평안을 찾을 수 있으며 그의 방주 밖에서는 안식을 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노아의 비둘기처럼 교회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2. 이 비둘기는 "바위틈과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말해 준다.

(1) 이 여인의 찬양. 그리스도는 반석이시다. 비둘기가 맹금류의 습격을 받으면 바위구멍 속에 숨듯이(렘 48:28) 교회는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으며 그분 안에서만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평안을 찾을 수 있다. 모세는 바위틈에 숨어서야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 만일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광채에 견디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낭떠러지의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 있는데 이는 이런 곳에서라야 그녀는 홀로,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의 마음과 더 잘 사귈 수 있겠기 때문이다. 선한 크리스천은 은밀한 시간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때때로 "혼자 기도하시기 위하여" 산으로 물러 가셨을 것이다.



(2) 이 여인의 수치. 그녀는 공포와 수치로 인하여 "바위틈"과 "은밀한 곳"으로 기어 들어갔던 것이리라. 실의에 빠지고 낙담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눈까지도 피하려고 자기 머리를 감추기 위해 어디라도 비집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의 존재 앞에 나타나 말을 걸기에는 너무나 무자격하고 무가치한 자신을 스스로 의식하고 이 여인은 물러났을 것이며 "지혜(마음)"없는 어리석은 비둘기" 같았을 것이다(호 7:11).

15절 에헤주 라누 슈알림 슈알림 케타님 메하벨림 케라밈 우케라메누 세마다르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 이라 

=====2:15

우리를 위하여... 작은 여우를 잡으라 - 본절의 화자(話者)에 대해서는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뉜다. (1) 술람미 여자가 솔로몬 왕의 말(10-14)에 화답하여 한 말이다(Delitzsch, Wycliffe). (2) 솔로몬 왕이 앞절들에 이어 계속 말한 것이다(Ewald, Lehrman). 이중 어느 것이 더 적합한지는 결정하기 어려우나 문맥상 전자가 더 적합한 듯하다(1:6; 7:12; 8:12).

술람미 여인은 자신과 솔로몬 왕과의 사랑의 관계를 파괴할 작은 여우를 잡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여우'를 혹자는 재칼(jackal, 여우와 늑대의 중간 형태의 짐승)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그보다는 팔레스틴의 여우로 보인다.

이 여우는 종종 포도원 등지에 굴을 파고 서식하면서 봄철 포도나무에 싹이 돋고 꽃이 필 무렵 포도원을 돌아다니면서 포도나무를 갉아먹거나 해친다. 여기서는 봄을 맞이하여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진전될 사랑의 관계를 훼방할 그 무엇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리고 예표론적으로 볼 때 주님과 성도 사이에 개입해 성도의 삶에서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대적 세력들을 암시한다(13:2-7; 눅 13:32). 성도들은 이런 세력들을 대적하기 위해 항시 깨어 있어야 하겠다(벧전 5:8, 9).

16절 도디 리 바아니 로 하로에 바쇼샤님

아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2: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구나 - 술람미 여인은 앞에서 그녀의 연인 솔로몬 왕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와의 관계 진전을 언급하였으며(3,4,8,9; 1:13, 14), 기서는 사랑하는 자와의 예속 관계를 밝히고 있다. 사랑이 초기 단계인 만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구나'를 먼저 말하는 즉 그녀 중심의 사랑, 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을 엿보게 한다(6:3; 7:10 비교).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 원문상으로 '백합화 가운데서 풀을 먹이는(먹는) '(하로에 바쇼샤님)이다. 개역 성경은 '먹이다'라는 말에서 '양 떼'를 유추하여 번역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과 솔로몬 왕의 관계를 양 떼와 목자의 관계에 비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의 진전을 갈망하는 문맥에 비추어 보건대, 본 구절은 사랑하는 연인인 솔로몬과의 키스(혹은 성적 결합)를 원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근거로는 첫째, 입맞춤의 소원은 이미 1:2서 피력된 바이며 둘째, 5:13에서 백합화는 입술에 비유되었고 셋째, 히브리어 '라아''방목하다'라는 뜻 외에도 '먹다' , '먹이다'는 의미도 지니기 때문이다(D. F. Kinlaw). 즉 마치 양이 풀을 뜯어먹듯이 서로의 입술을 맞대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Pope).

이 여인은 그의 은혜가 자기 백성과 갖는 교제를 생각하고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자기 양 떼를) 먹이시는구나." 이 여인은 자기에게 대한 그의 은총의 징표를 세부적으로 원하기 때문에 그가 전체적으로 모든 신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에서 기뻐하고 있다. 그가 보시기에 모든 신도는 백합화 같다. 그는 백합화 가운데서 "먹이신다." 사람이 자기 식탁이나 정원을 즐거워하듯 그는 신도들을 기뻐하며 그들의 집회를 즐거워하신다. 즉 그는 "금 촛대 사이로 거니시는" 것이다. 그는 그들과 담소하시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해 주기를 즐겨하신다.

17절 아드 쎄야푸아흐 하욤 베나슈 하첼랄림 소브 데메 레카 도디 리체비 오 레오페르 하아얄림 알 하레 바테르

아 2:17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2:17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 여기에서 '베데르''분리하다' '나뉘다'의 뜻을 가진다. 이 산에 대해서 혹자는 하나의 상징적인 산으로서 그 실재성은 없다고 하나(Weissbach) 예루살렘 남서쪽 약 11km 지점에 위치하는 '벧 아놋'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이를 상징적인 표현으로 볼 경우에는, (1) 이 두 연인이 서로 떨어져 있는 상태나 서로 떨어져 있게 만든 상황(Carr) 혹은 (2) 술람미 여인의 젖가슴(Lys) 등을 나타낸다는 견해들이 있다. 어쨌든 술람미 여인은 마치 날이 저물어서 동굴이나 보금자리로 찾아드는 짐승들처럼, 이제는 솔로몬이 오래도록 자신과 함께 거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내림에 대한 교회의 소망과 기대 및 이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의 기도.

교회는 "날이 새서 그림자가 달아날 것이라"라는 사실을 믿어 마지않는다. 복음의 날은 동틀 것이며 의식 율법의 그림자는 달아날 것이다. 저 어두운 종규(宗規)의 긴 밤이 지나면 마침내 "새벽이 높은 데서부터 찾아와 흑암 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춰 주신다"는 것은 구약 교회의 위안이 되었다. 태양이 떠오르면 밤의 그림자가 사라지듯, 실체가 오면 낮의 그림자(허상)도 사라진다. 돌보시지 않고 버리신 밤이 지나면 위로의 낮이 찾아올 것이다. 혹은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영원한 행복에도 비할 수도 있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재 상태의 그림자, 즉 우리의 어두움과 의심들, 우리의 슬픔과 억울하고 원통한 모든 일들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영광스러운 날이 밝아 올 것이다. "의로우신 자가 다스리시는" 아침이 밝아오며 다시는 밤이 없는 낮이 올 것이다.

이 여인은 조만간에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도와주고 위안해 주도록 간청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돌아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나를 찾아와 나를 구원하소서. 세상 끝까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소서. 나의 곤궁한 날에는 서둘러 나를 도우시며 오래 지체하지 마소서. (우리를) 나뉘게 하는 산이라도 넘어오소서. 그 시간과 날을 막는 산이 있더라도 그 빛과 사랑에 대한 은혜로운 기대로써 넘어오소서."

이 여인은 그가 현재를 위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을 데리러 급히 와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비록 그렇더라도 주 예수여! 오소서! 속히 오소서! 도중에 비록 산들이 있더라도 주께서는 노루나 어린 사슴처럼 그 산들을 쉬바리 넘어오실 수 있나이다. 내게 당신을 나타내시든지, 나를 당신께로 데려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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