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잠언 11장 히브리어 주석 강해 중에서 재림 시의 악인과 의인의 비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수록 악인과 의인의 행동들이 비교됩니다. 악인들은 더 악하게 살게 되며 의인들은 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도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통해서 마지막 재림의 날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재림 시의 악인과 의인의 비교(잠 11:1-8)
1절 모즈네 미르마 토아바트 아도나이 베에벤 쉘레마 레초노
잠 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11:1
속이는 저울...공평한 추 - 일반적인 상업 활동이 활발했던 솔로몬 당시 공공연하게 횡행하던 부정한 상행위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16:11; 20:10) 공정한 상거래의 대인, 대사회적으로 불신과 부당한 부의 축적이라는 폐해를 초래하는 것이기에 종교적,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 왔다(레 19:35, 36; 신 25:13-15; 겔 45;10; 암 8:5).
한편 '공평한 추'(에벤 쉘레마)는 '공평한 돌'이란 문자적 의미를 기지는 바, 이는 당시의 저울추가 '돌'이었음을 시사한다(신 25:13; 삼하 14:26).
상업에서 속이는 일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은 없다. 여기에서 "속삭이는 저울"은 어떤 자와의 거래에서든지 온갖 모양으로 속이는 부당한 사기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며," 동시에 이런 가증한 치부술의 사용을 용인하는 자들 또한 그가 미워하신다. 그와 같은 짓은 하나님을 수호자로 삼고 있는 정의를 모독하는 짓이며, 하나님을 보호자로 삼고 있는 우리 이웃에게는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기 수법을 소홀히 여기며 돈을 버는 데에 있어서는 그런 수단이 하등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행위가 탄로 나지 않고 지나가 버린다면 그들은 그 일에 대해 자신을 탓할 리도 없다. 약점이 폭로되기까지는 약점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호 12:7, 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하나님께 미움을 덜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제들에게 기만당할 자들의 복수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공정하고 정직한 거래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일은 없으며, 우리와 우리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도록 하는 일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 자신도 공평한 추에 의거하여 행하시며 공정한 손으로 심판의 저울을 들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극히 정확하고 정밀하게 계산한다는 미명 하에 저울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께 더욱더 가증한 것이 된다.
2절 바 자돈 바야보 칼론 베에트 체누임 호크마
잠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 대표적인 영역본들은 본 문구에 접속사 'then'(KJV, NIV, RSV)을 첨가하여 후자를 전자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적 의미로 번역하였다.
곧 '교만'이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악이라는 점에서(6:17;8:13) 그러한 교만의 결과가 가장 비천한 '수치'와 '치욕'의 상태에 처하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눅 14:11; 고전 10:12).
겸손(체누임) - 이는 '굴복하다'란 뜻의 '차나'에서 파생된 말로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자기 자기'를 가리킨다.
자신을 높이는 자가 여기에서는 어떻게 낮아지며 얼마나 멸시를 당하게 되는지 살펴보자. "교만이 오면 욕도 오느니라." 교만은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만한 죄이다. 흙에서 나와 시혜물(施惠物)을 먹고살며 하나님께 의존하고 자기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는 인간에게 있어서 교만하다는 것은 수치가 된다. 그것은 타인들이 창피하다고 욕설을 퍼붓고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죄이다.
거만한 자는 스스로 보잘것 없이 되는 자이다. 흔히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깎아내리시는데, 느부가넷살이나 헤롯에게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그들의 헛된 자부심에는 즉각 치욕이 뒤따라 왔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굴복시키고," 그들이 자랑하는 일에서 그들을 반대하시고 납작하게 꺾으시는 것이다(사 2:11 이하).
자신을 낮추는 자는 여기에서 어떻게 높아지며 얼마나 좋은 평판을 얻게 되는지 살펴보자. 교만한 자에게는 어리석음이 있고 욕이 돌아갈 것이나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으며" 존귀가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그에게 존경을 얻어 주며 사람들 앞에서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설혹 겸손한 자가 누구에게 발로 짓밟힐 만큼 비천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이며 그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 겸비한 심령을 가진 자는 얼마나 안전하고 조용하며 편안한가를 생각해 보고, 그들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는 어떠하며 스스로 어떤 위안을 누리는지 살펴본다면, 우리는 "겸손한 자에게 지혜가 있느니라"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3절 투마트 예솰림 타네헴 베셀레프 보게딤 베솨뎀 예솨뎀
잠 11:3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11:3
정직한 자의... 인도하거니와 - '성실한'을 뜻하는 '톰'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정직한 자의 흠 없고 순전한 삶의 자세가 자기 스스로를 지혜의 길, 곧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생명길로 가게 한다는 의미이다. 사특한 자의...망케 하느니라.
여기서 '사특한 자'(보게딤)는 '속이다', '은밀하게 행동하다'란 뜻의 '바가드'의 복수형으로 '불신실하고 거짓된 자'를 가리킨다(the unfaithful, NIV). 또한 원어상 본서에서 이곳과 15:4에만 나타나는 '패역'(셀레프)은 '비틀다', '뒤엎다', '넘어뜨리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며, 이는 뒤틀린 도덕적 성향으로 진리를 왜곡시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직한 자의 성실함은 그 자체가 의무의 길과 안전의 길로 안내하는 인도자가 되어 줄 것이다. 그의 원칙은 고정되어 있고 그의 규준은 확실하므로, 그의 길은 평탄하다. 그의 성실성은 그를 꾸준하도록 지켜 주며, 양심을 지키는 것 말고는 추구해야 할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아서 풍향이 바뀔 때마다 침로를 변경할 필요가 없다. "성실과 정직"은 사람을 "보호"해 줄 것이다(시 25:21).
악인의 불의는 그 자체가 그의 파멸이 될 것이다. 착한 사람이 아무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분명함이 그를 보호해 주듯이, 악인의 패역은 비록 그가 자신을 견고한 요새처럼 생각하더라도 자신을 멸망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판 묘혈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잠 5:22).
4절 로 요일 혼 베욤 에브라 우체다카 타칠 미마베트
잠 11:4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11:4
진노하시는 날 - 종말론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욥 21:30; 사 10:3; 겔 7:19; 습 1:18).
"사망의 날"은 "진노하시는 날"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인간의 죽어야만 하는 숙명을 명상하다가 거기서 하나님의 노의 능력을 찬미하게 되었던 것이다(시 90:11). 그것은 자연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게 갚아야 할 빚이다. "사망 뒤에는 심판"이 있고, 그리고 그것은 "진노의 날"이다(계 6:17).
그 날에는 많은 재물도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부귀도 그 일격을 가볍게 받아넘기거나 고통을 완화시켜 주지 못하고 그 독침을 뽑아 주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생득권은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공개적인 심판 날에 재물은 인간을 보호해 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위험에 직면하도록 하게 하는 수가 많은 것이다(겔 7:19).
"죽음"의 재앙을 "면케하는 것"은 의로움뿐이다. 선한 양심은 죽음을 편안하게 해 주며 그것에 대한 공포를 제거해 줄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침을 받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첫째 사망의 해도 많이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의로운 자의 특권이다.
5절 치드카트 타밈 테야세르 다르코 우베리쉐아토 이폴 라솨
잠 11:5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11:5
완전한자(타밈) - 문자적 의미는 3절의 '성실'과 같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 그대로의 전적 무흠함의 상태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완전한 삶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자를 말한다(창 6:9). 실로 완전한 삶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골1:28). 곧게 되려니와(테야쉐르) - 원어상 직선 상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하반절의 '넘어지리라'와 대조적 의미에서의 '(표면의) 평탄함'을 가리킨다(3:6).
6절 치드카트 예솰림 타칠렘 우베하바트 보게딤 일라케두
잠 11:6 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지려니와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11:6
정직한 자 - 5절의 '완전한 자'와 대구를 이루는 동의어로 그 사상과 양심이 하나님의 판단에 비추어 올바른 자를 기리킨다(2:9). 사특한 자 - 3절 주석을 참조하라.
신앙의 길은 평탄하고 안전하여, 우리는 그 길에서 거룩한 안보를 누릴 수 있다.
정직과 은혜의 산 원리는 모든 미심쩍은 경우에 "이것이 그 길이다. 이 길로 행하라"라고 말해 줌으로써 올바른 길을 가리켜 주는 최선의 지시자가 될 것이다.
안내자와 함께 행동하는 자는 올바로 앞을 바라보고 자기 앞의 전도를 잘 관망한다.
정직과 은혜의 산 원리는 모든 그릇된 길에서 우리를 건져주는 최선의 구조자가 될 것이다. "정직한 자의 의"는 그들에게 꿰뚫을 수 없는 견고한 갑옷이 돼 줄 것이어서, 악마와 세앙의 유혹에서 그들을 건져 주며 그 위협에서 구원해 줄 것이다.
악인의 길은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악한 자는 자신의 악으로 인하여 넘어져" 불행과 멸망 속으로 빠져들 것이며, 올무 같은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이스라엘아! 너는 네 스스로를 망케 하였도다." 그들의 죄는 그들의 벌이 될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안출 해 낸 바로 그것이 자기들에게 손해를 입힐 것이다.
7절 베모트 아담 라솨 토바드 티크바 베토헬레트 오님 아바다
잠 11:7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11:7
악인은...소망이 끊어지나니 - 여기서 '소망'은 악인자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세속적인 재물과 감각적 쾌락. 명예를 가리키며(Delitzsch). '끊어지나니'(아바다)는 '잃다', '파멸되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 본 문구는 세속적 가치 추구에 몰두한 악인은 죽음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을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이다(10:28).
한편 70인 역은 본 문구에 이어 '의인이 죽을 때에 그 소망은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첨가해 본절의 대조적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불의의 소망(토헬레트 오님). 문자적 의미는 '(헛된, 거짓된, 슬픈, 괴로운) 자의 소망.' 이러한 원어 상의 다양한 의미로 각 역본들과 학자들 간의 견해가 분분하다.
곧 이 말은 '불의한 자들의 소망'(KJV), '악한 소망'(Hitzig, Kamphausen, Atuart, Zockler), '힘(자기 과신과 교만)이 넘치는 사람들의 소망'(Delitzsch), '슬픔을(호 9:4) 가져오는 소망'(Ewald) 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상반절의 '악인'과 비교할 때 KJV의 번역이 가장 자연스럽다.
비록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사후의 행복이나, 아니면 적어도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큼은 계속 믿고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법이다. 우선자도 거미가 거미줄에 들어앉아 있듯 자신을 휘감고 있는 희망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속물들은 자기 재산으로부터 큰 것을 기대한다. 그는 그것을 "여러 해 동안 쌓아 두고 지낼 수 있는 낙"으로 여긴다.
그리고는 그 재물로 자기 평안을 얻으며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는 그 재물로 자기 평안을 얻으며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죽으면 그들의 소망은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속인들은 자기가 계속 머물러 있기를 기대하던 이 세상에서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며, 위선자들은 그들이 옮겨 가기를 기대하던 그 세상에 다다르기에 부족할 것이다(욥 27:8).
목적 달성의 기쁨을 누릴 것으로 고대하던 바로 그때에 희망이 절망으로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악인들의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경건한 자가 죽으면 그는 자신의 기대 이상으로 얻게 되며 그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악인의 죽으면 그의 기대는 꺾어지고 산산조각이 난다. 바로 그 날에는 그가 즐겨하던 생각도 자취를 감추며 그의 소망도 사라져 버린다.
8절 차디크 미차라 네헬라츠 바야보 라솨 타흐타이브
잠 11: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11:8
의인은...악인은...대신하느니라 - 여기서 '환난'(차라)은 '대적자들에 의한 고통, 역경'을 의미하는 바(LXX), 본절은 의인이 그의 신앙적, 도덕적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악인들의 궤계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대신 그 궤계가 악인들 자신에게 돌아가게 된다는 의미이다(21:18;에 7:10;단 6:24).
한편 델리취(Delitzscn)는 '환난'을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판의 의미로 해석하여 의인은 그 심판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멸망당한다는 종말론적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빠졌다고 생각하던 궁지에서 구출을 받으며 그 발은 큰 방(혹은 풍부한 곳)에 서게 된다(시 66:12; 34:19).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절망하고 그 대적들이 기뻐하며 마치 그들이 광야 속에 갇혀 있는 듯이 보일 때에라도 그들을 구출해 낼 길을 찾아내셨던 것이다. 의인이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데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의인은 환난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을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악한 자들은 자기들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던 궁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궁지는 자기들이 의인들을 몰아넣는 데에 사용하던 것이었으므로, 이렇게 되면 그들은 의인을 위한 몸값으로 그들 대신에 들어가는 것 같다. 모르드개는 교수대에서 구출되었고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베드로는 감옥에서 건져냄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핍박하던 무리들이 "와서 그들을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로부터 구출되었으나 애급인들은 거기 빠져 죽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성도들이 너무나 고귀하기에 그는 사람들을 주어 그들과 바꾸신다(사 43: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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