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구약성경강해

[사무엘하 14장 주석 성경말씀] 압살롬의 예루살렘 귀환(삼하 14:1-33)

성령의 능력 2021. 9. 1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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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무엘하 14장 주석 성경말씀 중에서 압살롬의 예루살렘 귀환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암논이 압살롬의 동생 다말을 강간하자 화가 났습니다. 암몬이 다말을 강간한 후에 버렸습니다. 이것 때문에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초청하여 그의 종들에게 암논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을 피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지나 요압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꾀를 내어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예루살렘 귀환(삼하 14:1-33)

 

=====14:1

요압이...향하는 줄 알고 - 여기에서 '향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전치사는 ''이다. 그런데 이것이 본절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둘로 나뉘어 있다. (1) 혹자는 이 전치사 ''(* )'대적하여' (against)란 뜻으로 이해 항다. 그리하여 요압은 이 상황에서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적개심(敵愾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하였다(Keil,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해석은 지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문법상으로는 '''대적하여' 또는 '싫어하여'란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이러한 해석은 본 문맥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 해석은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분노가 이미 누그러져 있었다고 언급한 13:39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2) 전치사 ''을 '...에게로 향하는'으로 이해하여, 이는 다윗 왕의 자연스러운 부성애를 요압이 발견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Lange). 이 해석은 전후 문맥과 잘 어울린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알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새로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기 때문에, 이 동사 또한 새로운 상황의 변화를 제시하는 본 해석을 지지해 준다. 따라서 본절은, 이제 암논 살해 사건 후 3년이 지나자(13:23-39) 다윗이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압살롬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는 것을 요압이 눈치챘다는 의미라 하겠다(Matthew Henry).

=====14:2

드고아 - 드고아(Tekoah)는 예루살렘 남쪽 16km, 베들레헴 남쪽 8km 지점에 있는 고지대이다. 이곳은 선지자 아모스의 고향이자(1:1), 르호보암의 산성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대하 11:6).

슬기 있는 여인 - 이는 생활의 지혜가 있고 민첩하며 재치 있는 여인을 의미한다. 한편, 이 여인의 거주지인 드고아는 요압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부터 약 2시간 거리였으므로, 아마도 요압은 일찍부터 이 여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Pulipt Commentary, Wycliffe Bible Commentary).

상복을 입고 -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기 위한 분장(扮裝)이다(6).

=====14:3

할 말을 그 입에 넣어주니라 - 요압이 이처럼 압살롬의 사면(赦免)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압살롬이 차기의 왕이 되리라고 믿고 이 시점에서 그의 환심을 얻어 자기의 권력을 확고히 해두기 위함이었다(Leon Wood, Hertzberg). 이런 점에서도 요압은 자기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였음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3:27 ; 11:16). 만일 요압이 다윗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이 있었다면 드고아 여인을 쓰는 대신 나단 선지자에게 이번 일을 부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압은 그리하지 아니하고 그릇된 욕심과 스스로 해 낸 인간적 계책으로 이번 일을 도모하였으니, 그 결과 도리어 압살롬의 반란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15).

=====14:4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 이는 곧 완전한 겸손과 헌신을 나타내는 히브리인들의 인사법이다(50:18 ; 왕하 4:37 ; 대하 20:18). 특히 여기서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이처럼 인사한 것은 왕께 대한 존경과 충성, 완전한 복종을 표시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1:2 ; 9:6).

=====14:5

나는 참 과부니이다 - 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여인의 거짓말이다. 즉 히브리 사회에서 과부는 고아와 더불어 특별한 동정과 보호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 여인은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과부로 가장한 것이다(14:29 ; 10:14 ; 68:5 ; 146:9 ; 1:17 ; 10:2 ; 31:16, 18).

=====14:6

저가 이를 쳐죽인지라 - 여기에서 여인이 설명한 자기 아들의 죽음과 암논의 죽음(13:29)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 전자의 죽음은 쌍방 간의 싸움에서 일어난 과실치사(過失致死)이나 후자의 죽음은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몰래 계획한 모살()이었던 것이다(13:23-29).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러한 질적인 차이는 덮어두고 사건의 결과만을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분명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죄악성을 교묘히 경감시키려는 의도임에 틀림없다. 즉 드고아 여인은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시키기 위해 살해자에게 이롭도록 상황 설명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14:7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 형제끼리 서로 싸우다가 형이 동생을 쳐죽인 것은 물론 처음부터 계획된 살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동기에 있어서 이는 이미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수반된 분명한 살인이다. 따라서 동생을 살해한 형을 죽이겠다는 군중들의 주장은 율법의 규례에 따른 합당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35:16-19).

사자 - 이에 해당하는 '야라쉬'는 '상속하다', '차지하다'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seed)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다른 말로는 '후사'(後嗣)로도 번역할 수 있다.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 여기서 숯불이란 가문(家門)을 이을 남은 아들을 비유한 말이다. 히브리 사회에서 대가 끊어진다는 것은, 그 가문에 속한 기업(基業)상실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무서운 불행으로 간주되었다(21:38). 따라서 이러한 불행은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여인의 비유는 다윗의 나약한 감정을 움직이고도 남을만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드고아 여인이 다윗의 나약한 감정에 호소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의와 진리의 율법을 주목하지 못하도록 본() 비유를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비유의 사용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재발견하도록 비유를 사용했던 나단 선지자의 경우와는 아주 대조적이다(12:1-4)

=====14:8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 이는 다윗 왕이 드고아 여인의 호소를 다 받아들여 그 남은 아들이 죽지 않도록 선처하겠다는 대답이다. 아마도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큰 아들이 동생을 죽인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살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상(情狀)을 참작, 동정을 베풀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6; 35:22-28).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사견(私見)이 압살롬에 대하여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압살롬은 암논을 고의적으로 살해했기 때문이다(13:22-29).

=====14:9

그 죄는 나와 내 아비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 여기서 '그 죄'란 형제를 살해한 아(6)을 벌하지 아니한 죄, 곧 율법의 규정(35:16-19)대로 심판하지 아니한 죄를 의미한다. 즉 드고아 여인은 다윗이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아들을 선처(善處) 주겠다고 하자(8), 행여라도 그로 인해 발생할 불상사는 다윗이 아닌 마땅히 자신과 자신의 집안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공동번역). 따라서 본절은 다시금 "이 살인죄를 벌하지 않은데 대한 잘못은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만 있습니다"고 의역할 수 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408). 그런데 드고아 여인이 이 같은 말을 한 진정한 목적은 분명 압살롬의 범죄의 근원적 책임이 그 부모 곧 다윗에게 있음을 은근히 암시하려는 데 있을 것이다.

=====14:10

네게 말하는 자를... 데려오라 - 이번 일로 인하여 드고아 여인을 기소(起訴)하려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해를 가하려는 자가 있으면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 자신에게로 데려오라는 뜻이다(Wycliffe). 즉 지금 다윗은 국태 민안(國泰民安)에 힘쓸 최고 통치자로서 어려움에 처한 과부를 기꺼이 보호해 주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

=====14:11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사...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 다윗 왕과의 대화에서 세 번째로 드고아 여인을 말하는 장면이다(4-7, 9). 여기서 이 여인은 다시금 다윗 왕의 공정한 판단력을 흩트리고 그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 드고아 여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두 속성인 공의와 사랑 중 공의는 무시하고 사랑만을 강조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 문제에 있어서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

원수 갚는 자 - 히브리어로는 '고엘 하담'으로, 그 뜻은 '피의 보복자'(avenger of blood)이다. 35:19에서는 '피를 보수하는 자'로 번역되었는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을 가리킨다. 율법에 의하면 이들은 억울하게 죽임 당한 친척을 위해 반드시 복수할 의무를 지니도록 되어 있다. 35:12 주석 참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11:11 주석 참조.

머리카락 하나라도...아니하리라 -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맹세는 하나님의 자비만을 생각하고 공의를 무시한 잘못된 맹세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드고아 여인과 군중들(7)의 입장을 다 들어보고 공정하게 판결을 내려야 할 재판장인데도 오직 한쪽 편의 말만을 듣고 섣불리 맹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편벽되기 쉬운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의 맹세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경솔한 맹세였다고 할 수 있다.

=====14:12

여인이 가로되...여쭙게 하옵소서 - 지금까지 얻어낸 다윗 왕의 맹세(8, 10, 11절)를 압살롬의 경우에 적용시키기 위한 드고아 여인의 교묘한 청원이다.

=====14:13

어찌하여...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 같은 도모를 -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을 의미하며 ''이 같은 도모'란 외국에 도피한 압살롬(13:37, 38)을 용서하지 않는 다윗 왕의 처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대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은 긍정적인 의미(toward)가 아닌 부정적 의미(against)를 지닌다(Keil). 라서 본절의 의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슬러 압살롬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나이'가 된다. 즉 이 말은 다시 풀이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다윗 왕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의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유독 왕께서만 압살롬의 죄를 용납하지 아니하나이까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 - 지금까지 다윗 왕이 드고아 여인에게 맹세한 말(8, 10, 11)을 가리킨.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 여기서 '죄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쉠'은 고범죄자(故犯罪者)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부지중에 실수한 경범죄자(輕犯罪者)를 의미한다(4:13, 22, 27 ; 5:2, 3, 17). 따라서 본절의 드고아 여인의 말은 다윗 왕이 압살롬을 돌아오지 못하게 조치하므로 말미암아 왕이 부지중에 백성들의 여론과 반대되는 가벼운 범죄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여인의 말은 적어도 서너 가지 점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다. (1) 자신의 비(6,7)를 압살롬 사건(13:23-29)과 일치시켜 다윗을 정죄한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점,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을 다윗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는 점, (3) 다윗이 압살롬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암논을 죽인 후 압살롬 스스로가 도망쳤다는 점 등이다.

그 내어 쫓긴 자 - 이는 그술에 도피해 있는 압살롬(13:37, 38)을 은연중 지칭하는 말이다. 즉 드고아 여인은 지금 압살롬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여인이 우회적으로 압살롬을 표현한 것은, 아마도 어떻게 해서든 사건의 진상을 덮어두고 다윗 왕의 약한 감정만을 움직여 압살롬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였을 것이다(Ewald, Lange).

=====14:14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같을 것이오나 - 본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간에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1) 이 말은 암논의 죽음(13:28, 29)과 관련된 말이라는 견해이다(Thenius). 즉 본절은, 이미 한번 죽은 암논은 쏟아버린 물처럼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고아 여인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2) 그러나 본절은 그보다 죽음의 일반적인 특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이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죽으리니'란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아직 완료되지 아니한 사실, 곧 일반적인 진리를 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첫째, 죽음이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며, 둘째, 죽음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종말적인 일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드고아 여인이 의도하는 바가 분명히 드러난다. 즉 이 여인은 본절에서 압살롬도 인간이므로 반드시 죽을 것이며, 일단 그가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므로 압살롬이 죽기 전에 그를 용서하라고 다윗 왕에게 넌지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과도 문맥상 잘 어울린다.

하나님은...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 드고아 여인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사를 언급한 것으로, 앞 구절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다. ,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나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을 용서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이 곧 이 여인의 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틀림없이 다윗으로 하여금 죽을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은 바 있었던 자신의 과거(12:13)를 기억나게 하였을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한편, 이와 같은 드고아 여인의 말은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 주는 매우 고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압살롬에게 적용하기에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윗 왕의 경우와는 달리 압살롬의 경우에는 죄를 범한 당사자가 회개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드고아 여인 역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다만 요압의 분부를 좇아(1-3) 이러한 말을 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절 주석 참조.

=====14:15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 즉 동생을 죽인 형(6)을 율법에 따라 벌하지 아니하고 감싼 데 대하여, 백성들이 자기를 핍박하며 살인자를 내어 놓으라고 위협했다(7) 드고아 여인의 진술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금껏 애기한 비유(5-7)를 실제의 일인 양 가장, 다윗을 속이려 든 여인의 강변(强辯) 일뿐이다.

=====14:15-17

드고아 여인이 자기가 왕께 찾아온 동기가 순수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 , 이 여인은 단지 자기 자신의 괴로운 문제 때문에 다윗에게 찾아와 호소한 것이지 다른 속셈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여인은 (1) 자신이 백성들로부터 살인한 아들을 처벌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었으며(15), (2) 자신이 다윗의 지혜와 수완을 크게 믿고 있었다는 사실(16,17)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드고아 여인이 자기가 다윗에게 나아온 동기에 대하여 불필요하게 변명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압살롬의 사면(赦免)을 우회적으로 요청한(13, 14) 자신의 의도가 지나치게 다윗 왕에게 노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14:16

하나님의 산업 - '하나님의 산업'이란 본래 이스라엘 민족(Keil)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약속의 깡 가나안(Hertzberg)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다윗 왕과 그의 왕조를 은연중 가리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Hertzberg). 즉, 드고아 여인은 자기와 자기 아들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는 현상을 은연중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불행한 일에다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드고아 여인은 자기가 다윗을 찾아온 동기를 변명하고 있는 과정에서 조차 자신의 참된 의도를 은밀히 시사하고 있다.

=====14:17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레아크 엘로힘'은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천사'를 의미한다(28:12 ; 31:11 ; 32:1, 3 ; 22:24 ; 2:1, 4 ; 5:23). 따라서 본절은 드고아 여인이 다윗 왕을, 신적 권위를 부여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천사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다윗 왕은 천사도 아니고 천사와 같은 지혜와 공정한 능력도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는 드고아 여인이 어떻게 해서든 다윗 왕의 이성(理性)을 흐리게 하기 위한 아첨의 말이었다 하겠다. 사실 아첨은 듣는 이의 판단력을 굽게 만드는 독약과 같은 효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26:28 ; 29:5 ; 12:21-23).

=====14:18

내가 네게 묻는 것을 숨기지 말라 - 왕이 드고아 여인 불필요한 변명과 낯간지러운 아첨을 듣고 난 다윗이 이제야 여인의 진정한 의도를 눈치챘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

=====14:19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 다윗 왕이 드고아 여인에게 이와 같이 캐물은 까닭은 아마 한갓 여인으로서는 이처럼 엄청난 일을 꾸미기 힘들리라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다윗이 여인의 말을 듣는 중 그 배후에 요압의 술수가 있으리라고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 요압은 일찍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자인 동시에 지략가였으므로, 다윗 왕은 이번에도 그가 자기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술수를 부렸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3:27 ; 11:16).

왕의 말씀을...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 다윗 왕의 말이 조금도 틀림이 없이 정곡(正鵠)을 찔렀다는 뜻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드고아 여인의 이와 같은 말은 다윗 왕의 지혜와 현명함에 대한 지나친 칭찬으로 이는 자기에게 있게 될지도 모르는 다윗 왕의 진노를 조금이라도 진정시켜 보려 한 아부성 발언이었음에 다름 아니다.

=====14:20

이 일이 형편을 변하려 하여 - '이 일의 형편'이란 압살롬이 그술 땅으로 도망쳐 그곳에 있은지 삼 년째이며(13:37, 38) 다윗은 아직도 압살롬을 사면(赦免)하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은 현재의 상황을 가리킨다.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 여기서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레츠'는 온 세상, 또는 세계를 의미한다(9:13 ; 10:8, 25 ; 4:26 ; 대하 36:23 ; 1:2 ; 1:8 ; 2:3). 따라서 드고아 여인의 이 말은 다윗 왕의 조그마한 통찰력을 하나님의 전지한 능력에다 비유한 엄청난 과장(誇張)이다. 즉 드고아 여인은 17, 19절에 이어 계속해서 아첨을 늘어놓음으로써 다윗의 환심을 사려 꾀하고 있는 것이다.

=====14:21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 본절은 원문을 상당히 의역한 것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는 '네가 이 일을 이미 이루었다'는 뜻이 된다. 즉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는 이미 너의 계획에 동의를 하였으니 이 일은 다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는 의미이다.

=====14:22

조의 구함을 허락하시니 - 이 말은 요압이 지혜로운 가인을 통해(1-3) 다윗에게 구한 내용을 이제 다윗이 허락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우리는 본절에 의거 요압이 압살롬의 사면을 위해 지금껏 왕께 간청해 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Lange, Keil). 왜냐하면 여기서 '종의 구함'이란 말은 요압이 드고아 여인을 통해 다윗에게 직접 드린 간구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만일 이 같은 추측이 사실이라면 다윗이 드고아 여인에게 던졌던 물음(19)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이처럼 요압이 이전부터 압살롬의 사면을 간청해 왔기 때문에, 아마도 다윗 왕은 드고아 여인의 비유와 얘기(4-17)를 다 듣고 나서는 그 배후에 요압의 술수가 작용한 것으로 쉽게 확인했을 것이다(Lange).

=====14:23

그술 - 이스라엘 북쪽에 인접한 아람 소국(小國) 중 하나이다. 13:37 주석 참조.

=====14:24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 이는 단지 다윗 왕이 압살롬을 자기의 궁전에 돌아오지 못하게 함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금(軟禁) 조치를 취한 것이다. 즉 이로써 다윗 왕은 아직도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 표명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압살롬에게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Lange). 한편 혹자는 이러한 다윗 왕의 조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 , 다윗 왕은 일단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상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어야 옳았다는 주장이다(Payne, Keil).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악독한 죄악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앞으로 백성들을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의 이번 조치는 비록 최선책은 아닐지라도 마땅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Lange, Patrick). 아무튼 이처럼 다윗과 압살롬 간에 형성된 껄끄러운 관계는 결국 압살롬으로 하여금 부친에 대한 미움과 반역이라는 새로운 죄악을 저지르게 하였다(15).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에 예고한 징벌이 어떤 식으로 하나하나 성취되어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12:10-12).

=====14:25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 이는 단지 다윗 왕이 압살롬을 자기의 궁전에 돌아오지 못하게 함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금(軟禁) 조치를 취한 것이다. 즉 이로써 다윗 왕은 아직도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 표명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압살롬에게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Lange). 한편 혹자는 이러한 다윗 왕의 조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 , 다윗 왕은 일단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상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어야 옳았다는 주장이다(Payne, Keil).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악독한 죄악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앞으로 백성들을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의 이번 조치는 비록 최선책은 아닐지라도 마땅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Lange, Patrick). 아무튼 이처럼 다윗과 압살롬 간에 형성된 껄끄러운 관계는 결국 압살롬으로 하여금 부친에 대한 미움과 반역이라는 새로운 죄악을 저지르게 하였다(15).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에 예고한 징벌이 어떤 식으로 하나하나 성취되어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12:10-12).

=====14:25-27

갑작스럽게 문맥이 바뀌어 압살롬의 신상(身上)이 언급되고 있는 부분이다. 추측컨대 이는 후에 있을 압살롬의 반역(15)과 관련, 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자랑거리인 머리털이 도리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음(18:9-15)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인 듯하다. 본장 25-33절 강해 '잘못된 자랑거리' 참조.

=====14:26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 이는 압살롬의 머리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말이다. 시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머리털은 힘과 미()의 상징이었으며(Eerdmann), 그것이 빨리 자란다는 것은 힘의 왕성함(16:17)을 의미하는 것이었다(Keil). 또한 숱이 많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지니는 것으로서, 자신의 신비로움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의 머리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사실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압살롬은 후에 그의 자랑거리인 머리털로 말미암아 죽었으니, 세상 자랑거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18:9).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 율법에는 머리털을 깎되 민머리로 완전히 깎는 것은 엄히 금지되어 있다(19:27 ; 9:26 ; 25:23 ; 49:32). 왜냐하면 고대 사회의 이방인들이 자기의 머리를 길게 기른 다음 민머리도 완전히 잘라 그것을 사당(祠堂)바치곤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율법의 규정에 따라 머리를 지나치게 기르지도 아니하였고(나실인은 제외) 민머리로 깍지도 않았으며 축제일에 적당히 깎곤 하였다. 그리고 그때 깎은 머리털은 무게를 달아 은()으로 바꾸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곤 하였다(Wycliffe). 아마도 본절에서 압살롬이 머리털을 깎아 무게를 달았다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관습에 기인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 - 여기서 왕의 저울로 계산한 세겔(Sheckl)이란 곧 '왕실 세겔'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 사회에서 무게를 측정하던 기본 단위는 세겔인데 이에는 '보통 세겔''왕실 세겔', '성소 세겔'이 있었다. 그중 왕실 세겔은 보통 세겔의 1/5을 더한 중량이었다. 한편 보통 세겔의 경우 한 세겔은 11.4g이므로 이백 세겔은 약 2.3kg에 해당되는 무게이다. 보통 사람의 머리털이 1년 동안 자랄 수 있는 평균 무게인 약 500g과 비교해 볼 때 이는 엄청난 무게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혹자는 이 수치가 필사자의 착오에 의한 오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ange). 그러나 고대의 모든 역본들(Targum, the Syriac Peshitta, Vulgate, LXX)이 한결같이 같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수치를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Keil). 구약 총론,

=====14:27

아들 셋...낳았는데 - 여기서 압살롬의 세 아들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까닭은 이들이 모두 조사(早死)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18:18의 압살롬이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어 한탄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에 의해 분명히 뒷받침된다.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 압살롬이 딸의 이름을 다말(Tamar)이라고 지은 것은 암논에게 추행당한 자기의 불행한 누이동생 다말(13:1-14)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이는 아마도 압살롬의 딸이 그의 누이동생을 많이 닮았거나(Pulpit Commentary), 아니면 압살롬이 누이동생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한편, 70인 역(LXX)에는 "(다말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아내가 되어 그 아들 아비얌을 낳았다"란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르호보암의 아내이자 아비얌의 어머니는 마아가(Maachah)라고 기록되어 있는 왕상 15:2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70인 역의 첨가 구절은 신빙성이 없다(Wycliffe, Keil, Lange).

=====14:28,29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 그 술에서 삼 년 동안이나 망명 생활을 하고 왔는데도(13:38) 또다시 예루살렘에서 2년 동안이나 연금 상태에 있게 되자(24절 주석 참조), 압살롬이 자기의 불행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압을 이용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요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좋지 못한 감정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Lange).

=====14:30,31

그 밭에 불을 놓았더니 - 압살롬의 이와 같은 행위는 요압의 방관적인 태도(29)에 대한 보복적 행위이자, 또한 요압을 억지로라도 자기에게 오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압살롬의 고의적 행위는 자칫 엄청난 화재(火災)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아주 위험스러운 악행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압살롬은 지금까지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뉘우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자신의 불편한 처지만을 불평해 왔음을 알 수 있다(Payne).

=====14:32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 본절은 아버지 다윗 왕에 대한 압살롬의 오만불손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 압살롬은 자기가 이스라엘 땅에서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부자지간의 정을 끊어버리고라도 그술에 가서 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하는 불효 막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압살롬의 자숙하는 기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에게 도피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은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그술로서, 이 나라는 일찍이 다윗 왕이 정략결혼을 통하여 화친을 맺은 나라이다(3:3 ; 13:37,38). 따라서 다윗 왕은 압살롬의 반란의 가능성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은 셈이라 할 수 있다. 즉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일반적 자연법칙인,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씨를 뿌린 결과 이제 그 악의 열매를 하나하나 거두고 있는 것이다(6:7).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가하니라 -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압살롬의 이 말은 다윗의 면전에서 자기 죄의 유무를 따져 법에 따라 처벌받겠다고 하는 겸손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Pulpit Commentary, Keil). 오히려 이는 오만불손하게도 자신의 살인 행위(13:28, 29)가 정당한 행위인 양 자신의 무죄를 정당히 표현한 것이다(Payne,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 압살롬은 암논의 추행(13:4)에 자기라도 나서서 암논을 죽인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의 죄는 일체 부정하고 오히려 아버지 다윗에게 죄가 있는 양, 모든 상황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해하려 드는 극단적인 사고(思考)의 좋은 예이다.

=====14:33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는 행위는 신하가 왕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취해야 하는 예절이다(4절 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는 그가 다윗 왕을 진심으로 존경했다는 표시가 결코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요압(3:27 ; 20:9, 10)이나 가룟 유다(26:48)의 경우와 같은 가식적인 예절만을 갖추었을 뿐, 마음속에는 오히려 다윗 왕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15).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 여기서 입을 맞추는 행위는 화해의 표시로서, 특히 아버지가 범죄 한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그를 완전히 용서한다는 표시이다(33:4 ; 45:15 ; 눅 15:20). 이로 보아 우리는 이제 다윗 왕이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윗 왕의 이러한 조치는 지금껏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조금도 회개하지 않는 압살롬을 단지 자식에 대한 부(父情) 때문에 용납한 어리석은 행위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이로 말미암아 압살롬이 차기 왕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백성에게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반역적 활동(15:1-12)을 사실상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Payne). 결국 다윗 왕은 여기서 압살롬의 반란을 허용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인간적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되, 항상 공명 정대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레미야 성경말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른 유다 백성(렘 2:1-37)

 

[예레미야 성경말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른 유다백성(렘 2:1-37)

안녕하세요. 오늘은 예레미야 성경말씀 중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른 유다 백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징계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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