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1장에서는 그레데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도에게 바울이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장로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를 피택하여 세우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믿음도 중요하지만 인간성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가 되어 성도의 모범이 되지 못하면 교회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 장로를 세울 때에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짓 교사를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단들이 교회에 침투하여 거짓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자기의 의를 나타내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장로의 자격(딛 1:1-16)
1-4절, 사도의 직무
[1-2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 . . .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한다. 바울이 자신을 먼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인다. 그 관계는 복종 관계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 명칭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낸다. 바울은 자유자이었지만, 자원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사실상 친구 관계가 아니고 복종 관계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흙이요 티끌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할 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창 18:27).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요 바른 고백이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인생이 자신의 피조물 됨을 바로 알 때 생긴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을 모르는 데서 생기는 어리석은 악이다.
더욱이, 구속(救贖)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어야 마땅했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크신 긍휼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꺼이 복종하며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복종에는 ‘왜 그렇습니까?’라든가 ‘내 생각에는 다릅니다’ 등의 말이 필요치 않고 합당치 않다. 복종에는 오직 침묵이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복종해야 한다. 바울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요 더욱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된 그의 백성이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이다(롬 6:22).
바울은 또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증거 한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보내신 자의 뜻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는 오직 그를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말하고 그의 명령대로 행동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말한다. 그가 사도가 된 목적은 세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엡 1:4). 그는 오직 자신의 긍휼과 은혜의 뜻을 따라 그들을 택하셨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택한 자들을 위해 피 흘려 구속(救贖)하셨고 성령께서는 그들을 다 중생(重生)시키신다.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속죄의 주로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죄인들은 그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이를 것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요한복음 3:36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둘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해서이었다.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인간이 죄와 심판 아래 있다는 지식,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에 관한 지식, 종말에 관한 지식을 포함한다. ‘경건함에 속한’이라는 원어는 ‘경건함에 일치하는’ 혹은 ‘경건함에 이르는’이라는 뜻이다. 진리의 지식은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고 경건함에 맞는 지식, 경건으로 나타나는 지식이다. 지식이 중요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 된다(요 17:3).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벧후 3:18).
셋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었다. 영생은 인생의 최대의 소원이다. 누구나 장수(長壽)하기를 원한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허무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 자체이시므로 하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죽지 않고 영생하게 하실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존재이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사함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미 원리적으로 성도들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그들은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복이며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소망이다.
[2-3절]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신,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실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믿을 만하시다. 인간에게는 거짓됨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지극히 작은 거짓도 없으시다. 만일 하나님께 거짓이 있으시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아무도 공경하지 않을 것이며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므로 참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약속하셨다. ‘영원한 때 전부터’라는 원어(프로 크로논 아니오니온)는 ‘오래 전부터’라는 의미도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및 선지자들에게 영생을 약속 혹은 암시하셨다.
그러다가 이제 때가 되었다. ‘자기 때에’라는 원어(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는 ‘자기 자신의 적절한 때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시간표가 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적절한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았으나 100세에 아들을, 그것도 한 명의 아들을 받았다. 요셉은 17세에 한 계시적 꿈을 꾸었지만,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될 때에 그 꿈이 실현되었다. 다윗은 아마 15세쯤에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삼상 17:13), 30세가 되어 왕이 되었다(삼하 5:4, 5).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조급하게 생각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다. 그 말씀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그 말씀은 진리이며 구원과 영생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전도’(케뤼그마) 곧 선포 혹은 설교라는 방법을 통하여 나타내셨다. 또 이 전도 혹은 설교의 일은 바울에게 그리고 사도들과 목사들에게 맡겨졌다. 이것이 사도들과 목사들의 직무이다. 전도 혹은 설교는 일차적으로 사도들과 목사들에게 맡겨진 직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성도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택한 백성을 다 찾아 구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이것은 전도자들뿐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책임을 느껴야 할 일이다. 전도는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를 위해 헌금해야 한다. 예배당도 이 일을 위해 의미가 있을 뿐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하신 일인 전도에 다 참여하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4절]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긍휼과](전통본문)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우리가 가진 믿음을 ‘같은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같은 믿음’이라는 원어(코이네 피스티스)는 ‘공통적 믿음, 함께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 공통적 믿음이 피부 색깔, 언어, 지방, 사회적 신분, 학력, 빈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 끈이다. 이 공통적 신앙이 바로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옛신앙’ 곧 성경적 신앙이다. 오늘날에는 이 신앙이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공통적 믿음은 교회의 기초이므로 이 믿음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 우리는 이 공통적 믿음을 성경 속에서 그리고 바른 신앙의 전통 속에서 확인하고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영생의 소망 안에서 항상 주님을 섬겨야 한다.
바울은 같은 믿음 즉 공통적 믿음을 따라 된 그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기원하였다. 사도의 서신에서 항상 나오는 이 기원의 말은 의미심장하고 복된 말이다. ‘은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의 은혜이며, ‘평강’ 즉 ‘평안’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에 근거하여 누리는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 그리고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이미 받았고 또 항상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1절부터 4절까지의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가지자. 그 믿음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이다. 그것은 ‘공통적 믿음’ 즉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한 진리 지식을 가지자. 불경건한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나타나는 죽은 지식 말고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경건함을 가진 진리의 지식을 가지자.
셋째로,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가지자.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복은 영생이다. 그것은 성도의 복된 소망이다. 세상은 늙고 병들고 죽는 절망의 세상이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다. 우리는 그 복된 소망을 가지자.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이미 받았고 또 항상 사모하며 풍성하게 받아 누리자.
5-9절, 장로의 자격
[5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본문은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를 말한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것’은 교리 사상의 면에서나 교회 행정과 질서의 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의 사역자들은 신앙 지식에서나 교회 행정에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했다. ‘장로’라는 원어(프레스뷔테로스)는 ‘나이가 더 든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신약교회의 감독의 직분자를 위해 사용되었다. ‘장로들’이라는 말은 한 교회에 장로가 적어도 두 명 이상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한 사람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지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6절부터 9절까지는 장로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3장의 말씀과 같다.
무엇보다,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것은 교리사상이나 행위에 있어서 온전한 자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을 인도할 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인격, 곧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행실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장로는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이 말씀은 일부일처(一夫一妻)가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신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다. 결혼한 자는 부부 관계와 결혼 서약에 충실해야 한다. 가정에서 부부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좋은 인격이 아닐 것이다.
장로는 또한 신실한 자녀들을 둔 자라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한 자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은 그 자녀들을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라고 표현하였다. 방탕은 자신의 의무나 책임, 삶의 목표 등을 잊어버리고 술과 음행 등 육신의 쾌락에 빠진 것을 말한다. 불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부모에 대해 다 적용된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는 경건함과 거룩함, 선함과 진실함과 단정함이다. 바른 신앙교육은 경건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을 만들 것이며, 그것은 믿음의 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부모라면 자녀를 성경말씀으로 바르게 충실하게 가르치며 믿음으로 양육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자녀들은 믿음 있는 자녀가 될 것이다. 자녀를 보면, 그 부모의 신앙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7-9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신약성경에서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직분이며 그 둘이 차등하다는 암시는 없다. ‘감독’이라는 말(에피스코포스)은 ‘돌아보는 자, 보살피는 자, 감시하는 자’라는 뜻이다. 감독은 교회를 돌아보고 보살피며 교인들이 바른 믿음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직분이라고 볼 수 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 곧 교회의 관리자이다. 그것은 교회의 재산이나 재정을 감독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자이다. 그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는지 살피는 것이다.
한번 더, 본문은 감독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함을 언급한다. 그는 사상에서나 행위에서나 결함이 없어야 한다. 그는 흠 없는 온전한 신앙 인격자이어야 한다. 이 점이 반복해서 강조된다.
장로는 또한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라야 한다. 바른 신앙인은 자기 뜻대로 무엇을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성경의 가르침대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존중할 것이다.
장로는 또한 급히 분내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사람은 성냄으로 실수하기 쉽고 선한 일을 어그러뜨리기 쉽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 사람에게 정당한 의분(義憤)은 필요하고 비진리와 불의를 볼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깊이 생각한 후에 해야 하며, 오직 진리와 의를 위해서만 해야 하고,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하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로는 또한 술을 즐기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술을 즐기는 자는 술취하게 될 것이다. 술취함은 사람으로 실수하고 범죄하게 한다. 성경은 술취함을 명백히 정죄한다(고전 6:9-10; 갈 5:21; 엡 5:18).
장로는 또한 구타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성경이 명령하는 바이지만(잠 13:24; 22:15; 23:13, 14; 29:17), 그런 경우에도 격한 감정을 가지고 또 비열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되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인격적이게 해야 한다.
장로는 또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더러운 이’는 정당하지 않는 소득을 말한다. 성도는 고리대금이나 투기성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우리는 게으르게 먹으려 하지 말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려 해야 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회 헌금을 정확하고 깨끗하게 관리하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
장로는 또한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는 이기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남과 나눌 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한다.
장로는 또한 선을 좋아하는 자이어야 한다. 온전한 인격은 선한 인격이며 선을 좋아하는 인격이다. 선행은 참 믿음의 열매이다.
장로는 또한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는 자이어야 한다. 근신하는 것은 정신을 차려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의로운 것은 성경과 양심에 비추어 정정당당한 것이다. 거룩한 것은 죄와 불결을 버린 것을 말한다. 절제하는 것은 술이나 육신적 쾌락을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라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
장로는 또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굳게 붙드는 자이어야 한다. 9절을 다시 번역하면, “가르침을 받은 대로의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이다. 그래야 그가 다른 이들을 교훈하고 권면할 수 있고 또 바른 교훈을 거슬러 말하는 자를 책망할 수 있다.
5절부터 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장로들 즉 감독들은 교회를 돌아보고 교인들을 보살피는 직분자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신앙 지식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 권면할 수 있고 말씀을 거스르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다. 이런 자가 교회의 장로가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우리 모든 성도의 성화의 목표이다. 우리 모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믿고 소망하고 실천하자.
10-16절, 복종치 않는 자들
[10-11절]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당시 그레데섬의 각 성의 교회들에는(5절)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복종은 성도의 미덕이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성경적 교훈에 복종해야 한다. 복종치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대항하는 악이다. 또 헛된 말은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헛된 말을 가리킨다. 또 속이는 것은 마귀적인 죄악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모든 거짓말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되고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계 21:8; 22:15).
그런데 당시 교회들 안에 이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이 당시 교회들의 현실이었다. 특히 할례당 가운데 심했다. ‘할례당’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은혜의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진리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이 있는 자는 복종하는 자가 될 것이다. 땅 위의 교회들은 옛부터 문제가 많은 불완전한 교회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지식과 성화가 불완전하며 사탄의 활동이 맹렬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고 있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세상의 이익이 삶의 전부이다. 돈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다.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친다’는 말은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참된 교사는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지만, 악한 교사는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 결과, 그들은 집들을 온통 엎드러쳤다. 즉 그들은 믿는 가정들의 믿음을 어지럽히고 파괴시켰다. 아마 그들은 집집마다 방문하며 그런 일을 했을지 모른다. 말의 영향력은 크다. 좋은 말은 좋은 영향을 주지만, 나쁜 말은 나쁜 영향을 준다. 이단은 누룩같이 퍼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희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불순종의 말, 헛된 말, 속이는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말이 교회 안에서 퍼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교회에 앞세우지 말아야 하고, 그런 자는 교회의 직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오직 순종의 말, 가치 있는 말, 진실한 말, 해야 할 말만 해야 한다.
[12-14절]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레데인의 한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레데인의 풍습과 기질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남을 해치는 악한 자들이며 먹기를 좋아하고 게으름쟁이였다. 좋은 풍습이든지 나쁜 풍습이든지 사회 분위기는 그 사회의 사람들의 기질을 형성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백성이 있는 반면,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백성이 있다. 근면한 백성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백성이 있다. 그레데인들은 대체로 거짓되며 악하며 게을렀다. 그레데 교인들도 그런 기질을 벗어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 교인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말한다. 아첨은 상대방의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만, 책망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성경은, 훈계를 듣는 것이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며 목의 금사슬이라고 말했고(잠 1:8, 9),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했다(잠 27:5). 우리는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책망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책망을 통해 잘못을 고치고 바른 신앙 인격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들과,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잘못된 말을 듣는 것은 신앙을 해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망을 통해 그런 일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15-16절]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음식물에 있어서도 더러운 것이 따로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아직도 죄와 불결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대로 여전히 음식물들 중에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상 그들의 생각과 양심이 더러운 것이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公言)하지만, 행위로 하나님을 부정했다. 그들은 말과 행위, 신앙고백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았다.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는 말과 행위가 일치하고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고백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가증한 일이었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였더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안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부인하니,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이었다. 신앙의 결과는 선행이다. 물론 모든 선행이 다 참된 신앙의 증거는 아니다. 참된 신앙이 없이도 어느 정도의 선행이 가능해 보인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많은 선행을 하였다. 그러나 믿는 세계에서는 선행이 신앙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는 이가 선한 일을 버린다면 그는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닐 것이다.
10절로 1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한 자들을 분별하자. 그들은 진리에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며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친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하고 복종치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분별하자.
둘째로, 우리는 그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엄히 꾸짖어야 한다. 11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13절,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우리는 악한 자들의 악행을 분별하고 확증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그들이 그런 악한 말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믿음을 온전케 하고, 진리를 배반하는 이런 악한 자들의 말을 좇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바른 진리의 지식과 믿음을 견고하게 가지고 있으면 모든 헛되고 거짓된 말에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 성경 좋은 말씀] 성도의 결혼 생활(고전 7: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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