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서 19장에서는 재물와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는 사람마다 친구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악한 자를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잠언서를 주셔서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노, 아내, 구제, 인자(仁慈)(잠 19:1-29)
1-4절, 완전함, 지식, 미련함, 재물
[1절] 성실히[완전하게]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성실히’라는 원어(베숨모)는 ‘자신의 완전함에’ 즉 ‘완전하게’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맞는 도덕적 완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도덕적 완전을 명하신다.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자(타밈)이었고(창 6:9), 욥도 순전한 자(탐)이었다(욥 1:1). 사도 바울은 성도의 영적 성장의 모범인 감독의 자격요건이 첫째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말하였다(딤전 3:2).
본문은 도덕성을 가진 자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가치 있는 인생임을 보인다. 인간의 가치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가난한 자는 가치가 적거나 가치가 없는 인생이 아니다. 재물의 많음은 인간의 가치에 무엇을 더해주지 못한다. 인간의 가치는 실상 그의 경건성과 도덕성에 있다. 경건과 의는 인생이 추구해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본문은 성실히 행하는 자를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와 비교한다. 입술이 패려한 자는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바르지 않은 말, 악하고 불순종적인 말, 불평, 원망의 말, 거짓된 말을 하는 자이다. 그는 미련한 자이다. 그는 믿음이 없는 자요 도덕적으로 악한 자이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다. 주의 말씀대로,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낸다(마 12:34-35).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인격자이다(약 3:2). 우리는 비록 경제적으로 가난할지라도 도덕적으로 바르고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2절] 지식 없는 소원[영혼]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범죄하느니라].
‘소원’이라는 원어(네페쉬)는 ‘영혼’이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옛날 영어성경(KJV)은 “영혼은 지식이 없으면 좋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범죄하느니라”고 번역하였다.
영혼은 지식이 없으면 좋지 못하다. 사람은 밥만 먹고사는 육신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단지 육신의 감정이나 욕구에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영혼은 지식이 필요하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지식, 경건과 의와 선에 대한 지식, 죄와 구원과 내세에 대한 지식 등이 필요하다. 물론, 참 지식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껴지고 행위로 나타난다.
호세아 4:6에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고, 호세아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하였고(호 6:3), 하나님께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다(호 6:6). 영혼은 참 지식이 필요하다.
본문은 또 발이 급한 사람은 범죄한다고 말한다. 발이 급한 자는 부지런한 자를 가리키지 않고, 행동이 생각보다 앞서는 성급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는 미련하다. 잠언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발이 급한 자는 실수하고 범죄한다. 또 그런 자는 궁핍케 된다. 잠언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성도는 범사에 조급하지 말고, 지식을 가지고 신중히 생각하고 바르게 판단한 후에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의 이중적 범죄를 증거한다. 하나는 자기 길을 굽게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미련한 자는 자기 길을 굽게 한다. 길은 행위를 가리킨다. 미련한 자는 인생의 정로인 의의 길에서 벗어난다. 그의 삶은 비뚤어진 삶, 탈선된 삶, 곧 불의한 삶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 계명을 무시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과 주관과 고집대로 사는 자기중심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자이다.
미련한 자는 또한 그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한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며 그에게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미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불경건이다. 사람은 경건해야 선을 행하는 법이며, 하나님을 경외치 않으므로 악을 행하는 것이다. 불경건과 불의, 이것이 죄인들의 모습이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할 때, 이전에 애굽 땅에서 떡을 배불리 먹던 때와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를 기억하며 원망하며 불평하였다(출 15:2-3; 17:3). 또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열두 정탐꾼을 보내고 그들 중 열 명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들었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믿지 않고 밤새도록 통곡하여 원망하였다(민 14: 1-2, 1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원망과 멸망을 본을 삼아 원망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0:10).
[4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넓은 의미에서 친구란 친하게 지내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보다 더 친밀하게 어릴 때부터 한 가정에서 자란 형제가 있고, 사귄 지 오래된 친구도 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한 가족인 영적, 신앙적 형제들인 교우(敎友)들이 있다.
본문은 재물이 있으면 친구들도 많아진다고 말한다. 잠언 14:20도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고 말한다. 세상의 친구들은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난하면 친구가 떨어진다. 돈 떨어지면 친구도 떨어진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또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부잣집 아이와 친구가 되려 하는 것 같다. 순수한 친구는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신앙적 친구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친구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이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주께서는 또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3:8). 바울도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고 말하였다(엡 2:19). 신앙적 친구는 바른 교훈 안에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또 책망도 하는 친구, 어려울 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이다. 사도 바울은,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하였다(살전 5:14).
우리는 인간의 가치가 재물의 많음에 있지 않고 경건과 도덕성에 있음을 알고 경건과 의를 삶의 목표로 삼고(마 6:33) 바르고 선한 말을 하자.
우리는 지식을 귀히 여기며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기를 힘쓰자. 또 우리는 범사에 지식을 가지고 신중히 생각한 후 말하고 행동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경외하고 악을 버리며 인생의 정로, 즉 의의 길, 선한 길을 걷자.
우리는 물질적 이익을 위해 사귀는 세상적 친구가 되지 말고, 그런 것을 초월하고 신앙적 권면과 위로를 주고 기도하는 신앙적 친구가 되자.
5-8절, 거짓말, 선물, 가난, 지혜
[5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거짓 증인은 보통 자기의 이익을 구하며 남에게 악을 행하는 자이다. 그는 남의 명예를 훼손하고 남의 재산을 손실케 하고 남의 생명을 해한다. 거짓말은 하나님 앞에서 큰 악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9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다. 잠언 6:16-19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6, 7가지의 죄들 중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들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신명기 19:16-19에 보면, 위증 즉 거짓 증거하는 자는 그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여 확인되면 그가 그 형제에게 하려 했던 그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명령되었고 또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고 말하였다. 공의의 보응을 명한 것이다. 거짓말은 지옥 갈 죄악이며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악이다. 요한계시록 21:8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였고, 요한계시록 21:27은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였고, 22:15도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천국 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거짓은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고 마귀의 속성이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는 거짓된 속성이 있다. 예레미야 17:9에서 하나님께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거짓을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배척해야 한다. 거짓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하고 자기 합리화에 사용되지 않게 해야 한다. 선의의 거짓말에 익숙하면 보통 거짓말도 잘 할 것이다. 그런 자는 거짓말하는 습관이 생기고 중요한 거짓말도 하기 쉬울 것이다.
[6절]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너그러운’이라는 원어(나디브)는 ‘존귀한, 고상한, 너그러운’이라는 뜻을 가진다(BDB). 이 말은 사회적 신분 뿐만 아니라, 인격의 고상함과 너그러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자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다. 또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친구가 되려 하는 사람이 많다.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도 단지 물질적 여유를 가진 자가 아니고 심령의 선함과 너그러움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물질적 여유를 가지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것은 복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사람이 그의 계명을 순종하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신 28:13). 성경의 훌륭한 인물들 중에는 그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의인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이었고(욥 1:3), 요셉은 애굽의 총리(창 41:43),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삼하 5:4-5), 다니엘은 메데 파사의 총리가 되었다(단 6:1-2).
그러나 심령과 인격이 천박하지 않고 고상한 것은 더 값지고 복되다. 무엇이 천박하지 않고 고상함인가? 불경건하거나 죄악되거나 이기적이거나 인색하거나 인정 없는 것이 아니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너그럽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 고상함이다. 디모데전서는 장로의 자격으로 ‘아담함’(코스미오스) 즉 ‘존경할 만함’을 들었고, 집사의 자격과, 또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의 자격으로 ‘단정함’(셈노스) 즉 ‘고상함, 존경할 만함’을 들었다(딤전 3:2, 8, 11). 모세는 온유하였다(민 12:3). 사도 바울은 온유와 너그러움을 교훈하였고(빌 4:5), 또 주의 종들이 온유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딤후 2:24).
[7절] 가난한 자는 그 [모든]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가난한 자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거처할 곳이 없는 자이다. 본문은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는다고 말한다. 원문에는 ‘그 모든 형제들에게’라고 되어 있다. 대략적인 표현이다. 예외는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의 설움이다. 가난한 것도 슬픈데, 모든 형제에게 미움을 받으니 더욱 슬플 것이다.
본문은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고 말한다. 한 집에서 자라며 한 밥상에서 밥을 먹던 형제들도 그를 미워하는데, 친구들이야 오죽하랴! 그들은 따라가며 말을 붙이려 해도 상대도 해주지 않고 가버린다.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의 가치를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한다. 심지어 교인들도 그러하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인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박대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약 2:1-5).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로 일시적으로 가난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해주신다. 그는 성도들에게 물질적 여유를 약속하셨다. 그는 신명기 28장에서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물질적 복을 약속하셨다(1-6절). 예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성도가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며 필요한 돈을 주실 것은 분명하다(히 13:5).
[8절]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지혜’라는 원어(레브)는 ‘마음’이라는 말로서 바른 마음과 바른 생각을 가리킨다. 사람은 생각이 반듯해야 말도 바르게 하고 행동도 바르게 할 수 있다. 바른 생각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생각이며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선한 생각이며, 그것이 곧 지혜이다.
본문은 ‘지혜를 얻는 자’라는 표현을 한다. ‘얻는 자’라는 말은 바른 마음과 생각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인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무지하여 그릇된 길로 잘 빠진다. 바른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로, 또 자신이 사모하여 얻게 된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예배에 잘 참석하여 말씀을 힘써 듣고 배우는 자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본문은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무지함은 불경건하고 악한 행실을 낳고 심령의 병과 환경적 황폐와 영육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지만, 지혜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행실을 낳고 평안과 강건함과 영생을 가져올 것이다. 잠언 1:32-33,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잠언 8:35-36,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본문은 또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명철은 바른 깨달음이며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바른 생각과 교훈에서 나온다.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는다. 그 복은 평강, 형통, 건강, 물질적 여유 등을 포함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생의 복을 가리킨다.
우리는 거짓 증거와 거짓말을 철저히 배격하자. 그것은 큰 죄악이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말자. 거짓말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하자.
우리는 심령과 인격이 천박한 자가 되지 말고, 심령과 인격이 고상한 자, 즉 온유하고 너그럽고 존경할 만한 덕을 지닌 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계명을 순종함으로 그의 약속대로 가난을 피하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부자 되는 약속을 하지 않으시지만, 일용할 양식의 궁핍함이 없게 하시고 의식주의 기본적 필요를 공급해주신다. 또 우리는 우리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아보자.
우리는 지혜를 사모하며 얻자. 우리는 성경말씀의 바른 교훈을 사모하며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순종함으로써 지혜와 명철을 얻고 지키자.
9-12절, 거짓말, 분수, 절제, 왕
[9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7:17,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에는 ‘진실로’(아멘)라는 말이 51회나 나온다(신약성경 전체에는 152회).
성경은 진실한 증거의 책이다. 기독교는 진실한 증거 위에 세워져 있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증인들이라고 불렸다. 사도행전 1:8,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내 증인’이라는 말은 나의 참된 증인, 나의 진실한 증인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하며 진실한 말만 하라고 명하신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거짓은 마귀의 죄이며 속성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오직 진실을 말해야 한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제9계명에서 거짓 증거를 정죄하셨다. 잠언 6:16-19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 중 ‘거짓된 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들었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였고(계 21:8), 또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새 예루살렘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계 22:15).
[10절]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만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죄만 짓는 자이다. ‘사치하는 것’이라는 원어(타아누그)는 ‘사치, 연락(宴樂), 기쁨’이라는 뜻이다(BDB). 지혜로운 자는 세상의 헛됨과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조심하며 살려 하지만, 미련한 자는 그런 깨달음이 없이 사치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산다.
미련한 자가 사치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적당치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 것이 헛된 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 앞에 있어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또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자신을 해이하게 하고 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련한 일이다. 미련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실상 사치와 연락이 아니고, 세상의 헛됨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과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다.
본문은 또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라고 말한다. 방백이 종을 다스리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지만, 종이 방백을 다스리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 한 사회를 심판하실 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종이 방백을 다스리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며 또 종은 방백들을 잘 다스리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필요하다. 또 다스리는 자는 건전한 생각과 판단력, 도덕성과 사랑, 말의 덕스러움, 용기와 담력, 단호함 등의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스림은 하나님의 은사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 중 하나이다(고전 12:28; 롬 12:4-8).
[11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슬기이다. 우리는 왜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필요한가? 그것은 말이나 행동으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또 다른 이의 부족을 긍휼히 여기고 그가 깨닫고 고치기를 기다리기 위해서, 또 자신의 부족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참는 훈련, 관용하는 훈련, 너그러움의 훈련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출애굽기 34:6,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민수기 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느헤미야 9:17,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그 외에, 시편 86:15; 103:8; 145:8; 요엘 2:13 등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잠언 16:32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또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말한다. 잠언 10:12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고 말한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다(엡 4:32).
[12절]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
왕은 힘과 권세를 가진 주권자이다. 사자는 먹이를 찢고 삼키려 할 때 부르짖는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다. 사울 왕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과 공모(共謀)했다고 오해하여 도엑을 명하여 하나님의 제사장 85명을 죽이게 하였다(삼상 22장). 파사 왕 아하수에로는 잔치자리에 오라는 남편의 명을 어겼다고 진노하여 자기 아내인 왕후 와스디를 당장 왕후의 직에서 폐하였다(에 1, 2장).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크고 두렵다. 노아의 시대에 온 세상이 부패하고 강포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멸하셨다. 소돔 고모라 성이 심히 부패하고 음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유황불비를 내려 멸망시키셨다.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들이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심히 부패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의 거민을 다 멸하라고 명하셨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라 할지라도 그들이 우상숭배하며 부도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셨다. 예레미야는 유다 멸망 때의 하나님의 진노를 눈물로 증거하였다(애 2:1-3). 오늘날도 세상은 세속주의, 쾌락주의, 음란의 큰 죄악 때문에 마침내 불심판을 당할 것이며 악인들은 최종적으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벧후 3:7; 계 21:8).
본문은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고 말한다. 들의 풀은 새벽 이슬로 생기를 얻어 파릇파릇해진다. 왕의 은택과 호의로 백성들은 좋은 것을 얻는다. 하나님의 은택과 호의로 인생은 온갖 복된 것들을 누린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의 해방과 홍해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의 물 등 하나님의 귀한 은택들을 받아 누렸다.
우리는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우리 속에서 거짓의 요소를 추방하고 오직 진실한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자.
우리는 미련한 자처럼 사치하고 연락하지 말고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자. 우리는 헛된 세상의 사치와 기쁨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과 그의 영광의 나라를 사모하며 자기 분수를 알며 근검절약하고 절제하자.
우리는 쉽게 성내는 자가 되지 말고 노하기를 더디 하자. 또 우리는 남의 허물에 대한 감정을 오래 품고 있지 말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자.
우리는 위정자들이 백성을 위하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또 우리는 주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도록 죄를 회개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자.
13-16절, 미련함, 슬기로움, 게으름, 계명 준수
[13절]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미련한 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죄만 짓고 게으르고 방탕한 아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때, 또 부모의 바른 교훈과 본이 없을 때, 또 부모의 바른 교훈을 받아도 고의로 그것을 거절하고 대항할 때, 미련한 아들이 된다. 미련한 사람은 부모의 지혜로운 교훈과 훈계를 멸시한다(잠 1:7).
미련한 아들은 그 아버지에게 재앙이다. ‘재앙’이라는 원어(하오스)는 ‘멸망’이라는 뜻이다(BDB, NASB, NIV). 아들은 부모의 대를 잇는 자요 부모의 기업이다. 자녀가 잘 되면 부모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영광과 복이 되나, 자녀가 잘못되면 부모에게 근심과 슬픔이 되고 수치와 멸망이 된다. 잠언 17: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으니라.” 잠언 17: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다. 잠언 27:15, “다투는 부녀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아내는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고 욕심이 많고 이해심이 부족할 때 남편과 잘 다툴 것이다.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은 끊임없이 남편을 괴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잠언 12:4,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잠언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5:24에도). 잠언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다투는 아내는 아내의 역할에 역행하는 자이다. 아내의 역할은 남편을 돕는 것인데, 좋은 돕는 자가 되려면, 특별한 경우에는 겸손히 조언을 줄 수 있겠으나, 대체로 남편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14절]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부모는 자기의 집이나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해줄 수 있다. 그러나 슬기로운 아내는 부모가 줄 수 없다. 슬기로운 아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한 자이다. 그는 죄악된 것을 다 버리며 선하고 온순하며 단정하고 순종하며 부지런하다. 성경은 슬기로운 여인을 칭찬하며 권장한다. 잠언 12:4, “어진[현숙한]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잠언 14:1,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언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예비하시고 구원하시고 거룩케 하시며 지혜와 총명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실 수 있고 또 주신다. 슬기로운 아내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고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8:22도, “[좋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좋은 아내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고난도 때때로 유익하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고 경건과 순종의 훈련을 받으며 회복의 은혜를 얻게도 된다. 시편 119:67, 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성도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15절]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懈怠)한[나태한, 게으른]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게으름은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한다. 게으름은 자기 할 일을 등한히 하는 것, 시간을 낭비하는 것, 놀고 먹으려 하는 것을 가리키며, 그런 사람은 몸이 아프지도 않은데 하루에 8시간 이상 잠을 잘 것이다. 잠언 6:9는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라고 말한다.
나태한 자는 주릴 것이다. 잠언 6:10-11,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사람이 게으르면 가난해지고 마침내 파산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지런해야 한다. 성도는 잠도 적당히 자야 하고 자기 일을 정직하게, 부지런하게 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에베소서 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성도는 놀고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데살로니가후서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부지런하게 사는 자는 몸도 건강해지고 물질적 여유도 얻을 것이다.
[16절]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그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바른 길, 선한 길을 지시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서 의를 행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 한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의롭게 살았던 노아는 홍수로 멸망하는 세상에서 방주로 구원을 받았다. 믿음과 순종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이들이 다 광야에서 죽고 멸망할 때, 멸망치 않고 살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행실을 삼가지 않는 자는 죽는다. ‘그 행실을 삼가지 않는 자’라는 원어(보제 데라카우)는 ‘그 길을 멸시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 길’은 그가 가야 할 길,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인간의 바른 길을 가리킨다. 그 길을 멸시하는 것은 어그러진 길로 가고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곧 죄이다.
그 행실을 삼가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다. 에스겔 18:20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말하며, 로마서 8:13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하였다. 의는 생명에 이르고 죄는 죽음에 이른다. 소돔 고모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하다가 다 망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광야에서, 또 가나안 땅에서, 악을 행하다가 다 망하였다.
우리는 미련한 아들이 되지 말고 또 다투는 아내가 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과 기도의 생활 속에서, 또 각자 자신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좋은 가족의 일원이 되고 우리 가정을 복된 가정으로 만들자.
우리는 슬기로운 아내가 되고 또 딸들을 슬기롭게 잘 키우자. 그러나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으로 되므로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며 또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하도록 죄를 멀리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살자.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잠도 적당하게 자면서 우리의 하여야 할 영적인 의무들과 각자의 육신적인 의무들을 충실하게, 부지런하게 다 행하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자. 우리는 우리의 행실을 조심하며 바른 길, 선한 길을 멸시하지 말자.
17-20절, 구제, 자녀 징계, 노함, 훈계
[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구제하는 뜻을 포함한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 즉 꾸어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잠언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더군다나, 신자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에게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0:40), 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믿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본문은 가난한 자에게 한 구제와 선행을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고 말한다. 시편 37: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사도 바울도,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主)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안다”고 말하였다(엡 6:8).
[18절]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의지하지는 않아야 하지만, 그 자녀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는 있다. 성도는 그의 자녀가 경건하고 선한 인격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복된 가정을 이루고 사람답게 살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우리 자녀의 심령이 굳어져 도저히 고치기 어렵다고 판단되기 전까지 그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본문은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라”고 말한다. 자녀의 잘못을 버려두는 것은 그를 사랑함이 아니고 미워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책망하며 상당한 벌을 주어야 한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 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17,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그러나 본문은, “그를 죽일 마음은 두지 말라”고 한다. 부모가 자녀를 죽일 권한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교육의 목적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다. 교육은 주로 말로 하는 것이며 징계는 약간만 해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징계해서도 안 된다.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19절]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건져 주게 되리라.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도하게 노하는 것을 말한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반복해서 실수하기 쉽고 그러므로 한두 번 용서해주어도 결국 비슷한 실수를 반복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미련한 아들이나 미련한 종의 모습이다. 사람이 이성과 양심과, 성경의 교훈을 따르면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할 것이지만, 맹렬한 노, 즉 상한 감정으로 행하면 그릇된 판단을 하고 그릇된 말과 행동을 하여 정죄를 당하고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교훈한다. 특히, 잠언이 그러하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22:24-25,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잠언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전도서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怒)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야고보서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절]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권고’(에차)는 ‘조언, 충고, 권면’이라는 뜻이며, ‘훈계’(무사르)는 ‘교훈, 경고, 책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 에는 이런 내용들이 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했다(딤후 3:16).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교훈이 있고 책망도 있고 권면과 충고도 있고 바르게 하는 것도 있고 위로도 있고 마침내 의로운 인격과 삶에 이르게 함이 있다.
본문은 ‘들으며’ ‘받으라’고 말한다. 교만한 자, 닫힌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받지 않는다. 그는 말의 꼬투리나 잡으려 하고 말을 들어도 거역한다. 그는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음이 없고 그 말씀을 배척하는 자를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받을 때 겸손히, 단 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우리는 칭찬과 위로의 말만 좋아하지 말고 충고와 책망의 말도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본문은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고 말한다. ‘필경은’이라는 원어(베아카리세카)는 ‘너의 말년에’라는 뜻이다(BDB). 비록 우리가 과거에 지혜가 없었고 지금 지혜가 부족할지라도, 우리가 권고와 훈계를 받으면 지혜가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길은 성경을 읽고 듣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지혜롭게 되었다고 고백하였고(시 119:98-100), 야고보는 지혜 얻기를 구하라고 교훈하였다(약 1:5).
우리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말자.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고 선을 베풀자.
우리는 자녀에 대한 경건하고 선한 소망을 두고 그를 교훈하고 근실히 징계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징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하자.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전 13:4). 우리는 자기의 감정을 다스리고, 노하더라도 많이 생각한 후 정당성 있게 하자.
우리는 바른 권고와 훈계를 달게 받고 성경책을 힘써 읽고 들음으로 지혜를 얻어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며 평강과 형통과 영생을 누리자.
21-24절, 계획, 인자함, 경외함, 게으름
[21절]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마음으로 많은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즉흥적으로 하지 말고 세밀하게 계획을 세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무슨 일을 계획한다고 그 일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여러 장애물들이 있다. 우리가 마음으로 세운 여러 계획들 중에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선한 것만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어떤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6:1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하며, 또 잠언 16:9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
물론 어떤 때에는 사람의 악한 계획도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따르며 섬겼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 때문에 배반하였고 유대 지도자들은 계획한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다.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완성되었고, 또 그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의 신성(神性)과 속죄사역이 확증되었다. 잠언 16:4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한 일까지도 섭리하셔서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2절]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는다. ‘남에게 사모함을 받는다’는 원어(타아와)는 ‘사모함을 받는 것, 영광(ornament)’ (BDB) 혹은 ‘사모하는 것, 사모할 만한 것’(KJV, NASB, NIV)이라는 뜻이다. 인자함은 사람의 좋은 인격성의 대표적인 덕이다. 그것은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너그럽고 남을 불쌍히 여기고 인정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에 반대되는 성품은 무정하고 냉정하고 이해심이 없고 무관심하고 이기적이며 거칠고 가혹하며 너무 비평적인 것이다. 사람의 인격의 광채와 영광은 그의 인자한 성품에 있다.
또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낫다. 거짓말은 심히 나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악의 시작이다. 에덴 동산에서 뱀은 거짓말로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사탄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이단 사상들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무너진다. 거짓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회개는 죄의 진실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거짓말하는 자는 사람 간에도 참 친구가 될 수 없다. 거짓말하는 자는 가난한 자보다도 못한 자이다. 가난한 것은 악은 아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우리는 인자함과 진실함, 이 두 가지 덕성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이 두 덕성을 강조한다. 잠언 3:3-4는,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하였고, 미가 6:8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2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지식이며 사람이 행해야 할 첫 번째의 마땅한 의무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살면서 창조자요 섭리자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가장 큰 무지요 가장 큰 불행이며 가장 큰 죄악이다. 피조물인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또한 큰 유익이 있는 일이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한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어기고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결코 죽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린다. 다윗은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였다(시 36:9).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내 백성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셨다(렘 2: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평강을 얻는 길이다. 평강은 심적 평안, 육신적 건강, 물질적 여유,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한다. ‘지낸다’는 원어(린 ןי)는 ‘밤을 지낸다, 거한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심신의 만족함으로 밤을 지내며 쉬며 평안하게 거할 것이며, 또 재앙을 만나지 아니할 것이다(사 48:17-18; 딤전 4:8).
[24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넣는다’는 원어(타만)는 ‘감추다, 숨기다’는 뜻이다. ‘그릇’이라는 원어(찰라캇)는, 헬라어 70인역이나 유대인 주석가들은 ‘품’ (bosom)으로, 또 주후 2세기의 헬라어역들(아귈라역, 시마쿠스역)은 ‘겨드랑이’로 번역하였고, 옛날 영어성경(KJV)도 ‘품’으로 번역했으나, 권위 있는 히브리어 사전들(BDB, KB)에 의하면, 그 단어는 ‘그릇’이라는 뜻이며 현대영어성경들(NASB, NIV)은 ‘그릇’으로 번역하였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려 하지 않는다. 먹을 것이 앞에 있어도 먹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음식을 만들고 집안일을 하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는 것 같다. 잠언 12:27은,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름을 책망하신다. 게으른 자는 가난해지고 그 부리는 자에게 고통이 되고 남에게 부림을 받는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잠언 10:26,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자(잠 3:6).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과 섭리를 믿자. 우리는 때때로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를 소원하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자하며 선한 사람이 되자. 그러나 불의한 일을 용납하거나 악과 타협하지는 말자. 또 우리는 범사에 진실한 사람이 되자.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무정하거나 거칠고 가혹한 자는 되지 말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일이며 기본적인 의무이다. 또 그것은 영생과 평안(건강, 일용할 양식을 포함)을 주는 유익한 일이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한 자가 되자. 경건과 봉사도 마찬가지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25-29절, 견책, 불효, 지식, 공의, 채찍
[25절]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잠언 21:11도 비슷하다.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본문은 거만한 자, 어리석은 자, 명철한 자, 세 종류의 사람을 말한다.
첫째로, 거만한 자(레츠)는 남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를 말한다. 그는 마음이 악으로 굳어진 자이다. 본문은 그런 자를 때리라고 말한다. 잠언 9:7-8은,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했으나, 그것은 개인적 책망을 피하라는 교훈이며, 본문에서 거만한 자를 때리라는 교훈은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공적 징벌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적 권징에 해당된다. 거만한 자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
둘째로, 어리석은 자(페시)는 단순하고 순진한 자를 가리킨다. 그는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거만한 자가 징계받는 것을 볼 때 두려움을 갖고 악을 피하며 조심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명철한 자(나본)는 지혜를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런 사람도 책망받을 잘못이나 실수를 할 때가 있겠으나, 그는 책망을 받을 때 지식을 얻는다. 그는 매로가 아니고 말로 자신의 부족을 고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9:8-9는,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고 말했다.
[26절]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다(출 20:12). 성경은 부모뿐 아니라, 선생이나 왕이나 목사와 장로도 존중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윗사람을 공경하고,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순종해야 한다. 나쁜 자녀는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며, 나쁜 학생은 선생을 무시하고 대항한다. 나쁜 국민은 나라의 통치자들을 무시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나쁜 교인은 목사와 장로들을 무시하고 비방하고 배척한다.
본문은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행한 대로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존귀와 영광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수치와 욕을 주신다.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것은 매우 큰 죄로 간주된다. 구약 율법은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를 죽이라고 명한다(출 21:15, 17). 신명기 21:18-21은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고 그 징책을 듣지 않고 술취하고 방탕한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여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돌로 쳐죽이고 이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을 제하게 하고 온 이스라엘로 듣고 두려워하게 하였다. 또 잠언 30:17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하였다.
[27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은 이 본문을, “내 아들아, 교훈을 듣지 말라. 그러면 네가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되리라”고 번역하지만, 옛날 영어성경(KJV)과 한글개역 본문이 원문의 뜻 같다. ‘내 아들아’라는 말은 사랑과 관심과 간곡함을 나타낸다.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은 바르고 선한 지식과 멀어지게 만드는 잘못된 교훈을 가리킨다. 참된 교훈은 바르고 선한 지식을 주는 유익한 교훈이지만,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은 유익이 없는 교훈이다. 그것은 사람을 파멸시키는 이단들이나 거짓 교사들의 교훈이다.
주께서는 말세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겠다고 예언하셨다(마 24:11). 사도 바울은 그들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하며 다른 영을 받게 하는 자들이며(고후 11:4), 사탄의 일꾼들이며(고후 11:14-15), 그들의 사상은 저주받을 사상이며(갈 1:8),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며(딤전 4:1), 또 바른 교훈과 진리에서 떠난 허탄한 이야기들이라고 표현하였다(딤후 4:3-4). 사도 요한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교훈이 아니라고 말하였다(요일 4:1).
우리는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들을 듣지 말아야 한다. 무지한 교훈을 들으면 생각과 지식이 잘못되어 잘못된 말과 행동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혹 들었을지라도 앞으로는 듣지 말아야 하고, 지금까지 듣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듣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바른 교훈, 곧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합한 성경적 교훈만 들어야 한다. 잠언 19:20,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28절]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망령된’이라는 원어(벨리야알)는 ‘무가치한, 사악한, 비열한’이라는 뜻이다.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긴다. 진실한 증인은 사실을 증거하며, 진실을 생명같이 여기며,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며, 시시비비를 가린다. 그러나 사악하고 비열한 증인은 진실을 업신여기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옳은 것을 무시한다.
또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킨다. 악인의 입은 악한 사람의 말을 가리킨다. 죄악을 ‘삼킨다’(빌라)는 표현은 죄악을 취하고 택하고 행한다는 뜻이다(BDB). 악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길 뿐 아니라, 죄악된 말, 즉 부정하고 불법한 말, 옳지 않고 정당치 않은 말, 또 완전한 거짓말이든지 반쯤 거짓말이든지 간에 거짓된 말을 잘 한다.
그러나 사람의 한마디 말은 참으로 중요하다. 사람의 예와 아니오 한마디가 다른 사람을 무죄자로 만들기도 하고 유죄자로 만들기도 한다.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말 한마디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고(출 20:16), 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3:1-3). 주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37).
[29절]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거만한 자’는 마음이 높아 남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 남의 충고를 듣기 싫어하는 자, 자기의 실수를 인정치 않는 자이다. 그와 반대로,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자신의 부족을 아는 자, 남의 충고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남의 충고를 겸손히 듣는 자,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려 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온유하고 겸손하고 선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주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케실)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거만하고 악한 자를 가리킨다. 잠언에 보면, 그는 참된 지식을 미워하고(잠 1:22) 명철을 기뻐하지 않으며(잠 18:1) 악을 행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 자이다(잠 10:23). 그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잠 12:23) 그 입은 미련한 것을 쏟으며(잠 15:2) 그는 미련한 것을 먹고산다(잠 15:14).
본문은 심판이 거만한 자를 위해 예비된 것이며 채찍이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말한다. 거만한 자와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세상에서도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결코 죄인을 죄 없다 하지 않으신다(출 34:6-7).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잘못이 있어도 용서를 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충고와 책망을 달게 듣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부족과 실수가 없는 자는 없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고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남을 조롱하는 거만한 자가 되지 말고 어리석은 자도 되지 말자.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가 교만하고 거만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더욱이 그의 계명을 버리고 범죄했던 자들임을 안다면, 아무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한 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함으로 지혜롭고 명철한 자가 되자.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고 또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노인들을 공경하고 직분자들을 존중하고 죄 되는 일 외에는 윗사람들을 공경하고 순종하자. 왜냐하면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계명이며 하나님의 뜻이고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위한 매우 중요하고 기본적인 규칙이기 때문이다. 또 부모 공경은 장수와 형통의 복이 약속된 복된 계명이다.
우리는 듣는 것을 조심하여, 바른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잘못된 말들은 듣지 말고, 성경적으로 바르고 선한 교훈들만 사모하며 듣고 붙들자. 특히, 오늘날과 같이, 말들의 홍수에 사는 우리는 듣는 것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성경적으로 바른 교훈은 유익을 주지만, 바르지 못한 교훈들을 유익 대신 큰 해를 준다. 그것들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끈다.
우리는 공의를 업신여기는 망령된 증인, 죄악을 내뱉는 악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실만을 증거하는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하고 선과 의를 생명같이 여겨 죄악을 묵인하거나 내뱉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거만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공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교만과 부도덕을 반드시 벌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자.
[창세기 48장 좋은 성경말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창 4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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