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외에는 다른 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오직 예수님만 증거 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복음만을 선포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제목: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음” (행 4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사도행전 4:1~37
요절: “이 예수님은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1-12)
주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늘 기도와 구제하자.
오늘은 사도행전 4장을 강해합니다. 4장은 3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되고 뛸 수 있어 사도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드린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기적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솔로몬의 행각에 가서 수많은 성도 앞에서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사도들이 공회(산헤드린)에 체포되어 하루를 갇혀 있었고 이튿날 공회 앞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는 기회를 틈타서 이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1. 사도들이 공회 감옥에 하룻밤 갇힘(행 4:1-4)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님을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1-4절.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즉 성전의 경비를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와서 그들이 회중들에게 예수님을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체포했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튿날까지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교회 지도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싫어하였습니다. 중생치 못한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할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직분자라 할지라도 중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과 성신님의 역사로만 깨달을 수 있고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핍박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롬 10:17) 듣고 믿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엡 2:8). 남자의 수가 약 5천 명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솔로몬 행각에서의 전도로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수가 약 5천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군대에 갈 수 있는 남자(만 20세~60세)만 계수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3~4를 곱해야 합니다. 이날 성도의 수가 약 2만 명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2. 공회 앞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증거함(행 4:5-12)
(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신님 충만하여 말하기를 ‘백성의 공무원과 장로들아 (9) 만일 장애우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 라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10) 여러분들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11)이 예수님은 여러분들인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하였더라.
5-7절. 그 이튿날에 유대인 공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공회를 히브리어로 산헤드린(Sanhedrin)이라고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BC 55년 경에 시리아 지역의 총독으로 있었던 가비나우스는 유대 땅을 다섯 지역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공회를 갖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산헤드린이 이스라엘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산헤드린이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산헤드린의 구성원은 모두 7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대제사장 의장과 70인 위원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노아의 후손에 의해 만들어진 전 세계 모든 족속의 수가 71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칠십인 제자를 세워 각 지역으로 파송하셨습니다(눅 10장). 예수님께서 70명 제자를 따로 세워 복음을 증거케 한 것은 복음이 전 세계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숫자가 70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세시대 때 세워졌던 장로의 숫자가 70명이기 때문에(출 24:1) 70명으로 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대공회와 공회가 있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대공회였으며 지방에 공회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대 공회에는 대제사장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그들의 구성비율은 달랐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사두개파가 주류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헤롯 대왕 시대에는 사두개파와 귀족층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바리새인들을 더 많이 등용하다 보니 바리새파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사형 집행권이 없었다 할지라도(로마 총독이 사형을 언도함) 이스라엘 독자적인 행정법과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체적으로 경비대를 가지고 있어서 이스라엘을 권위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산헤드린 공회도 함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주님의 은혜로 치유받은 다음날 아침에 소집된 공회에 관원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관원’이라는 헬라어 원어는 ‘다스리는 자’라는 말로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사두개파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당시에 시무하는 대제사장은 유대인 공회의 의장이 되었습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도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었으나 바리새파에 속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로서 성경의 사본을 보존하고 필사(筆寫)하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할 때처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질문을 던집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이름으로나 다른 신의 이름으로 하는지 물은 것입니다.
8-10절. 이에 베드로가 성신님이 충만하여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비상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그분의 종들에게 담대함과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장애우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여러분들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십시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무죄성(無罪性)을 증거하며 더 나아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롬 1:4).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자주 표현하였습니다(2:22; 3:6; 10:38). 그것은 사람으로 오신 역사적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독특한 인격 곧 신인(神人)이십니다. 그분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신성(神性)의 영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이 능력이 있고 그 이름이 이 앉은뱅이 장애우를 낫게 한 것입니다.
11절. “이 예수님은 여러분인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라고 한 것은 시편 118:22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것은 메시아 예언이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입니다. ‘너희 건축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고 마침내 로마 총독 빌라도를 통해 그분을 죽게 하였으나, 그 버린 돌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 집의 좌우의 벽을 연결하는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석이십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택하셨고 중요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베드로는 세상에서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분명히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요 14:6),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mediator)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라고 하였습니다(딤전 2: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를 세상에 보내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우리는 이 유일한 구주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계의 다수의 교단들의 협의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타 종교와의 대화 분과장이었던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타 종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고 동료 순례자라고 했습니다.
3. 사도들이 위협을 당함(행 4:13-22)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고(14) 또 병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그들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18)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21)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그들을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22)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 세나 되었더라
13-14절.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파르레시아 parresia)[담대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의 담대한 발언은 분명히 성신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시기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영(Spirit)이시니라”(마 10:19-20). 예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모세가 하나님께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하며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셨습니다(출 4:11-12).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변(口辯)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유대인들은 베드로가 지혜있게 대답하는 것을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말했습니다(요 7:15).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풍성하고 은혜스럽게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배운 자들이나 배우지 못한 자들이나 간에 주님의 종들이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담대히 증거하게 역사하십니다. 진리의 증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고, 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앉은뱅이가 그들과 함께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정당한 비난의 말은 없습니다. 진리의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 비난들은 항상 있어왔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였지만, 결국 그 모든 거짓된 비난들은 다 파하여지고 하나님의 진리는 승리하며 견고히 세워질 것입니다.
15-16절.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잠시 공회에서 나가라고 하고 서로 의논하며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인하여 확실히 다툴 여지가 없는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그 앉은뱅이가 나은 것은 공회원들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두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은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이루어진 사실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행 2:22). 그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항상 진리를 부정하고 왜곡시키려 하였습니다.
17-18절. 그들은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사도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고 대적하며 그것이 전파되는 것을 싫어하고 방해하고 위협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살후 3:2).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습니다(롬 3:11).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19-20절. 이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단호하고 담대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과 그분의 명령들을 말하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말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수사학적 질문(rhetorical question)으로 공회가 잠잠했습니다.
21-22절. 관원들은 백성을 인하여 그들을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표적으로 병나은 사람은 40여세나 된 자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애우 치유 사건이 사도행전 3장 1절부터 4장 22절까지 기록되어 있어 한 사건을 가장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에 근거한 진리입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진리는 확증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가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진리를 믿지 못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대적하고 그 진리를 전하는 자를 위협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버려두신 자들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하고 또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몸을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 말고, 몸과 영과 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오직 하나님만 순종합시다.
4. 사도들이 담대함을 위해 기도함(행 4:23-31)
(23)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24)그들이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분이시요(25)또 주님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신님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가?(26)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님과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분이로소이다(27)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28)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9)주님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30)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31)기도를 마치니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신님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23-24절. 공회에서 놓인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 사도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도들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일치된 믿음과 행함이 있었습니다. 기도는 어려울 때 담력을 얻는 길입니다. 성도는 기도로 어려운 세상 현실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되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였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조용히, 남에게 방해되지 않게, 속삭이듯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무의미하게 말을 반복하거나 중얼거리지 말고 인격적 하나님께 또박또박 아뢰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상한 때에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대주재여, 주님께서는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참 주인, 즉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시고 모든 일을 임의로 행하실 권한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25-28절. 기도가 계속됩니다. “또 주님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신님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님과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분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님을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사도들은 헤롯과 빌라도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메시아를 대적한 것은 다윗이 성신님의 감동으로 쓴 시편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사도들은 성경이 성신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또 그들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신앙과 대항도 그분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셨음을 기도합니다.
29-31절. “주님,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내려주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주님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빌기를 다하자 모인 곳이 진동하였습니다. 무리들은 다 성신님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한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는 권세자들의 위협을 보시옵소서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면 사도들을 위해 적절하게 조치하여 사도들을 보호해 주시든지 피신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원수들을 진멸시켜 주실 것입니다. 둘째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입니다. 진리에 대한 핍박은 예견된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없애주시기를 구함보다 그것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주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진리 운동에 고난과 핍박은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통해 영혼들은 구원을 얻고 교회는 설립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히 계속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 있게 가르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며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귀한 일입니다. 셋째는 주님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입니다. ‘손을 내밀어’라는 말은 전통본문에는 ‘주님의 손을 내밀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병고침과 기적을 행하시기를 구한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는 이런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행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며 신약교회가 아직 튼튼하게 건립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통해 복음 진리를 확증하셨으나, 하나님의 기사들과 능력들은 그리 많이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것들 없이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기독교는 기적이나 철학을 전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고전 1:22-23).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합심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모인 곳은 진동했고 모든 사도들은 다 성신님의 충만함을 얻었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신님은 능력의 영이시며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대적자들의 위협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기 쉽지만, 성신님의 충만함으로 담력을 얻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신님의 충만함을 얻음으로 담대히 선교와 전도할 수 있습니다. 전도의 담력은 성신님 충만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이기는 승리적 삶의 방법입니다. 또 성도는 세상의 고난과 핍박 중에도 담대함을 가지기를 간구해야 하며, 또 기도함으로 성신님 충만을 얻어 담대히 신앙생활, 봉사생활을 하고 또 전도할 수 있습니다.
5. 성도들이 유무상통(有無相通)함(행 4:32-37)
(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34)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32-37절. 믿는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 사용하고 자기 물건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교회이었다. 행 2:44-45도,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 사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의 유무상통은 한마음과 한뜻을 가짐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교훈을 받았고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졌고 한 순종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고 성도들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밭과 집 있는 자들은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그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기 때문입니다. 구브로(Cyprus)에서 난 레위 족속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요셉입니다. 사도들은 그를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밭이 있어 팔아 모든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신 15:11). 구약의 왕정 시대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습니다. 또 부지런한 자는 부요해지고 게으른 자는 가난해집니다(잠 10:4). 그러나 비록 성경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만, 우리의 모든 재산은 실상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물질에 종이 되지 말고 물질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재산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즐거이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문제 있을수록 더욱 기도에 힘쓰며, 우리의 재산을 하나님의 것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과 어려운 교우들을 돕는 일을 위해 사용합시다.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드리며 재정 후원을 부지런히 합시다. 나눔과 봉사를 통해 기쁨을 나눕시다. 이런 초대교회의 모습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회입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천하에 가장 소중한 예수님의 이름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병마도 물리치며 모든 유혹과 핍박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사람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순종하게 하옵소서.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하며, 개인적으로 골방기도하며, 되도록 많은 소유를 이웃과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도행전 히브리어 성경말씀] 석방되는 베드로와 요한(행 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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