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현충일 성경말씀 중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생각하지도 못한 일 때문에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에 봉착하여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힘들어합니다. 사람에게 말하지 못할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들어주시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위로하여 주십니다. 사람에게 위로받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부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목: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7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고후 7:1~16
요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 (고후 7:10)
주제: 고난과 근심을 회개의 기회로 삼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자
이번 6월을 애국의 달로 지냅니다. 오늘은 현충일(顯忠日 Memorial Day)을 맞이합니다(미국은 지난 월요일 5월 31일). 나라와 세계평화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추모하며 애국정신을 계승하는 날입니다. 또 이달에 6.25 전쟁(한국전) 발발 71주년을 맞이하여 다시는 한반도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없도록 기도합시다.
1956년 4월 19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령 1145호,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매년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주로 6.25 참전 용사들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예부터 손이 없다는 청명과 한식에는 각각 사초(莎草)와 성묘(省墓)를 하고, 6월 6일 망종(芒種)에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전해져 왔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보리가 익고 모내기가 시작되는 망종을 가장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56년 현충일 제정 당시 정부가 6월 6일을 현충일 공휴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현충일에는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조기(弔旗)를 게양하고, 기념행사는 국가보훈처 주관 아래 정부요인들과 국민들이 참석하여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 헌화 및 분향, 헌시 낭송 순으로 추념식을 진행합니다. 오늘은 오전 10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전 국민이 1분간 묵념을 올려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들의 애국심을 기억하며, 국립현충원, 국립묘지, 전쟁기념관, 독립기념관 등 위령을 모신 곳을 방문하여 헌화합니다.
“현충일 노래” (조지훈 작사, 임원식 작곡)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님들은 불변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 그 충성 새로워라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고린도후서 7장을 통해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전하겠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목회자, 장로, 권사, 집사)는 특히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을 전하는 직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라(고후 7:1)
1 그러므로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 약속들’은 6장에서 말한 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약속들을 말합니다. 장차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얻을 약속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라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우리의 거룩한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또 그분께서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잠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은 성신님의 도우심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인 성화(sanctification)를 이루라는 권면입니다. 비록 100% 성화가 불가능할지라도, 성도는 온전한 거룩을 향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이란 우리가 정신적 혼란, 심적 더러움, 예를 들어 미움, 음란한 마음, 물질에 대한 탐욕 등에도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6장에서 말한 바대로, 마귀 벨리알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로부터 하나님의 형상 곧 모양으로 창조함을 받은 거룩한 성품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 묻혀 있는 인간의 본질적 모습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구원을 받았고 장차 영광스러운 자녀가 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성도는 영과 혼과 육의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는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해주시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신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되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으로 삼고자 하신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거룩을 온전히 이루며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 안에 머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요 15:4-5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성도는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고후 6:16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신자는 이 약속을 가진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위로하시는 하나님(고후 7:2-11)
2 우리를 받아들이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잘못하지 아니하였고 아무도 부패시키지 아니하였으며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지 아니하였노라. 3 나는 너희를 정죄하려고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너희와 함께 죽고 살리라고 내가 전에 말하였느니라. 4 내가 너희를 향하여 심히 담대히 말하고 또 너희를 크게 자랑하노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도 내게 위로가 충만하고 기쁨이 크게 넘치는도다. 5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 육체에 안식이 없었으며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여 밖에는 싸움이 있었고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노라.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오게 하사 우리를 위로하시되 7 그를 오게 한 것뿐만 아니라 그가 너희 안에서 위로받을 때 얻은 그 안위로 위로하셨나니 그가 너희의 간절한 소망과 너희의 애곡과 나를 향한 너희의 뜨거운 마음을 우리에게 고하였으므로 내가 더욱 기뻐하였느니라. 8 비록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하노니 바로 그 서신이 잠시 동안만 너희를 근심하게 한 줄을 내가 아노라. 9 이제 내가 기뻐함은 너희가 근심하였기 때문이 아니요, 오히려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에 이르렀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방식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어떤 일에서도 너희가 우리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 11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방법대로 근심한 것 바로 이것을 보라. 그것이 너희로 하여금 얼마나 조심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너희 자신을 해명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분개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두려워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열렬히 갈망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징계하게 하였는가! 너희 자신이 이 일에서 결백함을 너희가 모든 일에서 입증하였느니라.
2-4절,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라고 부탁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 대한 거짓 교사들의 악한 비난으로 인해 생긴 간격을 버리고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불의를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속여 빼앗은 일이 없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백성의 한 나귀도 취하지 않았고 한 사람도 해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고(민 16:15), 사무엘도 백성에게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라고 말했습니다(삼상 12:3). 딤전 3:8은 집사의 자격에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그 교인들과의 일치된 마음과 사랑으로 생사(生死)를 같이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교인들을 향한 담대함과 자랑은 그들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담대히 말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담대함과 자랑대로, 그의 사랑과 신뢰대로 그는 많은 환난 중에서도 그들로 인해 위로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6, 7, 13절에도 이런 사실이 증거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다 같이 진실하고 정직하고 선한 인격과 삶으로 일치 단합하여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하는 교회를 이룹시다.
고후 7:5-11절에서는 성도들의 회개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기쁨을 얻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5-7절.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 육체에 안식이 없었으며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여 밖에는 싸움이 있었고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오게 하사 우리를 위로하시되 그를 오게 한 것뿐만 아니라 그가 너희 안에서 위로받을 때 얻은 그 안위로 위로하셨나니 그가 너희의 간절한 소망과 너희의 애곡과 나를 향한 너희의 뜨거운 마음을 우리에게 고하였으므로 내가 더욱 기뻐하였느니라.” 사도의 전도 사역은 육신적 휴식이 없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했습니다. 밖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방인 우상숭배자들의 핍박이 있었고 안으로는 인간적 연약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전도자의 길은 많은 고난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복음을 위해 충성되이 일하려 하다가 힘이 빠지고 마음이 침체된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6절의 ‘낙담한 자들’이라는 원어(타페이누스 tapeinous)는 ‘낙심한 자들, 침체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은 것은 그의 동역자인 디도가 그들로부터 돌아와서 그들에 대한 좋은 보고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만 바라며 가난하고 외롭게 사는 자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10:14, “주님께서는 보셨나이다. 재난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님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님을 의지하나이다. 주님은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시 68:5, “그분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위로받을 데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십니다.
8-9절. “비록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하노니 바로 그 서신이 잠시 동안만 너희를 근심하게 한 줄을 내가 아노라. 이제 내가 기뻐함은 너희가 근심하였기 때문이 아니요, 오히려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에 이르렀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방식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어떤 일에서도 너희가 우리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범죄자를 지적하고 책망한 것이 너무 심하여 그들이 낙심했을까봐 후회하였으나 그것이 잠시만 그들을 근심케 한 줄을 알고 이제 후회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은 도리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르러 바울에게 어떤 징계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 오늘의 요절 말씀입니다. 두 종류의 근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godly sorrow)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the sorrow of the world)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근심은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개와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세상의 일들로 인해 근심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의식주의 염려, 건강의 염려, 경제문제 등입니다. 이런 근심은 마음과 몸의 건강을 해치고 믿음까지도 잃어버리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런 근심을 버려야 합니다. 마 6:31, 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우리는 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버려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만 믿읍시다.
11절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방법대로 근심한 것 바로 이것을 보라. 그것이 너희로 하여금 얼마나 조심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너희 자신을 해명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분개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두려워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열렬히 갈망하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참으로 얼마나 징계하게 하였는가! 너희 자신이 이 일에서 결백함을 너희가 모든 일에서 입증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빠르고 성실하게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또 그들의 거룩함을 증거 하기 위해 변명했고 범죄 한 자의 죄와 그 죄를 포용한 자신들의 잘못을 인해 의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두려워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 바울을 사모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회개하기에 열심을 내었고 악한 자를 벌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그들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교훈과 책망을 받으려 하지 않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겸손히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책망을 들을 때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면 감사하며 조심하면 될 것이고, 우리에게 해당되면 고치고 회개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사역자들에게 고난 중에서도 위로와 기쁨을 얻게 하십니다. 특히 그것은 죄를 짓고 고민하는 성도들의 근심과 회개를 통하여 위로와 기쁨이 회복됩니다.
3. 디도의 위로와 기쁨(고후 7:12-16)
12 그러므로 비록 내가 너희에게 썼을지라도 그것은 부당한 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또한 부당한 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며 오직 너희를 위한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다. 13 그런즉 우리가 너희의 위로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고 참으로 디도의 기쁨으로 인해 넘치도록 더욱 기뻐하였으니 그의 영이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다시 활력을 얻었느니라. 14 내가 너희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그에게 자랑하였어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말한 것 같이 우리가 자랑한 것 즉 내가 디도 앞에서 행한 자랑이 진실임이 드러났도다. 15 그는 너희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를 받아들인 것 즉 너희 모두의 순종을 기억하고 자기의 내적 애정을 너희에게 더욱 넘치도록 기울이느니라. 16 그러므로 내가 모든 일에서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12-13절. 그의 편지의 결과, 사도 바울을 향한 고린도 교인들의 진실함과 간절함이 확인되었습니다. 바울의 책망은 그들의 회개를 가져왔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 일행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역자 디도의 마음이 그들로 인해 안심함과 새 힘을 얻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욱 많이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전도자의 위로와 기쁨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믿음 안에서 순종하며 살 때가 옵니다.
14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참말만 하였다고 증거 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일꾼들에게 꼭 필요한 간증입니다. 우리는 항상 진실한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 약 3:1-2,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잠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15-16절.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보낸 복음 사역자 디도를 두렵고 떨림으로 영접하였고 그의 말을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바른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 10:40). 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님의 형제 된 전도자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며 어려울 때 그들을 돌아보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해 한 선한 행위라고 하셨습니다(마 25:35-40). 요한삼서에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은 교회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자이었습니다. 그는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접하려는 진실한 성도들을 교회에서 내어 쫓기까지 하였습니다. 얼마나 악한 행동인가요! 사도 요한은 그 서신에서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라고 교훈하였습니다(요삼 1:1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디도의 사랑의 심정은 그들의 진실한 영접과 순종을 인해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복음의 일꾼이 주의 백성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을 볼 때 그들을 향해 사랑이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디도의 이런 보고를 받은 바울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향한 신뢰와 담대함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였습니다. 복음 사역자들에게 고난과 핍박, 그리고 교회로 인한 근심도 많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기쁨도 풍성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복음 사역자들에게 고난 중에서도 위로와 기쁨을 얻게 하십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교훈에 순종할 때 생깁니다. 그들의 영접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들의 순종은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바른 목회자, 바른 교인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근심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위로해 주십니다. 나라와 세계 평화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유가족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이루게 하옵소서. 세상의 모든 근심과 염려는 주님께 다 맡기게 하옵소서. “너희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주님으로부터만 위로를 받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피난처가 되시며 요새가 되시며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가 되심을 믿습니다. 우리나라와 세계 평화를 위해 순직한 모든 분들의 가족들을 위로해 주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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