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빌립보서 1장 강해설교 중에서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예수님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빌 1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빌립보서 1:1-30
요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0-21)
주제: 올해를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그리스도만이 내 몸에서 존귀하게 하자
희망찬 올해가 밝아 왔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계 21:5)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해를 시작합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정하고 요절은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6)입니다. 현대 역에서 복음 앞에 “그리스도의”가 빠져 있는데 전통 사본 원문과 킹 제임스 성경에는 있습니다.
동양의 60간지로 소띠(신축년辛丑年)입니다. 작년에 이어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울하게 시작하는 신년인데, 올해 덕담은 “건강관리”입니다. 백신도 나왔는데, 영국과 남아공에서 새로운 변종이 생겨서 또 다른 백신을 개발해야 합니다. 앞으로 감기와 독감처럼 바이러스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생활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는 수요일(1월 6일)은 전통적으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 날(주현절 Epiphany)로 AD 325년 니케아 교회회의에서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하기 전에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켰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의 지역에서는 AD 380년부터 1월 6일에 성탄절을 지켜왔고 지금도 아르메니아 동방정교회(Armenian Orthodox Church)에서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대림절 시작할 때 장식한 성탄절 트리와 decoration을 이번 수요일에 모두 수거했다가 내년도를 위해 보관해 둡니다.
오늘부터 이번 한 달은 빌립보서를 강해하겠습니다. 바울의 옥중서신입니다. 로마 옥중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행복한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 and again I say, Rejoice.” (빌 4:4) 본 서신은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찬 서신입니다. 이 짧은 서신에 ‘기뻐한다’는 말이 8회, ‘기쁨’이라는 말이 5회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서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빌립보서의 저작 연대는 주후 61년 말경이며, 본 서신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4개의 옥중 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되었던 것 같습니다.
착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빌 1:1-11)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들인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1-2절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들인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종들 servants’이라는 말은 바울과 디모데가 항상 주님께 순종해야 하는 사역자라는 말입니다. 종(노예)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쓰고 듣고 암송하고 배우고 연구하여 성경에 정통하고 그 모든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 서신은 “그리스도 예수 님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보내졌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 수가 많든 적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여진 한 명 한 명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보배롭고 귀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위한 많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목사들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고 성도들에게 주어진 책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현대로, 모든 성도들은 성경책을 날마다 열심히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심령과 삶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문. “하나님께서 무슨 규칙을 우리에게 주시어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셨는가? What rule hath God given to direct us how we may glorify and enjoy him?”
2답. “신구약 성경에 기재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이다. The Word of God which is
contained in the Scriptures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is the only rule to direct us how we may glorify and enjoy him.”
빌립보교회의 제직들로 감독들과 집사들도 있었습니다. 감독(Bishop)은 양들을 이단들의 침투로부터 보살피고 보호하는 직분입니다.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분이기도 합니다(행 20:17, 28). 장로교회는 목사(teaching elder)와 치리 장로(ruling elder)를 다 장로라고 부릅니다. 목사는 가르치는 장로라고 불립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deacon)를 세웠는데, 빌립보 교회에는 집사 직분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집사는 단독 목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엡 4;11에는 목사와 교사(pastors and teachers)를 동격으로 “목사 즉 교사”로 읽습니다. 접속사(kai)를 두고 “동의어 반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이를 전문용어로 Granville Sharp Rule이라고 합니다). 창 1;26 하나님의 형상 곧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창 5:3에 형상=모양, 동의어 반복으로 읽음).
롬 16장에 나오는 뵈뵈 집사는 겐그레아 교회를 담임 목회를 하던 분으로 로마서를 가지고 로마에 가서 사도의 편지를 읽어주며 설명하는 사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들 제직들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기원합니다.
3-5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 이유는 그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교제함을 인함’이었습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라는 말은 바울이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전한 그때 곧 그들이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던 그 날부터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는 당시까지, 주후 50년경부터 61년경까지 약 11년간일 것입니다.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한다’는 ‘복음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에 참여했다는 말은 빌립보교회가 사도 바울의 전파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믿어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복음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복음의 협력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 기도하였고 헌금으로 도왔습니다.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착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 속에 주신 구원을 말합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을 때가 되어 구원하십니다. 히 12:2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시작하신 분(author)이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finisher)’라고 표현하는데, ‘믿음의 주’라는 말은 ‘시작하신 자, 조성자’라는 뜻이고 ‘온전케 하시는 이’는 ‘완성자’라는 뜻입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셨고 또 그 믿음이 자라게 하시고 그 믿음을 완전케 하십니다.
7-8절.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확신을 가진 근거는, 그들이 바울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고 또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할 때 그들이 바울과 함께 입장을 같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단사설들로부터 복음을 변호합니다. 그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과 입장을 같이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증거 하였고 또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증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고 사모한다고 말합니다.
9-11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몇가지 기도 제목을 열거합니다. 첫째로,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기도합니다. ‘총명’이라는 원어(아이스데시스 αἰσθήσει aisthesei)는 ‘이해력, 분별력’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을 사랑하되 분별력 있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얼마큼 세속적이어도 괜찮을까?’를 생각지 말고 ‘무엇이 가장 선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영혼 구원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며 일주일에 가장 좋은 시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둘째로,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진실하여’라는 부사는 ‘햇빛에 비추어 입증된, 순수하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밝은 태양 빛 아래서 한 점의 흠이 없을 정도로 진실하고 흠 없는 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벧후 3:14에서 주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라고 권면합니다. 셋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즉 의(義)와 생명과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의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기쁨의 간증(빌 1:12-21)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질투와 경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는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앎이니라. 20 나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14절. ‘나의 당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된 일입니다. 그것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말은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의 일이 도리어 전진하고 확장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종들에게 닥친 어려운 일들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섭리하십니다(롬 8:28). 개인적으로, 고난은 성도들의 인격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들며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13절에 ‘시위대’(프라이토리온 πραιτωρίονͅ praitorion)는 로마 황제의 감옥 뜰을 말합니다. 그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그가 옥에 갇힌 것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나 ‘형제 중 다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전한 복음의 진실성은 그의 옥에 갇힘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습니다.
15-17절 “어떤 이들은 질투와 경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두 부류의 전도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질투와 경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질투하며 그와 경쟁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또 영혼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전도하였습니다. 전통 사본은 16절과 17절의 순서가 반대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옥에 갇힌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였습니다. 복음을 변명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보듯이 율법주의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사탄은 때때로 복음을 정면으로 반대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듯하면서 교묘히 그것을 가감하고 변질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전파와 변증의 일을 다 감당해야 합니다.
18-19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는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앎이니라.” 어떤 이들은 겉모습으로만 전도하였고, 어떤 이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전파되든지 간에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그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19절은 그의 기뻐함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이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시위대 안에서 전파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작정된 뜻이 우리의 간구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는데 필수적입니다. 복음이 시위대 안에 전파됨으로 또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바울은 그곳에서 풀려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일을 내다보며 또한 기뻐합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바른 동기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결코 경쟁심이나 외식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또 멸망하는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도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죄책과 온갖 불행의 멍에 아래 살며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영혼들을 구원해내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입니다.
20-21절. “나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의 내용은 그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범사에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진실과 의를 생명으로 여기며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일사각오로)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기를 항상 아주 담대히 원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생활신조입니다. 사도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를 원한 까닭은 그가 사는 것이 그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그를 통해 사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만 위한다면 사는 것뿐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 1:22-26)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2-24절. ‘육신으로 사는 것’은 육신의 생명의 연장을 의미하며, ‘내 일의 열매’라는 말은 그가 살면 주님과 복음 사역을 위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사는 것과 죽는 것, 그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하며 또 증거하기를 그 둘 중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즉 죽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영생과 천국의 진리를 아는 모든 성도들이 다 동감할 말입니다. 이 세상은 괴로운 세상이요 광야와 눈물의 골짜기와 같고 죽음의 그늘진 땅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참된 안식과 기쁨과 생명이 충만하게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죽어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 사모하지만,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유익하다’는 말은 ‘필요하다 needful’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리라.’ 이것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인생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분의 교회 곧 성도들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25-26절.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는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만일 그가 해야 할 사명을 다해서 더 이상 성도들의 믿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할 것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살 필요성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들의 믿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그들과 함께 거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26절의 ‘자랑’이라는 단어는 ‘기쁨 rejoicing’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서 빌립보교회에 가서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기쁨이 바울로 인해 풍성하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4.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30)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27절.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의 죽음으로 죄인들이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소식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며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복음 곧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신 의에 일치하게 죄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과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고 변호하는 일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엡 4:1에서도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라고 교훈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방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방향을 역행하지 말고 그 방향대로 바르게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복음을 위한 일치된 협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복음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위해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심으로,’ ‘한 뜻으로’라는 말들은 교회가 생각과 뜻에 있어서 일치되어야 함을 보입니다. 고전 1:10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빌 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성경은 ‘마음을 같이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고후 13:11; 벧전 3:8). 예루살렘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고(행 1:14),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행 2:46),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고(행 4:32),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행 5:12). 이와 같이, 우리는 일치된 마음으로 복음을 믿고 전파하고 변호하고 복음을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28절.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또 한 가지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으려 할 때와 복음을 전하려 할 때 항상 대적자들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사탄의 방해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과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생활과 전도의 생활에는 항상 환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과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자들은 그런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성도의 환난과 핍박은 그것을 일으키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표이며, 그것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증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는 말은 이렇게 진실히 믿고 핍박까지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4:7).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29-30절. 성도가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구원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 속에는 당연히 그를 위해 고난도 받는 것을 포함됩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조롱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마 5:11-12). 바울에게는 그런 고난과 싸움이 있었습니다. 바울뿐 아니라 빌립보교회도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경험한 교회였습니다. 모든 시대의 성도들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각오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 성도들의 믿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살 것이며,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더 좋은 복을 누릴 것입니다. 고후 5:8-9,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합니다. 롬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올해에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소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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