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94장 친애한 이 죽으니
<죽음과 슬픔과 위로> 요 11:1-44
서론 : 친애한 이 죽으니 우리 눈물 흘리며
슬퍼 머리 숙일 때 주여 위로하소서
주도 세상 계실 때 우리 슬픔 아시고
눈물 흘리셨으니 주여 위로하소서
눈물 흘리며 애조 띤 음성으로 부르는 이 찬송가는 장례식 찬송의 대표적이다. 본 찬송은 불행하게도 작사자는 미상으로 되어 있으나, 과거 합동 찬송가(570장)에서는 "주의 위로를 구함"이라는 제목으로 헨리 하트밀만 박사의 작사로 되어 있다.
베다니 동네의 마르다·마리아 자매는, 그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에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급보를 전하였다. 이는 빨리 오셔서 고쳐 달라는 간청이다.
그 당시 예수께서는 요단 강 건너편 베뢰아에 계셨다. 그런데,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께서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11:4)고 답변하시고,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러 보실 일을 다 보시고 천천히 베다니로 오셨다. 결국, 나사로는 이미 죽었고, 무덤에 장사 지내어 썩은 냄새가 날 지경이 되었다.
1. 죽음은 슬픈 것이다.
사람에게는 감정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슬픔을 당하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한다. 그런데, 천하보다 더 귀중한 생명이 끊어져 죽음이 닥치면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없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기뻐하는 것이 상정이요(요 16:21), 반면에 생명이 끊어져 죽으면 모든 사람이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것이 또한 인정의 발로이다.
여기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었다. 한창 젊은 나이인 청년기에 갑자기 죽었으니 얼마나 비감할 것인가! 어린이나 늙은이도 아니요,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가 죽었으니 그 자신의 비참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1) 가족(마르다, 마리아)들의 슬픔이 컸다.
세 식구의 가장되는 오라비의 죽음은 그 누이들에게 가장 슬픈 마음을 안겨 주었다. "사자는 무언이라"하였으니, 이제 남은 가족인 누이들의 슬픔을 어디다 비교하랴.
(2) 친구들의 슬픔은, 곧 사회적인 비애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물론,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33절)고 하셨다.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이 운 것은 사회적인 슬픔이다.
(3)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써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하셨는데(히 5:7), 과연 예수님의 우심이 성경에 세 차례 소개되었다.
① 본문(요 11:35)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의 개인의 사망을 슬퍼하사 울어 주신 것이요.
② 누가복음 19:41에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성이 죗값으로 멸망받을 것을 슬퍼하사 우심이니, 이는 애국·애족의 눈물이다.
③ 마태복음 26:37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슬픈 광경을 히브리 기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의 조문은 인류가 죗값으로 멸망받을 것을 생각하시고 심히 슬퍼하셨다고 하였다.
인생에서의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이다. 이 죽음의 슬픔은 무엇으로든지 막을 수 없고 멈출 수 없다.
죽음은 곧 슬픔이요, 슬픔은 곧 눈물이다.
2. 생명에 대한 인간의 갈망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으면 그 비애는 천하를 잃은 것과 같으니 얼마나 애석하고 분통이 터질 노릇인가! 그랫, 이 귀중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생은 갈급해한다.
(1) 사람은 누구나 건강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온갖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여 건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또 건강하기를 누구나 바라고 원한다. 그러나, 일단 병들어 괴로워질 때에야 비로소 병 낫기를 위해 애쓴다. 사람들은 병에 안 걸리기를 바라며, 불행하게도 병에 걸렸으면 빨리 고침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마르다 자매는 "선생님이 여기 계셨더면 죽지 않았을 걸…"하며 아쉬워했다. 이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의 발로이었다.
(2) 건강이 유지되면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
옛날 팽조가 800세를 장수하다가 죽으매 그 아내가 심히 슬퍼하며 울거늘, 이웃사람들이 "800년이나 살다가 죽었는데 무엇을 그렇게 슬퍼하느냐?"라고 비웃다시피 말하였다. 그러자, 팽조의 아내는 더욱 서러워서 "900년은 없나요, 1,000년은 없나요…"라고 말하였다. 이 일화는 누구나 죽지 않고 영생불사를 원한다는 뜻이다. 또한, 므두셀라도 969세를 살았으나, 그로서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일단 죽었으면 부활하기를 갈망한다.
사람이 한 번 죽는 일은 정한 이치이다(히 9:27). 그러나, 죽었다고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연구를 하게 된다.
유대인이 화장을 금하는 것은 부활신앙에 근거하며, 애굽인들이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보존하는 것도 영혼불멸설과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하나의 종교심인데, 그들이 부활의 교리를 믿지 않고 부활의 종교를 믿지 않으니, 이는 모순된 생활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사람이 죽은 후 다시 산다면,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생을 원할 것이다. 즉, 영원히 사는 것을 바란다. 장생불사가 아니라 부활 영생을 바랄 것이다.
3. 생명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위로
인생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은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자들에게 큰 위로를 베푸셨으니, 그는 곧 생명의 구주이시다.
(1) 예수님의 사망관 : "나사로가 잔다". <11>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전해 들은 주님께서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11절)라고 선포하셨는데, 실인즉 그때는 벌써 죽었던 때이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을 잠들었다고 하신 뜻은, 죽은 사람 살리기를 마치 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하실 수 있는 권능자이시기 때문이다.
① 인간의 역사를 휴식함은 잠자는 것과 같다.
사람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는 것이 원칙이며, 또한 살아서는 일하나 죽어서는 쉬는 것이 원칙이다.
②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잠자는 것과 같다.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외적 사물에 접촉되거나, 내심의 감정으로 인하여 온다. 그런데, 잠잘 때에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죽은 자가 고통을 잊게 됨과 같다.
③ 주의 재림 나팔소리에 일어나는 것이 잠자는 것과 같다.
새벽에 군영에서 기상나팔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면 잠자던 군인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듯이, 예수님 재림의 나팔소리가 울려오던 주 안에서 잠자던 자들(죽은 자들) 도 이 소리를 듣고 깨어 부활하게 된다.
④ 더욱 상쾌한 정신으로 일어나는 것이 잠자는 것과 같다.
대기 오염이 일어나기 전인 새벽은 공기가 매우 맑고 상쾌한 시기인 것과 같이, 부활한 후에는 누구나 기분이 상쾌하고 신선하여 자유를 누릴 것이 이와 같다.
(2) 예수님의 생명관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25-26>
마르다가 오라비의 죽음을 보고하며 슬피 울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시키신 사건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① 야이로의 딸을 부활시키시고,
②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③ 여기 나사로까지 부활시키셨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예언하셨던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 자신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입증하셨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므로 벌써 냄새가 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매 죽었던 나사로가, 냄새나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
결론 : 나사로의 부활은 후일 성도들의 부활의 예표요, 자매들의 기쁨은 후일 신자들의 기쁨의 예표이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
불신자들은, 일단 죽으면 끝이므로 슬퍼하며 애탈지라도 아무 소망이 없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비록 죽음을 당할 때, 육적으로는 슬픈 일이지만, 부활의 믿음을 통하여 위로받을 수 있다. 또, 형제의 슬픔을 위로해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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