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3장에서는 엘리후가 욥의 결백에 대해서 책망하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마지막에 욥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 자기는 의롭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니 계속해서 듣다가 엘리후가 욥의 의에 관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회개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나와야 합니다. 우리도 회개함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다 알리지 않으심(욥 33:1-33)
[1-7절]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하나님의 신[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살게 하시느니라]. 네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엘리후는 욥에게 자기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자기가 아는 바를 진실하게 말하겠다고 말한다. 죄인의 마음은 거짓되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거짓됨을 증거했고(렘 9:4-6), 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다(렘 17:9). 그러나 성도는 거짓을 버리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하였다(엡 4:25).
엘리후는 자신이 욥보다 나은 것처럼 높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자기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자기를 살게 하셨고 자기나 욥이나 다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하였다. 그는 허풍이나 허세를 품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말하기를 원한다. 엘리후의 이런 마음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바르고 선한 마음이다.
[8-12절]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욥은 자신이 깨끗하고 죄가 없으며 허물과 불의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성도가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삶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했고(행 23:1), 고린도전서 4:4에서는,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고 말했다고 말한다. 욥기 13:24, 27에 기록된 대로,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고 그의 발을 차꼬에 채우신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과 능력에 있어서 또 의와 선에 있어서 사람보다 크시다.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부족한 죄인이다. 또 고난은 우리에게 믿음과 겸손과 거룩을 위해 유익하다. 고난은 인생의 허무함과 천국의 가치를 더욱 깨닫게 해준다.
[13-18절]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辯爭)함은 어찜이뇨?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엘리후의 말은 옳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바에 대하여 스스로 진술하지 않으신다. 그는 진술하실 의무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의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그와 변론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잠잠히 순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제한적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본심은 고난이 아니고 평안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시편 30: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롬 8:28).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침묵하지는 않으신다. 그는 옛 시대에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지금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단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감각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이 확실히 교훈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그로 파멸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고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19-26절]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엘리후는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각한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은 뼈가 늘 쑤시며 입맛이 떨어져 음식 먹기를 싫어하고 살이 빠져 수척하며 보이지 않던 뼈가 튀어 나와서 그의 영혼은 죽음의 구덩이에 가까워진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혹은 ‘사자(使者)’]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보인다면] 하나님이[그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그를 긍휼히 여겨 말하게 하기를](NASB)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하게 하라].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만일 그에게 단 한 명의 사자라도 해석자로 있다면 그는 그를 긍휼히 여기며 옳은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것이다. 그것은,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살은 어린아이보다 연해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로 자기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의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는 회복될 것이다.
[27-33절]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야솨르)[옳은 것]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라는 원문(야쇼르 알 아나쉼)은 ‘사람들을 보며’(KJV)라는 뜻이다. 죄의 징계로 극심한 병의 고통을 받은 그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전에 범죄하여 옳은 것을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건지셨고 내 생명이 빛 곧 기쁨과 행복을 누리리라’고 간증할 것이다.
엘리후는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여러 번 이런 징계의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그로 하여금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지시고 생명의 빛 즉 영생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엘리후는 ‘구덩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18, 22, 24, 28, 30절), 그것은 죽음의 구덩이이며 결국 멸망의 구덩이인 지옥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망의 구덩이로부터의 구원이며 결국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욥이여, 귀를 기울여 내게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너를 의롭게 하려[의롭다 하려] 하노니 말하라.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엘리후는 모든 일을 정당히 판단하고 말하려 한다. 그는 욥이 옳으면 옳은 것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욥이 할 말이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의와 성결을 주장하며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욥처럼 의롭게 살아야 하지만,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거나 불평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말고 잠잠히 참고 믿고 순응하고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사람으로 교만치 않게 하시고 멸망에서 구원을 얻게 하신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로 병상에 던져져도, 그의 긍휼과 대속의 은혜로 회복될 것이다.
[민수기 3장 히브리어 주석강해] 레위인의 장자를 계수하라(민 3: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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