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설교말씀은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것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아니면 죄인이 구원받을 길이 없어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육체로 이 땅에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사 7:10-17 요 1:1-14)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화육(화육)하였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이성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불합리하고 신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처럼 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몸부림이다. 따라서 사람은 신성한 존재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랫사람 없다"는 말도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신기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 처럼 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이 너무나 위대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고린도전 3:16)
사람이 신성해지는 길이 무엇일까? 자기중심적인 삶의 성취가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의 성취"이다. 자기의 안전이나 성공을 위해 사는 인간이 아니라 남의 상처를 닦아 주며 그의 고난을 나누어지며 그를 일으켜 세우는 삶을 사는 사람이 신성한 존재이다. 곧 "작은 그리스도"가 된다. 사람이 하나님 처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마태 5:9)이다. 성 프란시스(St. Francis)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옵소서"라는 기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에게 주어진 책무는 화목케 하는 일(고린도후 5:18)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마태 5:44-45)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만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아들 딸들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은 원수를 사랑하여야 한다. 그것이 신성한 존재가 되는 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남북통일의 지렛대이다.
(2)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립보2:5- )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스스로 인간의 자리로 내려앉는 것을 뜻한다. 바하니안(G. Vahanian)은 말하기를 "성육신은 하나님의 운명을 인간의 운명과 연결시킨다"라고 하였다. 성육신의 목적은 인간을 그 죄에서 구원하는 데 있다.(마태 1:21) 이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육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약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이신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운명을 인간의 운명에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인간은 구원받는다.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께서 부활하신다. 죄인들은 하나님은 죽었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그 무덤이라고 역설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덤인 교회에서 하나님이 부활하시는 길,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길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열린다. 십자가는 "남을 위한 삶"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 16:24- )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 5:8)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 13:34-35)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요청하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운명을 인간의 운명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히 있을 것이지만 그중에 제일은 사랑(고린도전 13:13)이라고 했다.
(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태 1:23)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세계 밖의 다른 세계에 계시지 않고 인간세계에 계시다는 뜻이다. 인간세계 안에 계신 분으로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 4:18)
역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인간고를 아시며 그 멍에를 풀어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분이시다. 빈곤은 노예가 되고 질병에 시달리고, 불의한 권세의 억압과 수탈로 말미암아 초래되고 심화된다. 역사 안에 계신 하나님(예수)은 인간을 포로상태에서 해방시키고 질병에서 깨끗케 하시고 억압과 수탈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이분이 출애굽의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역사의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육신은 인간 긍정을 의미한다. 성령잉태의 현실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 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누가 1:48-53/공동번역)
시인 카릴 지브란은 "마리아의 찬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권력의 자리에서 바알을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이마에 땀을 흘리며
들판에다 씨앗을 뿌리는 가난한 농부들을
앉힌 사람도 그 아기였습니다"
역사의 하나님은 민중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역사를 권력중심에서 민중 중심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실 때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하나님의 성육신(성탄)의 메시지를 전해 주신 것이다. 인간역사의 중심이 권력으로부터 민중으로 옮겨 오는 이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 평화"(누가 2:14)가 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예수)이 되심으로써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시고 구원하셨다. 이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육신은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은 죽음으로 삶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사람들은 죽음은 인간의 한계상황이라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육신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고 죽음에 대한 인간승리를 역설했다.(고린도전 15:55)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감리교 교리적 선언 제2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심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야 한다. 그를 따라간다는 것은 너무나 멀고 힘든 일이지만 계속 따라가야 한다.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계속 따라가야 한다. 그때 예수는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신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이다.
[사도행전 성령강림 설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사도행전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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