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아가서 3장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꿈에서 솔로몬을 찾는 술람미 여인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꿈에서 조차도 사랑하는 신랑인 솔로몬 왕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찾아도 찾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꿈에서 솔로몬을 찾는 술람미 여인(아 3:1-5)
1절 알 미쉐카비 발렐로트 비카쉐티 에트 쎄아하바 나페쉬 비카쉐티브 베로 메차티브
아 3: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3: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 2:17에 이어 술람미 여인의 말이 계속된다. 여기서 '밤에'의 히브리어 '발렐로트'는 복수로서 '밤들에' 또는 '밤마다'(night after night, NEB)로 해석되는데, 이는 사랑하는 연인 솔로몬 왕을 밤에 계속 찾았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혹자는 본절에서 술람미 여인이 꿈속에서(Delitzsch, Lange, Wycliffe) 또는 적어도 현실적인 사건은 아닌 꿈과 같은 상황 속에서 그의 사랑하는 연인을 찾았음을(Delitzsch)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찾아도 헛되리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우리는 이 배필이 아주 오랫동안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찾았지만 허사였다는 사실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여인은 마침내 그를 발견하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만족을 얻게 된다. 구약 교회가 의식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장차 올 좋은 일"에 대한 예표와 상징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오랫동안 기다린 후에야 그 위로를 찾았다.
구약 교회의 파수군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묻는 이들에게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시므온은 마침내 "자기 영혼이 사랑하던"그를 자기 팔에 안을 수 있었다. 이것은 개개 신자들의 입장에도 적용할 수 있다. 신자들은 왕왕 아주 오랫동안 캄캄한 중에 다니지만 "바로 그때가 되면 빛이 비칠 것이다." 그리스도를 끝까지 찾는 이들은 결국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이 여인은 자기 "침상에서" 어떻게 그를 찾았으며, 어떻게 그것이 허사가 되었는가?(1절) 이 여인이 일어나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비록 물러가긴 했으나 은혜의 활동과 작용으로 그녀는 멀리서 그를 볼 수 있었다(2:8). 그러나 이제는 경우가 다르다. 이 여인의 애정은 계속 그에게 있었고 이 여인의 "마음에 사랑하는 자"는 여전히 그였으며 언약의 결합력은 여전히 공고하였다. "비록 그가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그가 나를 떠나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하리라. 내가 그를 내 팔로 안지 못하는 때에라도 내 마음속에 그를 모시리라." 이 여인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목마르게 찾던" 때의 다윗처럼 그와 늘 가지던 교제를 원하였다. 이 여인은 그를 탐색하였다.
2절 아쿠마 나 바아소브바 바쉐바킴 우바르호보트 아바케솨 에트 쎄아하바 나페쉬 비카쉐티브 베로 메차티브
아 3: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3:2
이에 내가 일어나서 - 1절과 마찬가지로 술람미 여인이 지금 꿈속에서 솔로몬을 찾으러 나선 사실을 언급한 구절로 보기도 한다(Delitzsch, Wycliffe). 어쨌든 침상에 있다가 이제 밖으로 나선 것은 솔로몬을 필히 만나고 싶어 하는 의욕을 더 강렬하게 표출시키는 행동이라 하겠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들 또한 좀 더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 주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을 예시한다.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 '성중'이란 '예루살렘 성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Lange). 그러나 혹자는 본 구절의 '성중'이 꼭 예루살렘이 아니라 성벽이 있는 다른 어떤 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G. Loyyd Carr). 그러나 이 견해는 5절; 1:5; 2:7 등을 참조해 볼 때 다소 무리가 따른다.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 '거리'나 '큰길'은 각각 '쉐와크'와 '레호브'로서 성내의 대로(大路)나 넓은 광장(대하 32:6; 느 8:1)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밤에 침상에서"였다. 그것은 이미 늦은 때였고, 게으른 탐색이었다. 그녀의 오성은 어둡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밤에 하는 암중모색이었다. 그녀의 애정은 냉랭하였고 그녀의 침상에서 반쯤 잠들어 있었다. 지혜로운 처녀들도 신랑의 부재 시에 졸았었다. 그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어두운 때였다. 이 여인은 자기의 표적을 보지 못하였는데도 그 표적들을 찾았다. 그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비록 침묵과 고독 속에 있더라도 계속하여 그를 찾을 것이다. 그들의 "고삐"는 그들에게 심지어 "밤에"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이 여인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때로 그는 "그를 찾지 아니하는 자에게 찾아냄이 되나"(사 65:1). 여기에서는 그를 찾던 자에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여인의 타락, 나태와 안심에 대한 징벌을 위한 것이었거나(우리가 위로하심을 놓치게 됨은 그것을 올바로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 여인의 은혜, 믿음과 인내심을 단련하고 이 여인이 계속해서 찾을지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그리스도를 찾았으되 처음에는 그를 찾아내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를 발견함으로써 그 명예와 위로가 더 많아지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어떻게 이 여인은 밖에 나가 그를 찾았는데도 찾지 못하였는가(2절). 그녀는 은밀한 예배를 시도도 해보았고 골방에서 하는 제반 의무도 고루 거쳐 보았다. 침상에서도 그를 기억하였고 "밤중에"도 그를 묵상하였으나(시 63:6), 만남의 위로를 얻지 못하였다. "내 아픔이 밤에 뻗치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나이다"(시 77:2,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실망하지 않고 좀 더 다른 수단을 강구한다. 이 여인은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이제 내가 일어나리라.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여기서 찾을 수 없다면 여기에 누워 있지도 않겠고, 그가 물러갔다면 가만히 있지도 아니하겠다. 나는 이제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그가 내게서 더 멀리 가 버리기 전에 즉시 그를 찾겠다."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그를 탐색하는 자들은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나는 따뜻한 침상에서 일어나겠다. 깜깜하고 차가운 밤이지만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러 나가겠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어려운 일에 놀라서는 아니 된다.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즉 거룩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길거리나 큰길에서 찾으리라." 이 여인은 그가 어떤 막다른 골목에서 찾을 수 없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예루살렘에서 그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은 복음 교회의 예표였다.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유망한 장소는 성전이며(눅 2:46), 복음 교회라는 길거리와 거룩한 예식이다. 시온의 아들들은 모든 시간에 이곳을 통행하며 왕래한다. 이 여인이 "내가 이제 일어나리라"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선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전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선한 실행이었다. 그 여인은 일어나서 "그를 찾았다"(그리스도와 그에게 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를 추구하는 자들은 갖가지 시도를 다해 봐야 하며 안 간 데 없이 다 찾아다녀야 한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그를 찾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여전히 만족을 얻지 못하였고 평안을 얻지 못하였으며, 마치 사면팔방을 둘러보았으나 어떤 신적 은총의 표징도 감지되지 않았던 때의 욥과 같았다(욥 23:8, 9). 또한 이따금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얼굴을 숨기셨다고 불평한 시편 기자와 같았다(시 88:14). 우리는 의무의 길에 서 있으면서 위로를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이는 "바람이 그 불고 싶은 대로 임의로 부는"까닭이다. "내가 그를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였다"라는 호소가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강하게 강조되는 지를 알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도 이와 같다. "그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요 20:13).
3절 메차우니 하쇼므림 하소브빔 바이르 에트 쎄아하바 나페쉬 레이템
아 3:3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3:3
성중의 순행하는 자들을 만나서... 보았느냐 하고 - 2절은 '만나지 못하였구나'로 끝나는 반면에, 본절은 '...만나서...'로 시작된다. 이러한 시적 기교는 오매불망 연인을 만나기만을 희구하는 술람미 여인의 내면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G. L. C-arr). 본절은 술람미 여인이 야간에 순찰하면서 성 백성들을 보호하는 야경꾼들을 만나 그녀의 사랑하는 연인을 보았느냐고 묻는 장면이다. 델리취(Delitzsch)는 계속적으로 본절 역시 1, 2절과 같이 술람미 여자가 밤에 꾼 꿈을 독백 형식으로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본절이 꿈을 회상한 내용이든 실제 행동을 묘사한 것이든, 중요한 것은 솔로몬을 찾고자 하는 간절함 바로 그것이다.
이 여인은 그를 찾기 위해 행순하는 자에게 어떻게 물었는가?(3절) 밤에는 야경 군이 "성 중으로 돌아다니는데" 이것은 치안과 안녕질서의 보전을 위해서이다. 그들은 정직하고 평화로운 자들에게는 길을 안내하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제재(制裁) 자가 되기도 한다. 이 여인은 걸어 다니는 중에 이 야경 군들을 만났고 그녀는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어떤 정보라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이 여인은 예루살렘 길거리와 큰길에서, 이 여인이 설령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여인의 추구를 딴 데로 돌이키고 즐겁게 해 주기에 충분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그와 비교한 그 여인은 그 외에는 아무도 중히 여길 수가 없었다. 은혜로운 영혼은 그리스도를 추구하여 산더미 같은 다른 기쁨과 만족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나아간다. 그들은 저희의 가장 중한 기쁨보다도 그리스도를 우위에 놓는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속에서 천사들을 보게 되나 그것도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이상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끈덕진 물음에 의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사랑의 성실성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 혼인 집 손님들을 슬퍼할 것이며"(마 9:15), 특히 신랑을 물러가게 할 만큼 그를 노엽게 한 죄에 대해 슬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렇다면 그의 은총에 대한 인식을 회복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는 일에 부지런하고 꾸준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성경을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되며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거룩한 의식에 집착해야 하며, 우리 마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새기고 있어야 한다. "너는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보았느냐?" 그리스도를 직접 본 자들만이 타인들에게 그를 보는 것에 대해 지도를 해 줄 수가 있을 것이다. 명절에 헬라인 몇이 예배하러 올라왔을 때 그들은 여기 이 여인이 행순하는 자들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을 빌립에게 하였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요 12:21).
4절 키므아트 쎄아바르티 메헴 아드 쎄마차티 에트 쎄아하바 나페쉬 아하즈티브 베로 아르페누 아드 쎄하베티브 엘 베이트 임미 베엘 헤데르 호라티
아 3: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3:4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 고대 근동 지방에서 '어미 집'은 그 집의 여자 식솔들이 거하는 곳으로써 남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장소를 의미했다(창 24:67; 룻 1:8). 본 구절에서 술람미 여자가 솔로몬 왕을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사랑하는 이와 비밀스럽고 안락하게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어서이다.
이 여인은 마침내 그를 어떻게 발견하였는가?(4절) 이 여인은 행순하는 자들이 자기에게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 아무 소식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자마자 곧 그들에게서 "떠났다." 이 여인은 그가 그들 중에 없었으므로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고, 계속하여 그를 찾는 일에 정진하였다. 그 이유는(에인즈워드 선생의 견해처럼) 형제들의 사교나 교회의 교제나 목사들의 모임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직접 인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고통받는 양심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행순자들과 헤어지자 곧 자기가 찾던 자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전에 열망하던 만큼 이제는 기쁨으로써 그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찾는 자들은 결국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아마 그의 탐색을 바야흐로 포기하려고 할 즈음에 만나게 될 것이다(시 42:7, 8; 77:9, 10; 사 54:7, 8 참조). 우리는 실망으로 인해 은혜로운 추구를 포기해서는 아니 된다. 믿음과 인내를 끝까지 견지하라. "환상을 보는 데에는 정해진 때가 있으며," 파수군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더라도 종말에 가서는 그것이 저절로 "말할 것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방법을 사용해 가며 오래 기다리던 끝에 찾아오는 위로는 마지막에 가서 그만큼 더 달콤할 것이다.
이 여인은 그를 발견하게 되지 어떻게 그에게 가까이 매어 달렸는가? 이 여인은 이전에 그를 찾으려고 고심하던 때에 못지 아니하게 이제는 그를 잃을까 봐 불안해한다. "나는 그를 붙잡았다." 부활 후의 그리스도를 만난 여인들처럼 그를 꽉 붙잡았다. 이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었다"(마 28:9). "나는 그가 가도록 놓지 않겠다. 나는 그가 화나서 떠나가도록 할만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음과 기도로 그가 머물도록 설득하고 은혜의 작용에 의지하여 그가 내적 평안을 보존하도록 하겠다."
위로를 손에 넣는 일이 얼마나 힘들며 그것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로 구입되는 것인지를 아는 자들은 그것을 몰수당하거나 탕진해 버리게 될까 봐 두려워할 것이며 그것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온갖 힘을 다 기울일 것이다. Non minor est virtus quam cuoerere parta tueri─즉 "그것들을 만드는 데에 든 만큼 우리가 획득한 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에도 많은 것이 내포된다." 지혜를 얻은 자들은 그 지혜를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잠 3:18). 믿음과 사랑의 팔로 그리스도를 꽉 잡은 자들은 "그가 가도록 놓지 않을 것"이며 그는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이 여인은 타인들로 하여금 그를 잘 알도록 하기를 얼마나 열망하였는가? "내가 그를 내 어미의 집으로 데려갔으니 이는 나의 모든 친척들, 내게 소중한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와 교제하는 혜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삭게오가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을 때, 아니, 오히려 그가 그리스도께 발견되었을 때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던 것이다"(눅 19:9). 우리가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발견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를 우리와 함께 집으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되며 특히 우리의 마음속에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교회의 이익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교회가 항상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도록 해야 마땅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이나 사역자와 늘 함께 계시도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들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총의 표징을 즐기는 자들은 교회나 공공의 기능을 띄는 모든 경건한 집회도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그 은총의 표징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해야 하는 것이다.
5절 히쉐바에티 에트켐 베노트 예루솰람 비츠바오트 오 베아옐로트 하사데 임 타이루 베임 테오르루 에트 하아하바 아드 쎄테흐파츠
아 3: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3:5
예루살렘 여자들아...깨우지 말지니라 - 본절 역시 2:7처럼 술람미 여자가 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 본서에는 이와 같은 말이 세 번(2:7; 3:5; 8:4) 나오는데, 2:7이 사랑의 초기 단계에서 언급된 것인 반면에, 본절은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에서 그 사랑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지속하고자 하는 간절함 염원을 표현한 말이라 하겠다. 또한 본절은 일종의 후렴구로서 술람미 여자와 솔로몬 왕의 만남의 갑작스러운 귀결이라는 의미보다는 서로의 사랑이 깨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에게 어떤 방해도 가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여인은 무엇을 배려하였는가?(5절) 그녀는 자기가 이전에 했던 명령(2:7)을 되풀이하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의 딸(여자)들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자기 어머니의 집," 자기 자매들에게로 "데려왔을" 때 자기 형제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모든 것을 조용하고 질서 정연하게 행하며, 그를 매우 조심하여 주시하며 그를 즐겁게 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그를 화나게 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것이다. 광야에 있던 교회는 언약의 사자에 대해 명령을 받았는데 그들 가운데 있던 언약의 사자에 관한 명령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출 23:21).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너희 중 아무도 자기 위치에서 뛰쳐나와 그에게 방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조용히" 일하며 "네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라." 떠들지 말라. 모든 "소요와 악독을 네게서" 멀리 "내 버려라." 이런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임이라(엡 4:30, 31). 혹자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예수살렘 여자들에게 내리신 명령, 곧 자기 교회를 방해하거나 불안케 하지 말며 제자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의 안녕을 돌보는 분이시며, 그 모든 식구들과 작은 자까지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갈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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