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미가 5장 성경말씀 중에서 생명의 빛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내 안에 진리이신 예수님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빛이 있으면 흑암이 우리에게 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 어둠에 있지 않습니다. 항상 빛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여 복음의 빛을 세상에 비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 목: 생명의 빛
설 교 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말씀: 미가 5:2-5, 요한복음 8:1-12,
요 절: “예수님께서 또 일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주 제: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자
오늘은 구세주 강림절(Advent=coming) 셋째 주일로 지킵니다. 첫째 주일은 희망(Hope)을 뜻하는 보라색 초[초림 예언의 초]를 켰습니다. 지난 주일은 평화(Peace)의 연보라색 초[베들레헴의 초]를 켰습니다. 오늘은 기쁨(Joy)의 분홍색 초[목자들의 초]를 켭니다. 이사야 35: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오늘 강림절 촛불은 기쁨의 상징으로 밝힙니다. 주님께서 초림 하신다는 기쁜 약속으로 구원의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게 하옵소서. 곧 오소서 임마누엘! 하며 촛불을 밝힙니다. (성탄절 이브)은 사랑(Love)의 흰색 초[천사들의 초]를 켜며, 성탄절에는 그리스도의 촛불(가운데 흰색)을 켭니다.
이 성탄 계절에 집안과 교회를 장식하는데 성탄절 트리(Tree)와 불빛입니다. 이 점화의 의미는 이 땅에 참 빛 되신 구세주의 탄생을 뜻합니다.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성탄 트리 점화식에 참석해서 Merry Christmas!를 부활시켰습니다. 미국에서 25년간 이 용어가 공적으로 사라졌습니다.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 이슬람교도들이 축 성탄 대신에 보편적인 휴일 용어인 Happy Holiday!를 사용해 왔었습니다. 그 이후 Merry Christmas란 용어를 듣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 공약하기를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We will make America great again!)고 외치면서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로 회복시키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느지막하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공생애가 시작되고 세 번째 (요한 2:12, 5:1) 예루살렘으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한번 유월절을 지키러 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요한 복음서에서 세 번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셨다고 기록되어 공생애 3년이란 언급이 요한복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성전에 도착하셔서 가르치시며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다”고(요 7:28-29) 증거하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체포하려고 하속들을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 날에 자신을 ‘생수의 강’이라 밝히시고 목마른 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니 하속들이 체포할 구실이 없어서 자기를 보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다시 되돌아가 보고했습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초막절이 끝날 때는 네 개의 기름 그릇을 가진 촛대를 성전 안뜰에 비치하여 젊은 제사장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심지에 불을 붙였답니다. 이 불은 예루살렘 성내를 환히 비쳤습니다. 초막절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 큰 촛대를 중심으로 춤을 추며 축제를 마무리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53절에 보니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이 말씀은 주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헤어졌고, 주님을 체포하려던 자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요한복음 8장 1절에 보니 주님께서는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동산으로 거기 가셔서 쉬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감람산(Mount Olives)을 감람원(Olivet)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행 1:12). 사실 겟세마네 동산(아람어, 감람유를 짜는 곳)을 감람원으로 불렀는데, 감람산 동쪽, 예루살렘 성 동쪽에 있습니다. 감람원은 예수님의 기도처요 안식처이었습니다.
초막절 일주일이 지난 다음 날은 ‘심하 토라’(Simcha Torah=말씀을 주신 기쁨)의 날입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주님께서는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들이 어떻게 알고 모이기 시작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체포된 여인을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데리고 온 것을 주님께서도 용서해 주시고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시며 주님은 선언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고 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1) 주님을 따르는 생활 (2) 어두움에 다니지 않음 (3) 생명의 빛을 얻어 빛 가운데로 살아갑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명의 빛을 받으려면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촛대는 고정이 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할 때에 저들을 인도하고 보호해준 불기둥은 항상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움직이는 빛으로서 “나를 따르는 자는”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때는 한 여인을 살려주신 직후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 앞에 세우고 저들은 빙 둘러 포위했습니다. 저들이 온 목적은 분명히 8장 6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어제 오후 예수를 체포하는데 실패했는데 밤새 좋은 건수가 생겼습니다. 한 여인이 간음하던 현장에서 체포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자기들끼리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이 여인에 대해 예수는 어떻게 해결할까 시험함으로 책잡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레위기 20:10에 의하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또 신 22:23-24에도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간부와 음부가 함께 처벌받기로 되어 있는데 왜 이 여인만 잡혀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남자는 도망을 쳐서 체포하지 못하고 여자만 잡혀왔을까요? 아니면 남자는 슬쩍 봐주고 여인만 정죄를 당했을까요? 또 이 여인이 상습적인 창녀인지 아니면 한번 실수로 일을 저지른 지도 알 수 없습니다. 잡혀온 여인의 모습은 쉬이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있을 죽음 앞에 벌벌 떨면서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는 모습으로 주 앞에 섰을 것입니다. 평소에 죄인, 세리, 창기와 가까이 지낸 예수는 분명히 이 여인을 살려줄 것은 알고 있던 저들은 그냥 놓아 주어라고 한다면 율법 위반죄로 체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고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그치지 않고 한번 대답해 보라고 난리를 칩니다. 이 여인뿐만 아니라 예수에게도 돌팔매질을 하려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주님은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 없는 자”(헬라어, 호 아나마르테토스 ho anamartetos)란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죄 지을 욕망까지도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서 간음죄뿐 아니라 티끌만큼의 무슨 죄까지도 포함합니다. 주님은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모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노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그 현장을 하나씩 떠나더니 모두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서기관들도 바리새인들도 하속들도 모두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강제적인 방법으로라도 예수 앞에 왔을 때 구원함을 받고 생명의 빛을 받았습니다.
찬송가 287장(통 205장)은 작사, 작곡자 모두 미상인 복음송가입니다.
1)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2) 예수 앞에 나와서 은총을 받으며 맘에 기쁨 넘치어 감사하리라
3) 예수 앞에 설 때에 흰옷을 입으며 밝고 빛난 내 집에 길이 살리라
(후렴)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여기에 나오는 후렴 마지막 중 ‘영생 복락(永生福樂)’을 요약하여 오늘날 ‘영락’(永樂)교회 이름의 기원이 됩니다. 구원받기 위해 먼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주님과 진정으로 만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시은좌 Mercy seat]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4-5)
둘째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합니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시 1:1) 주님께서는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5, 11-12) 이사야 9:1-2의 말씀대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 (마 4:15-16)는 말씀이 실현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빛을 비추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이 ‘빛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빛이 있음으로 세상에 질서가 잡혔습니다. 텅 빈 공간에 빛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허무와 공허, 실패와 좌절의 어두움에 있던 상태가 빛으로 인하여 아름다움과 평화가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습니다. 빛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은 낮과 같이 아름답지만, 어둠 속에 살면 불행하며 마침내 멸망에 이릅니다. 로마서 13:11-14의 말씀을 묵상하십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줄 압니다.
셋째로,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생명의 빛은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말 4:2).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절망 아골 골짜기에서 소망의 문으로 인도합니다.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곳에 큰 군대를 일으킵니다. 어둠과 좌절을 뚫고 나가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힘이 없는 자에게 강한 능력을 줍니다. 외로운 자에게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평강과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망에서 영생으로 구원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느니라” (요 5:24). 이러한 생명의 빛을 오늘 이 시간 충만히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하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5-7) 생명의 빛은 모든 불의와 죄를 밝혀내는 동시에 회개하는 자의 영혼을 깨끗게 하며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는 천국이 건설됩니다. 이 생명의 빛 가운데로 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는 많은 경우에 여호와 하나님을 빛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빛이 여호와 하나님 이시다는 뜻이 아니라 빛이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불기둥으로 40년간 광야생활을 인도하셨고, 지성소에는 여호와의 임재(臨在, Shekinah)를 상징하는 불이 시은좌(Mercy Seat, 은혜의 보좌)에 항상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잔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영광을 다름 아닌 빛입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딤전 6:16)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1)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대언자]는 외치기를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사 2:5-11)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빛에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도는 어두워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반듯이 밝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빛에 행한다는 것은 물질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가 돈을 중심으로 살면 반듯이 여호와의 빛을 잃고 어두워집니다. 그다음에 여호와의 빛에 행한다는 것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제일로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이 인간을 타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순종의 본을 보이심으로 우리 인간을 빛 가운데 거하게 했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했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그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사 2:11)
우리가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세상은 영원히 어둡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자는 죄를 죄인지 조차 모릅니다. 음행과 교만 속에 살면서도 회개하지 못합니다. 지혜 있다 하나 미련하고, 깨끗하다 하나 더럽고, 도덕적이라고 하나 속은 부패하고, 거룩을 외치지만 회칠한 무덤입니다. 그리스 고린도에 가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마는 ‘통 항아리의 철인’ 디오게네스(Diogenes)가 등불을 들고 다니며 ‘사람을 찾소, 인간다운 인간 말이오’라고 새 시대의 인물을 찾았다고 합니다. 고린도의 대명사가 음담패설(淫談悖說)의 도시라고 알려질 만큼 당시 모든 청년들이 육정과 향락에 젖어 있었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린도를 정복 후 그 유명한 철인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습니다. 누추한 통 항아리 앞에서 마침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철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무슨 요구든지 들어주고 싶은 장군의 심정을 표한 것이다. 이때 철인은 내 원이 있다면 장군의 그림자가 태양을 가리니 좀 비켜 주시오라고 함으로 장군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알렉산더보다는 태양 빛이 더 중요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야말로 등불을 켜고 다녀야 할 때라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빛 말입니다. 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의 불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저 많은 사람들이 이 불이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누가 저 어두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불을 밝힐까요? 오늘날 교회가 이 시대의 등불, 등대 역할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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