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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1장 주일설교말씀] 자비의 열매(호세아 11:1-4, 갈 5:22-23)

성령의 능력 2021. 6. 2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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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호세아 11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자비의 열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인내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 목: 자비(Mercy)의 열매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말씀:  호세아 11:1-4,  갈 5:22-23,  누가복음 6:31-38

 

요    절: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 6:36)

주    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배워 우리도 자비가 넘치는 사랑을 실천하자

 

오늘은 성령의 열매 중 다섯 번째가 바로 ‘자비의 열매’를 묵상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Be ye therefore merciful, as your Father also is merciful.)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비하심이 인생의 폭풍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자비하라”는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필요할 때 도움을 베풀며, 꾸준하게 끝까지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For I desired mercy, and not sacrifice; and the knowledge of God more than burnt offerings.” (호 6:6) 여기서 인애란 자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우리가 자비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교훈으로 나눠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입니다. “남의 말 내가 하면 그 말이 돌아오고, 남의 흉 내가 보면 나도 흉을 잡힌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웁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단다. 예수님이 오늘도 내 귀에 속삭이며 하시는 말씀, “대접을 받으려면 남을 대접하여라” 영국 속담에도 보면 “남편들이여 아내에게 황후 대접을 하면, 황제 대접을 받을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섬기고 대접하고 받드는 것이 자비의 마음입니다. 앗시시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에 나오는 대로,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원합니다”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 20:35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고 하십니다. 받으려고 기대하면 실망이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돕는 베필(helper, helping mate)로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매일 아침 아내는 남편에게 “What may I help you today?" (오늘 무슨 일을 도울까요?)의 태도로 대하면 남편은 아내를 향하여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하고 싶소. 나는 오늘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까요?" (I wish to love you until I die. What can I do for you today?)라고 응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그 이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영광이 되겠습니까?

둘째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원수)을 사랑하고,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최선 다하여 도와주고, 기억조차 하기 싫은 사람이 물에 빠질 때 건져줄 수 있는 것이 자비입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 하는 자를 선대 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 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눅 6:32-35) 6.25 때 동생이 피난 내려 오다가 기차 위에서 떨어져 죽은 누나가 1994년 10월에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억울하게 눈물을 흘리며 김일성이 죽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을 줄 알았다면서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 심정 충분히 저도 이해합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공산당에게 많은 재산을 빼앗기고 부르죠아라고 저희 두 분 삼촌은 함북 무산 광산에 끌려가 지금까지 생사를 알지 못하고(만약 살아계신다면 110세), 저희 집안은 철원으로 쫓겨 가서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자비란 그런 사람까지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해 주었고, 보디발의 아내를 용서해 주었고, 떡 맡은 관원장을 용서해 주었듯이 말입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용서해 주신 주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찬송 15장(통 55장)은 찰스 웨슬레 목사님께서 작사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자비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늘로서 내리사  우리 맘에 항상 계셔 온전하게 합소서. 나의 주는 자비하사 사랑 무한하시니 두려워서 떠는 자를 구원하여 줍소서

2. 걱정 근심 많은 자를 성령감화 하시며 복과 은혜 사랑받아 평안하게 합소서. 첨과 나중 되신 주여 항상 인도하셔서 마귀 유혹받는 것을 속히 끊게 합소서

3. 전능하신 아버지여 주의 능력 주시고 우리 맘에 임하셔서 떠나가지 맙소서

주께 영광 항상 돌려 천사처럼 섬기며 주의 사랑 영영토록 찬송하게 합소서

4. 우리들이 거듭나서 흠이 없게 하시고 주의 크신 구원받아 온전하게 합소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천국까지 이르러 크신 사랑 감격하여 경배하게 합소서 아멘

셋째로,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눅 6:37). 우리는 남의 결점에 자비해야 합니다. 비판은 비평과 원망과 불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관심이 있기에 자기 자식이 잘못했을 때 더욱 야단칩니다. 그러나 비판과 정죄는 이어집니다. 사실 비판과 원죄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4:3-5) 누구에게나 허물이 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도 다 흠이 있습니다. 비판하기는 쉬워도 자기가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진행 중입니다. 축구장에 가면 22명 선수만 뛰고 있는데 모든 관중들은 비판하는데 익숙합니다. 사실 자신이 그 운동장에서 뛰어 보라면 더 많은 실수와 실책을 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같은 죄인 입장에서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오직 정죄하실 분은 죄가 없으신 주님밖에 없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주님 앞에 데려왔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주님을 체포하려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이 여인을 간음하게 만들고는 그 남자는 행방을 모르고 이 여인만 데리고 왔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쳐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실 무서운 도전이었습니다. 내가 만일 남을 비평하고 돌을 친다면 나는 나를 속이고 있으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깁니다. 예수님 당시 지도자들은 일말의 양심이 살아있어 다 도망갔으나.

만일 오늘 이런 일이 재연된다면 돌을 던질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랍니다. 자신도 돌에 맞을 각오를 하면서 말입니다. 이만큼 현대인은 뻔뻔스럽고 위선자이고 양심이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눅 6:37). 용서는 비판과 정죄의 반대 행위입니다. 용서는 본래 무엇으로부터 풀어준다. 속량해 준다. 대신 갚아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도 “누구를 대신하여 주는 것” (for-give)입니다. 내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창피하게 만들고 음모로 중상모략하여 명예를 훼손시키고, 매우 소중히 여긴 것을 훔쳐간 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가 내게 저지른 악행의 책임을 돌리지 않고 묻지 않고 없었던 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아를 죽이지 않으면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해 주시고 독생자를 선물로 주셨거든요. 나 자신이 온전히 용서받아야 할 존재이기에 나도 용서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자신은 용서받을 죄가 없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사람입니다. 남이 내게 잘못한 것을 알거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남의 필요에 대해 자비해야 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8) ‘주라’는 말의 헬라어 명령은 현재입니다. 주님이 직접 내리신 본부라는 말과 생활화되어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명령은 적극적인 자비를 말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약 1:5). 주는 자에게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는 만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줄 때 어떤 것을 기대하고 주지 말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고 풍성하게 사심 없이 베풉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허영진 목사, “너희도 자비하라” 참고, 크리스천 저널, 2009년 6월 5일자)

이처럼 자비의 원리는 든든한 인생을 건설하는 터전입니다. 죠지 스위팅(George Sweeting)은 말하기를 “내 인생의 마지막 날 내 생이 끝나는 최후의 여정에서 내가 얼마나 벌었는가 이것은 하나도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없다. 그때 중요한 물음이 있다면 “나는 얼마나 드렸는가?” 즉 가치 있는 사역과 놀라운 목적이 있는 그것들을 위해서 나는 얼마나 드릴 수 있었는가 이다”고 말했습니다. 널리 자비를 펼치며 주님의 사랑을 나눠 주는 사람은 병이 치유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습니다. 다시 회복된 욥은 친구들을 용서해 주고, 찾아온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선물을 베풉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자비한 삶은 폭풍이 와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자비를 주면 현세와 내세에 주님의 자비를 받을 것입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1933년부터 1945년 사이 뉴욕시장을 세 번 지낸 라과디아(LaGuardia)는 법관 출신이었습니다. 1차 대전시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고, 하원의원으로 군사비 지출을 반대하고 여성 참정권을 옹호했다고 합니다. 이 분이 법관으로 재판하고 있을 때 한 가난한 도둑을 맡았습니다. 그는 배고파서 빵을 훔친 죄로 잡혀와 법관 앞에 섰습니다. 10달러어치 빵을 훔친 죄로 그는 100달러의 벌금형을 내렸지만 갚을 수가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판결 후 그는 방청객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나는 판사로 피고에게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피고는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훔쳤습니다. 내가 이 피고를 위하여 10달러를 내겠습니다. 방청객 여러분들도 이 사람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에 모두들 감동되어 벌금 이상의 모금이 되어 그 돈을 이 청년에게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뉴욕 공항 중 하나가 라과디아 공항은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법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법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위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고 하십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율법을 온전하게 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 사회를 법과 질서가 온전하게 자리 잡게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입니다. (이성희 목사, “라과디아” 크리스천 헤럴드, 2009년 6월 9일 자에서 인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 안에서 거듭나서 ‘자비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새기며 날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실 것이라”(약 4: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 73:28)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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