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장 강해설교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책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구속사의 시작이고 다윗은 왕으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마 1:1-25)
1-17절,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세계’(世系)라는 원어(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족보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복음서들은 세상에 오신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는 책이며, 마태복음의 첫 부분은 메시아의 족보에 대해 말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약속된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다(창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자식으로 그 나라를 견고케 하시고 그 나라의 위(位)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삼하 7:12-13, 16).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사 9:6, 7; 11:10; 렘 23:5; 겔 34:23, 24; 호 3:5).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은 세 가지 진리를 보여준다. 첫째로,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 3:1).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 하나님의 때는 일반적으로 긴 세월을 필요로 한다. 아브라함은 주전 2천년경의 인물이고, 다윗은 주전 천년경의 인물이다. 수천년이 지나서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조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도 벌써 2천년이 지났지만 그는 반드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음으로 바라보자. 우리는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가 되자.
둘째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 성실하신 분이시다. 그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과, 다윗의 자손으로 영원한 왕위를 얻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사람에게는 약속을 쉽게 어기는 불성실함이 많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경우도 있고 돈에 대해 불성실한 일도 있다. ‘배약’(背約) 즉 약속을 어기는 것은 죄악이다(롬 1:31). 그러나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는 약속대로 메시아를 보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특히 시간과 돈과 말에 있어서 약속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약속에 성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인격자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자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만세 전에 계획하며 작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주권적 능력자이시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킬 경우가 있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행할 능력이 있으시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그의 때와 그의 하시는 일을 기다리자.
[2-3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일이 언급되어 있다. 유다가 다말에게 들어간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비록 그의 아내가 죽었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지라도, 그가 다말을 창녀로 알고 그에게 들어간 것은 부끄러운 실수이었다. 그 여자가 바로 자기 며느리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다말편에서 볼 때에도 시아버지가 옛날 풍습대로 막내아들을 자기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할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심히 악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다말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그 부끄러운 실수와 다말의 그 악행까지도 그의 메시아 약속 이행을 위해 사용하셨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악한 일까지도 그의 거룩하고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셨다.
이 일은 또 하나님의 구원이 어떠함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주로 오셨다. 그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아셨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수치스러운 죄악들을 깨끗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과거의 부끄러운 실수들과 악행들 때문에 뒤로 물러나지 말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義)만 믿고 의지하며 이제는 거룩하고 선하게만 살자.
[4-5절]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라합과 룻이라는 두 여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다. 그 둘은 다 이방인이었다. 한 사람은 부도덕하고 천한 신분의 이방 여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젊어서 과부가 된 불행했던 이방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 둘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라합은 천한 죄인이 존귀한 성도가 된 경우이고, 룻은 불행한 이방인이 복된 선민이 된 경우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어떻게 여리고 성의 창녀가 메시아의 족보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가엾은 무명의 이방 여인이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언급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사도 마태가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분명히 신약시대에 있을 이방인 구원을 예시한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비천한 이방 죄인이었던 우리가 존귀한 성도의 회에 들어왔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그가 약속하신 천국 영광을 바라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자.
[6절]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우리야의 아내라는 여인도 언급되었다. 우리야는 다윗의 충성스런 병사이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 죄를 은닉하기 위해 우리야를 전장(戰場)에 내세워 고의로 죽게 한 것은 큰 죄악이었고 다윗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큰 오점(汚點)이었다. 그것은 비록 실수로 시작되었다고 할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고의적 악행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엄한 징계를 겪어야 했다. 밧세바가 낳은 첫 아기는 죽었고 다윗은 자기의 집에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않는 징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실수 외에는 다윗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큰 죄를 범한 경험이 있는 다윗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된 행위를 인정하신 것은 아니나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죄악되고 실수투성이이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누추하고 연약한 인간을 사용하여 그의 뜻을 다 이루셨다.
이 일은 마치 요셉을 판 형들의 악행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이 된 것이나, 가룟 유다의 배신이 인류의 구속(救贖)을 이루는 일이 된 것과도 같다. 악을 행한 자들의 악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실 것이지만, 그 악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좌절되지는 않았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긍휼로 그의 일들을 이루신다. 인류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찬송하며, 또 어떤 상황에서도 낙망치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7-11절]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악한 남자들도 많이 들어 있다. 다윗의 자손들인 유다의 왕들은 대부분 악한 자들이었다. 솔로몬은 노년에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교만한 자이었다. 아사는 경건했으나 말년에 발에 병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에게 구하였다. 여호사밧도 경건했으나 악한 왕 아합과 교제를 끊지 않음으로 그의 자녀들의 타락과 부패의 길을 닦았다. 여호람은 아합의 딸을 취함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본받았고 말년에는 하나님이 치시므로 창자에 고치지 못할 병이 들어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의 이름은 생략되어 있으나 그들도 다 악한 자들이었다.
그 다음, 웃시야는 교만해져 제사장의 일을 하려 하다가 나병이 들어 여생을 마쳤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었다. 그의 많은 우상숭배로 유다 왕국은 결국 멸망에 이른다. 아몬, 여고냐(여호야긴) 등도 악하였다. 마침내 유다 왕국은 멸망하였고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로 이어진다. 구약 역사 전체가 그러하지만, 특히 유다 열왕들의 340여년의 역사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메시아의 계보는 그런 연약한 인간들을 통해 흘러내려왔다. 사람들의 많은 부족과 무력(無力)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오셨다. 하나님은 주권자시요, 그의 주권적 긍휼은 죄인들을 능히 구원할 구주를 보내셨고 또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나 현대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부패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믿자. 악인들은 악을 행할지라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오직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참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부흥케 하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일들을 위해 힘쓰자.
[12-17절]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님이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의 것과 좀 다르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법적 부친인 요셉으로부터 올라가면서 헬리, 맛단, 레위로 이어지고, 또 레사에게서 스룹바벨로, 또 나단에게서 다윗으로 이어 올라간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두 족보들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다음 몇 가지의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옛 시대에나 오늘날에나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 가룟 유다 대신에 한 사람을 뽑기 위해 추천된 자들 중 한 사람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었다(행 1:23). 이와 같이 같은 사람이 다른 이름들을 가진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옛 시대에나 오늘날에나 입양(入養) 제도가 있고, 특히 옛 시대에는 수혼(嫂婚) 제도, 즉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명기 25:5-10은 수혼제도를 율법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제도들은 혼선 같아 보이는 어떤 족보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셋째로, 여러 유력한 주석가들은 누가복음 3장의 족보가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 것이라는 추측을 제안하였다.
비록 우리가 두 족보들 간의 차이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두 개의 족보가 다 진실하고 정확함을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진실성과 영감성과 권위성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태와 누가의 증언을 둘 다 참되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 나머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이 진실한 증거의 책임을 알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행하고 소망해야 한다.
18-25절,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심
[18-2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그 여자의 맏아들](전통본문)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18절부터 25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의 사실을 증거한다. 첫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밝히 증거한다. 그 증거는 여섯 가지 면에서 더해진다. ① 마리아는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18절), 즉 아직 육체 관계를 갖기 전에 아기를 임신하였다. ② 그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18절). ③ 요셉은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19절). 왜냐하면 약혼녀인 마리아의 임신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④ 마리아와 조용히 헤어지려고 생각하는 요셉에게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음을 증거해주었다(20절).
⑤ 메시아의 처녀 성탄의 사실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의 성취이었다. 이사야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자유주의자들이 ‘처녀’라는 말(알마)을 ‘젊은 여자’로 번역하려 했지만, 그 말은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로 볼 때 ‘결혼한 젊은 여자’를 가리키지 않고 ‘처녀로 간주되는 젊은 여자, 즉 소녀’를 가리킨다고 본다(창 24:43). 그러므로 헬라어 70인역은 이 단어를 ‘처녀’(파르데노스)라고 번역하였다.
⑥ 예수 그리스도의 법적 부친인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그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24, 2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다는 사실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되시는 것은 합당하였다. 신약성경도 이 점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한 훌륭한 유대인이거나 어떤 탁월한 종교적 천재가 아니셨다. 우리는 단순히 그의 사상이나 인격을 본받는 자들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를 본받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모범 이상이시다. 그는 우리의 찬송과 경배의 대상이시다. 신약성경은 그에게 신적 명칭, 신적 속성들, 신적 사역, 신적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동등한 분이심을 믿는다. 그의 모든 기적들은 그를 증거한다. 우리는 그의 신성의 영광을 믿는다.
둘째로, 이 부분은 메시아의 사역의 목표를 분명히 언급한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헬라어는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와 같은데, ‘구원’이라는 뜻이다. 메시아의 사역은 구원 사역이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자 곧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구원은 단지 병이나 가난이나 자연재해 등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고,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죄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요, 그 외의 것들은 죄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이다. 메시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눅 5:32; 마 9:13 전통본문). 그의 사명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외의 문제들은 장차 천국에서 다 해결될 것이다.
그는 엄격히 말해 ‘자기 백성’ 즉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성경은 선택의 진리를 가르친다.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요 6:37, 3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고 증거하였다(엡 1: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들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신다. 그 일은 지금 참 교회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전도는 교회의 첫 번째 임무, 곧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그들의 몸과 시간과 물질을 거룩하게, 즐거이 드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법적 부친으로 택하신 요셉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 ① 요셉은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19절).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었다. 그는 천사의 지시를 즉시 순종하였다(24절).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즐거이 따르는 자가 의로운 자이다. 우리는 경건하고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② 요셉은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리아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19절). 그는 마리아를 의심하였을 것이며 또 자신이 받을 억울한 비난이나 벌을 피하기를 원하였을 것이지만, 아직 어떤 확실한 단서를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또 마리아를 위하는 생각에서 그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을 것이다. 정확하지 않은 헛소문을 전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일이다. 출애굽기 23:1은,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라”고 말한다. 또 전하는 내용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남의 은밀한 단점을 퍼뜨리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다. 잠언 11:13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③ 요셉은 절제심이 있었다(25절). 그는 천사의 지시대로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그 여자의 맏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전통본문). 그는 자기의 육신적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였다. 자기의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는 것은 높은 덕이다. 잠언 16:30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또 갈라디아 5:22-23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 중에 절제를 포함하였다. 우리는 절제의 덕을 구하자.
넷째로, 왜 오늘날에는 천사가 꿈에 나타나는 일이 없는가? 물론 오늘날에도 천사가 나타날 수 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믿었으나, 우리는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 단지, 오늘날에 천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옛 시대에 천사들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의 기적들과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로 이루신 속죄사역과 그 진리를 증거하는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완료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충족하게 다 기록되었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누가복음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13:8-10,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개혁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게 계시하신 이전의 방식들이 중단되었다고 믿는다.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임을 믿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 “. .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 지금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는 오직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으로 충분함을 알자.
[사도행전 6장 설교말씀] 직분자 선택의 원리(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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