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광복절 주일예배 설교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죄악 가운데 묶여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사탄에게 붙잡혀 있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희년의 해방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방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제목: 그리스도의 복음(33):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들” (고전 4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고전 4:1~21
요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 (고전 4:1)
주제: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주님께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의 판단만 받는다
오늘은 대한독립이 성취된 광복절光復節 76주년을 맞이합니다. 축도 전에 부를 애국가는 1908년 출판된 <찬미가, 한영서원 간, 윤치호 편집> 14장에 수록된 가사(현재 우리 애국가와 거의 같음, “하나님이 보호하사”로 나오고 4절에서 “이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로 되어 있는데 오늘날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로 됨)로 4절까지 부르며,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의 곡조인데 우리 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의 곡조로 부릅니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우리 겨레는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오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드렸는데, 마침내 일제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3년 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로 건국이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오늘을 “조국 해방(祖國 解放)의 날”이라 부릅니다. 제2차 세계 대전말 194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되어, 그해 11월 말에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중화민국 장제스(장개석) 3국 지도자들은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 의논한 결과 2차 세계대전 종전방안을 협의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한국을 자유 독립시킨다는 내용이 담긴 소위 “카이로 선언 Cairo Declaration”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였고, 연합군은 1945년 7월 26일에는 포츠담(Potsdam, 독일 베를린 근처도시)에 회동을 가진 후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을 발표했는데,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전후질서 구축 문제를 논의한 회담인데,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처칠 수상,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이 선언에 서명하였습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전보로 이 선언에 동의를 했습니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045년 8월 15일 정오에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여 한국은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광복을 축하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될 때는 대한제국으로 한 나라였던 한국이, 포츠담 선언으로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한은 미군정(US military government), 북한은 소련군정(Soviet Unions military government)으로 되어 완전한 독립국이 되지 못한 채 해방되어 76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해방된지 5년 만에 한국 동족 상잔인 6.25전쟁이 3년간 일어났습니다. 이제 복음으로 남과 북이 통일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겔 37:16-17) 하듯이, 막대기 하나에 남한이라 쓰고, 다른 막대기 하나를 북한이라 쓰고 두 막대기를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가 속히 실현되기를 기도합시다.
지난 주일 밤(8월 8일)으로 동경에서 개최된 32회 하계올림픽(일명 코로나19 대회)이 막을 내렸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 연기하다 열린 게임인데 지내고 보내 차라리 작년 예정대로 열렸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최근 참가한 올림픽에 비해 메달도 적고, 순위도 16위였습니다(8개 종목에서 금6, 은4, 동10, 총20개), 양궁과 펜싱, 남자 기계체조 도마에서 금메달 받았고. 여자배구는 4위, 남자 수영 자유형 100m 5위, 남자 다이빙 3m 스프링보드 4위, 높이뛰기 4위 등 미래 올림픽 메달에 밝은 꿈나무들의 탄생도 보았습니다. 메달을 받거나 최선을 다해 박수를 받은 운동선수들 가운데 교회 다니는 청년들이 많습니다(News J 보도. 신재환, 김민정, 오상욱, 우상혁, 안바울, 조구함, 공희용, 권영준, 마세건, 서지연, 최수연, 안세영, 신승찬 등). 감사한 일이며 체육인 선교를 통해 아직 교회 다니지 않는 체육인들에게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합시다. 3년 후 파리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립니다.
요즘 날씨는 무더위가 좀 누그러져 열대야(25도 이상)도 나아지고 저녁과 새벽에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또 소나기가 가끔씩 지나가 날씨도 다소 시원해졌습니다. 지난 토요일(8월 7일)은 입추 (‘가을이 시작하는 날’)였고 지난 화요일(8월 10일)은 말복이어서 더위가 절정을 이룬 것 같습니다. 8월 경건의 달을 보내고 있는데 말씀 묵상, 기도 생활, 사랑 실천을 계속하여 경건성을 회복합시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4장을 강해합니다. 교회 내분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교회의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모두 동역자들임을 잊지 말자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는 충성, 성도끼리는 겸손을 강조합니다.
1.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들(고전 4:1-5)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 2 또한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판단을 받거나 사람의 판단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니라. 참으로 나는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나는 판단 받을 아무것도 스스로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이로써 내가 의롭게 되지는 아니하였나니 오직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시니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오실 때까지 때가 이르기 전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분께서 어둠의 감추어진 일들을 빛으로 가져가 드러내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드러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리라.
1-2절. 목회자나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주님께만 충성을 다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복음은 만세 전부터 구약시대까지 감취었다가 말세에 밝히 계시된 비밀의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즉 관리인으로서 그 복음을 충성되이 해설하고 전파합니다. 신약교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또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 즉 그들이 충성된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충성되다는 것(be faithful)은 항상 믿음으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입니다(갈 5:22). 우리는 성신님의 도우심으로 범사에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시고 사용해 주시는 주님께 절대 충성하면 교회 분열은 사라집니다.
3-4절.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모든 판단권, 심판권, 인사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의 판단을 크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이런저런 판단에 너무 마음을 쓰면 주님의 일을 힘있게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치 않으며 스스로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성도는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 자책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바울은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요셉도 아버지 야곱이 별세하셔서 장례를 다 치르고 나서 불안에 떨고 있는 형들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소서.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제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습니다(창 50:19-21). 요셉도 모든 심판권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니엘이란 이름 자체의 뜻이 “하나님께서 나의 재판장이심”으로 다니엘은 평생 그렇게 살았습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판단하고 심판하니 분열이 생기고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행하면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낙망치 않고 주님의 일을 담대히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탄의 가장 큰 전략의 하나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힘을 빼는 일입니다. 판단과 낙망은 큰 시험입니다.
5절.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씀은 두드러진 이단 사상이나 도덕적 오류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지적하고 책망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여기에 판단치 말라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점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진실성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궁극적 심판자이십니다(the ultimate Judge).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고 철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선하고 충성된 종들은 위로와 칭찬을 들을 것이며, 악하고 불 충성된 종들은 책망과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 때까지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점들을 거론하여 남을 비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충성의 여부와 충성의 정도를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드러난 이단 사상과 오류는 지적되어야 하지만,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주님께 다 맡겨두면 됩니다. 주님께서 완전히, 철저히 판단하실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전 4:6-8)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들을 비유로 나 자신과 아볼로에게로 옮겨 적용시켰나니 이것은 너희가 기록된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을 우리 안에서 배우게 함으로 너희 중의 아무도 한 사람 편을 들고 다른 사람을 반대하며 우쭐대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하느냐? 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이제 네가 그것을 받았을진대 어찌하여 그것을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는 이제 배부르고 이제 부유하며 우리 없이 왕처럼 군림하였도다. 너희가 군림하는 것을 내가 하나님께 바라노니 이것은 우리도 너희와 함께 군림하려 함이라.
6절.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들에 불과합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도는 그들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그들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종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말고 자신의 무익함을 항상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역자들을 높이어 파당을 만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대적하는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교만(pride)은 타고난 인간 본성의 큰 결함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자기의 위치를 벗어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합니다. 참된 성도의 모습은 온유하고 겸손함에 있습니다. “
7절. 누가 성도를 세상 사람들 중에서 구별하였나요? 또 누가 직분자들을 성도들 가운데서 구별하였나요? 이 모든 것을 구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여 구원하셨고 또 그 가운데서 어떤 이들에게 교회의 직분까지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직분은 우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도 내 것이 아니고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세상을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도 내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그것이 나를 떠나갈 수 있습니다. 부모님도,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친척도 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섬기게 된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 죄사함받고 천국과 영생을 기업으로 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성신님을 받은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들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영적인 것들과 육적인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본래 우리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이 남의 것을 가지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자랑해야 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만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8절. 고린도 교인들은 물질적 부요함과 풍족함, 또 정신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 서로 분쟁하고 파당을 만든다면 그 부요와 풍족함, 그 자유는 복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겸손케 하는 가난과 속박이 그들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의 겸손(고전 4:9-13)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께서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정하신 자같이 마지막에 두셨나니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며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멸시를 받는도다. 11 바로 현재 이 시각까지도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일정한 거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우리 손으로 일하며 욕을 먹으나 축복하고 핍박을 받으나 그것을 참으며 13 비방을 당하나 간절히 권면하노니 우리는 이 날까지 세상의 오물같이 되고 모든 것의 찌꺼기가 되었노라.
9절. 바울의 형편은 고린도 교인들과 정반대입니다. 사도는 주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말씀을 위탁하시며 기적 행할 능력을 부여하신 자이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직분입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이었습니다(엡 2: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존귀한 직분자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막장 드라마에 두셨습니다. 가장 존귀한 자를 가장 미천한 위치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구경거리,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10-13절. 사도의 비천함은 전적으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한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되고 비천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가 전한 그 동일한 그리스도 때문에 지혜를 얻고 힘을 얻고 존귀를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이 인류의 구원이 되었듯이, 주님의 종들의 비천하여 보이는 사역들이 많은 사람을 구원의 복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의 일행이 당한 고난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없었고 매맞았고 거처할 곳이 없었고 손으로 일했고 비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참고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을 한 마디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비천함에 두신 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그들로 겸손케 하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확실히 가난과 고난은 사람을 겸손케 합니다. 둘째로, 그것은 그들로 하나님과 내세에 소망을 견고히 두게 하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가난과 고난은 육신적 쾌락의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풍족함보다 장점이 있습니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난은 믿음이 어린 신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한 뜻도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그것은 복음 사역자의 길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임을 증명할 것입니다. 또 그것은 진리의 진리 됨을 증거하고 진리 운동이 육신의 양식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증거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상에서 높아지고 존경을 받고 부유해지고 존귀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세상의 영광이 헛됨을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전 1:2-3; 사 40:6-7).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세계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현재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계 21:5). 장차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올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되고 무가치함과 오는 세상의 참된 가치를 알고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의 사도들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의 부귀영광을 구하지 말고 우리의 소망을 내세에 두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갑시다.
4. 나를 본 받으라(고전 4:14-21)
14 나는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들을 쓰지 아니하며 다만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하듯 너희를 타이르려 하노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만 명의 스승이 있다 해도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낳았느니라. 16 그러므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들이 되라. 17 이런 까닭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주님 안에서 신실한 자인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나니 내가 모든 곳에서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가 너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길들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지금 어떤 자들은 내가 너희에게 가지 아니할 줄로 생각하고 우쭐대고 있도다. 19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면 내가 곧 너희에게 가서 우쭐대는 자들의 말이 아니라 권능을 알아보리니 20 하나님의 왕국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권능에 있느니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가랴, 아니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가랴?
14-16절. 사도바울이 자신의 비천한 형편을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면하기 위해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합니다. 그는 스승이라는 말과 아비라는 말을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스승은 단순히 이미 믿은 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비는 처음 전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 자를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전도를 통해 설립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습니다. 참 선생도 사랑을 가지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비의 사랑은 많은 선생들의 사랑보다 더 큽니다. 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 Be ye followers of me.’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그의 낮아짐, 그의 비천함, 그의 겸손, 그의 충성심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은 높은 마음에서 생긴 분쟁과 분열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높은 마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이 바울이 당한 비천함과 겸손을 듣는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7-21절. ”이런 까닭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주님 안에서 신실한 자인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나니 내가 모든 곳에서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가 너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길들을 생각나게 하리라. 지금 어떤 자들은 내가 너희에게 가지 아니할 줄로 생각하고 우쭐대고 있도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면 내가 곧 너희에게 가서 우쭐대는 자들의 말이 아니라 권능을 알아보리니 하나님의 왕국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권능에 있느니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가랴, 아니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가랴?”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생생하게 확증할 한 사람을 그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는 디모데입니다. 그는 바울이 주님 안에서 아들같이 사랑하는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활동을 하였으므로 각처 각 교회에서 바울의 가르친 바를 그들에게 증거하여 주었습니다. 그의 증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겸손을 실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가지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들에게 나아갈 것이며 교만한 자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말로는 가장 고상한 이상을 논할 수 있고 가장 고결한 윤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뿐이라면 공허합니다. 말과 실제는 다릅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전력의 힘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듯이, 말은 이론이요 힘은 실제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능력의 나라입니다. 주기도문 송영에서 “대개 나라과 권세와 영광이 무궁토록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로 마무리합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능력이 약동합니다. 거기에는 이론만 있지 않고 또한 삶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의로운 인격과 삶, 거룩한 헌신과 봉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은 아버지와 같이 그들에게 감히 “나를 본받으라”라고 권면합니다. 참된 구원은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변화된 인격과 삶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으로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을 본받고 또 남에게 언행과 믿음, 사랑과 정절에서 본이 되기를 기도하고 힘씁시다.(딤전 4:12) 아멘.
[오늘의 기도]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는 심정으로 일제 강점기 때에 나라의 독립을 기도했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노래하는 역사의 생명을 품었습니다. 때가 되매 주님께서 우리나라를 일제의 포로에서 돌려보내주시고 오늘 광복을 주셨습니다. 저희는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찬 550장 2절). 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우리나라에 완전한 독립인 복음 통일,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속히 허락하옵소서. 더욱 주님 안에서 겸손하고 충성 다하여 주님 안에서 온 교파가 하나가 되게 하시고 한 교회로 연합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욥기 3장 히브리어 강해] 생명을 탄식하는 욥(욥기 3: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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