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신명기 20장 설교말씀 중에서 전쟁에서 주의할 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 목: 전쟁에서 주의할 점
성 경: 신 20:10-20
우리가 가진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 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때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고, 때로는 문학을 열거하는가 하면, 때로는 예술의 깊은 경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경제에 관한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인 대격변 즉 누가 권좌를 잡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피 흘리는 내용을 보여 주기도 한다. 다윗 이후의 권좌를 잡기 위한 압살롬과 아도니야의 계략이나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남북 왕조를 분립한 사건은 성경이 그렇게 좋기만 한 기록이 아님을 보여준다. 여기에다 국가 외적으로 블레셋, 모압, 암몬, 애굽 등 이방 국가들과의 싸움은 이스라엘을 매우 피곤하게 한 요소들이었다.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가나안을 살펴보고 돌아와서 토로한 말 즉 '우리는 저들 앞에서 메뚜기 같다'라고 표현한 것은 전쟁의 과정을 지내 온 히브리 백성들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말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회막을 중심으로 살아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전쟁에 관한 말씀을 꺼내셨다. 전쟁을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에 관한 기록은 신명기 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내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가리켜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싸울 때 하나님이 함께 싸워 이기게 하신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이 전쟁을 가리켜 이스라엘은 성전(성전 HOLY WAR)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전쟁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규정한 배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삼상 17:47에서 소년 다윗은'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라고 외치며 골리앗 앞에 나아가 승리하였다. 하나님과 함께 한 전쟁의 승리였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시는 분이시다. 때로는 사로잡으라고도 하시고 때로는 전리품을 너희 것으로 삼으라고도 하시며 때로는 모두 불태워 버릴 것을 명하신다. 여리고성을 7바퀴 돌아 정복하게 하신 말씀은 또 얼마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말씀인가? 이 모든 사실을 볼 때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싸움에 관한 한,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순종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순종을 보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지시하신 것은 무엇인가?
1. 두려워하지 말라! (1)
전쟁에 나가는 사람은 원수와 싸우기 전에 먼저 자신 속에 있는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시골 장터에 가면 이따금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닭이나 개 혹은 황소를 가지고 싸움을 붙여 돈내기를 하는 것이다. 때로는 큰 상품이 붙어 있어 주인을 이롭게 하는 경기이기도 하다. 부리와 깃털 관리를 잘해서 한껏 멋을 부린 두 마리의 수탉이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잔뜩 치켜든 채로 금방이라도 달려들듯한 모습은 보는 이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기를 쓰고 달려드는 모습은 처절하다. 도무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은 한 놈이 쓰러져 다리를 부르르 떨게 된 때에야 덤벼들던 놈은 물러선다.
전쟁에 나간 백성들 앞에서 제사장은 큰 소리로 말한다.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3) 이스라엘이 여리고 앞에 섰을 때 여리고 성읍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문을 다 들은 뒤였다. 그들은 두려워서 성문을 굳게 잠갔다. 여리고 성읍을 한 바퀴씩 돌 때에도 공격 한번 하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저들이 무슨 짓을 할는지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그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채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두려움은 전쟁에 나가는 사람에게 가장 큰 장애 요소이다.
전쟁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 요소이다. 지난달 28 일은 수요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는데 잘 나오시던 분이 안 보이는 것이었다. 아이고 그날이 '지구 종말의 날' 이라더니 휴거 했나 보다 했더니 문이 열리면서 뒤늦게 예배실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 만만하게 일분일초도 틀림없이 주님이 오신다고 주장하던데 그 사람들 지금은 어떠한 얼굴로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곳에 빠져 들어간 사람들... 직장을 포기하고 학교를 자퇴하고 사업을 내어 던진 사람들은 앞으로 얼마 동안은 매우 혼란스러운 삶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현실이 가져온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서 그렇다. 학교에 가면 친구와 선생님과 어울리지 못하고 가정에서는 다른 식구들과 함께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직장생활 사회생활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풀리는 것이 없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지 못하다 보니 자연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어디에 정을 쏟을 곳이 없는 것이다. 주역사상에 깊이 젖어있는 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을 본다. 될 대로 되라지....... 여러분에게 이러한 생각이 있는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제가 잘 아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시골에서 살았는데 달 밝은 어느 날 가을밤에 고개를 넘어가다가 마을 공동묘지를 넘어가게 되었다. 낮에도 기분이 좋지 않은 곳인데 한밤중에 귀신이 나오면 어쩌나 생각을 하다가 아니나 다를까 귀신을 만나게 되었다. 걸음을 살살 움직이면 귀신도 살살하고 몇 걸음 빨리 걸으면 귀신도 발을 재게 걷는 것이었다. 아이고 난 이제 죽었다 생각하고 제 자리에 펄썩 주저앉았다. 그랬더니 이 상제 귀신도 제자리에 펄썩 주저앉아 꼼짝을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밤새도록 하다가 날이 환하게 밝아올 때 자세히 보니 귀신으로 보인 것이 장승이더라는 것이다
여러분!
오늘 아침 무슨 두려움이 여러분에게 있는가? 두려움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아담이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베드로가 바다에 빠진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이 두려움 때문에 33년 동안이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루살렘 골방 가운데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숨은 것이다.
오늘 본문은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하였다. 왜냐하면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 임마누엘! 할렐루야!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행하시며 여러분의 대적을 치시며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유사들에게 또 이런 부탁을 하셨다.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못한 자 / 집으로 돌아가라
포도원을 만들고 그 실과를 먹지 못한 자 / 집으로 돌아가라
여자와 약혼하고 결혼하지 못한 자 / 집으로 돌아가라
두려워서 마음에 겁을 내는 자 / 집으로 돌아가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는가?
1) 시작은 잘하였는데 아직 끝을 맺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무엇이나 처음은 잘하는데 끝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2) 두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지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 세상은 하나의 '영적 싸움터'이다. 교회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기 까닭에 영적인 싸움터에서 제외될 수 없다. 이 싸움터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기드온이 나팔을 부니 32,000 명이 그의 앞에 찾아 나섰다. 미디안과의 싸움에 나서기 위하여 분 나팔이었다. 그러나 정작 싸움에 선택된 군사들은 300명뿐이었다. 31,700은 모두 돌아갔다. 먼저 돌아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려워서 떠는 자들'이었다.(삿 7:3) 두려워 떨지 않은 사람들은 도무지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오늘 교회는 '거룩한 싸움'에 나갈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이 싸움은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교관이 나와서 직접 훈련을 시행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조교가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킬 때도 있다. 훈련받지 않은 군인은 전쟁이 일어나면 당황하게 마련이다. 사격훈련이든 포복훈련이든 지옥훈련이든 애오라지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이라야 두려움이 없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다.(눅 9:62) 가나안을 코 앞에 두고 옛날이 좋았다고 모세를 원망한 백성들이 하나같이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거룩한 싸움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영적인 싸움터에서 원망은 금물이다. 두려움도 금물이다.
2. 그곳의 나무를 작벌 하지 말라.
전쟁에 나가는 백성들에게 주어진 두 번째, 세 번째의 주의사항은 성읍을 치려할 때에 '평화를 선포'하고 그 선포를 받아들이면 조공을 바치고 섬기게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김없이 탈취하고 죽이라는 것과 그곳의 나무를 작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진멸하라는 것은 그들의 죄악이 창궐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자녀들을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고, 바알신을 섬기면서 제사와 함께 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살려두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18절을 보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
닻을 거두지 않고는 배는 떠나갈 수 없고 방향을 잡지 않고는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 태평양 한 가운데 떠있는 거대한 선박들은 물방개처럼 우연히 항구를 향하여 찾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늘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을 위하여 이곳에 모인 성도 여러분!
성도가 온전케 되는 것은 훈련을 통하여 가능하다. 세상이 열두 번 바뀌어도 훈련은 훈련이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이나 훈련하셨다. 그렇게 훈련받은 제자들임에도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다 흩어졌다. 믿음 좋다고 칭찬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식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가나안 땅의 나무를 작벌 하지 말라는 말은 그 땅의 과실수를 찍지 말라는 것이다. (19-20) 그들이 전쟁을 하는 중에도 파괴를 일삼지 말고 보호할 것은 보호하라는 가르침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 규정을 잘 지켰더라면 오늘과 같은 이스라엘의 황폐화는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과실수는 그들의 먹을 것이 되는 것들이다.
오늘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영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
1. 모든 두려움을 없이 하라.
두려움은 모든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2. 모든 세상적인 요소들은 제거하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용납해서는 안 된다.
3. 과실수를 찍어서는 안 된다..
과실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얻을 열매들이다. 우리가 환경을 파괴하면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멸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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