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히브리서 6장 강해 설교말씀] 확실한 소망(히 6:1-20)

성령의 능력 2022. 4. 1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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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에서는 예수님을 배교하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무시하고 인간의 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확실한 소망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확실한 소망(히 6:1-20)

 

1-12, 완전을 향한 열심

[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 . . .

본문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성도가 믿은 지 오래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원문의 어순(語順)대로 다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떠나서 완전한 데 나아가며 . . .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지니라이다. 본문은 다음 여섯 가지를 기독교 신앙의 초보적, 기본적 내용이라고 말한다.

첫째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다. 죽은 행실이란 죄악된 행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불경건, 우상숭배, 불의, 미움, 음란, 거짓, 탐욕 등이다. 이런 죄악된 행실들, 영적으로 죽었던 상태에서 행했던 행실들을 회개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회개하는 자는 죄악된 행실들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그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리고 그를 전심으로 섬기며 순종하는 것이 참된 종교의 기본적 요소이다.

셋째는, 세례들의 교리이다. ‘세례들이라는 복수명사는 씻음들이라는 뜻으로, 신앙에 기본이 되는 여러 가지 씻음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그것은 최초의 씻음이요 근본적 사죄(赦罪)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일이므로 성령의 세례라고 불린다(딛 3:5). 또 성령의 씻음을 외적으로 확증하는 물세례가 있다. 또 유아세례는 믿는 가정에 출생한 아이가 언약의 특권을 누린다는 뜻이 있다. 또 우리는 세례받은 후 살아가면서 실수와 부족이 있을 때마다 주의 보혈의 샘에 나아가 씻음을 받는다. 그 씻음은 반복적이며 일평생 계속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씻음들이 있다.

넷째는, 안수의 교리이다. 안수는 몇 가지 경우에 한다. 세례식의 안수는 구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상징하는 물로 씻는다는 의미가 있다. 임직식의 안수는 회중으로부터 구별하여 직분에 합한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뜻이 있다. 병자를 위한 안수는 성령의 치료하시는 능력을 구하는 뜻이 있다. 안수는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다섯째는, 죽은 자의 부활이다. 구원은 영생이며 그것은 곧 죽은 자의 부활을 포함한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5:29).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이다. 복음의 기본적 진리들 가운데 가장 두렵고 엄숙한 것은 영원한 심판의 사실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지옥은 악인들을 위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그는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고 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9:43, 48).

본문은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버리고 그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자”고 말한다. ‘버린다는 말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떠난다는 뜻이다. 즉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에만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는 뜻이다. ‘터를 다시 닦는다는 것은 기본적 신앙이 없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뜻이다. 믿은 지 오래되었다고 하면서 기본적 진리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없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성도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떠나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요, 실천함으로 인해 지각이 연단되어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다. 완전한 데 나아가는 자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 곧 교리적, 사상적 내용이든지 혹은 윤리적, 생활 교훈적 내용이든지 다 읽고 묵상하고 배우기를 힘쓰는 가운데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를 힘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성숙하고 완전한 데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말한다. 성도의 신앙 성장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성도의 구원적 신앙의 시작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고 신앙의 성장도 그의 은혜로 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그의 허락하심 없이 되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구원과 믿음도 그러하고, 믿음의 성장도 그러하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했다(고전 3:6-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신앙의 성숙함에 나아갈 것이다.

[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없음이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본문은 우리가 초보적 진리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보인다. ‘한번 비췸을 얻고라는 말씀은 복음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고 그 은사들을 체험한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말씀은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한 내용들,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 등과, 내세에 있을 부활과 천국의 기쁜 일들과 심판과 지옥의 두려운 일들에 대해 믿게 된 것을 뜻할 것이다. ‘타락한 자들이란 기본적 신앙에서 떨어져 그 신앙을 배반한 자들을 가리킨다. 즉 배교자들이다.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혹은 공공연하게 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하여 배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도의 견인(堅忍)에 대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였다(10:28). 바울도,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말하였다(1:6).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과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중보 사역의 완전성, 그리고 성령의 인치심의 진리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확실케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가상적 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결코 타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경고는 필요하다. 성도는 늘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겸손과 두려움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타락하여 믿음을 배반했다면 그는 참으로 중생한 자가 아닐 것이다. 그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주의 비유의 말씀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의 경우와 같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복음을 깨닫고 기쁨으로 받으나 시험과 환난에서 넘어진다. 일시적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타락한 자가 회개할 수 없는 이유는, 비유컨대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한 땅이 밭 가는 자들이 먹을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불사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 은혜의 단비를 받아 성장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기는커녕 가시와 엉겅퀴 같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마침내 지옥 불에 던지울 것이다. 성도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타락과 배교의 위험한 경계선에 서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적 성장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 성도는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9-10]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이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사랑의 수고로](전통사본)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하심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에 대하여 경고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 ‘구원에 가까운 것이라는 원어(에코메나 소테리아스)는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라는 뜻이다(KJV, NASB, NIV). 그것은 그들에게 구원에 수반하는 행위의 열매들이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의 영적 미성숙을 책망하며 배교를 경고했지만, 실상 그들 속에 좋은 것들과 선한 행위의 열매들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의치 아니하셔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긴 것을 잊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행위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의 수고로 성도들을 섬겼고 또 지금도 섬기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사랑은 성도들을 섬기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의 선행을 알아주지 않고 또 알아도 곧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다 기억하신다.

[11-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 . . .

본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의 간절한 소원은, 첫째로,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은 이 권면의 말씀이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기를 원함을 나타낸다.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말은 열심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부지런과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로, 성도들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소망의 풍성함에라는 원어는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라는 뜻이다. 성도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이런 소망에 대해 확신하고 끝까지 그러해야 한다.

셋째로, 성도들이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게으르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앞절의 부지런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살았고 마침내 약속들의 성취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약속들이란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들이 들어간 천국과 거기에서의 안식이다.

1절부터 1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 즉 회개, 믿음, 세례, 부활, 심판 등을 확신하고 그 터를 다시 닦지 말고 그것들에서 떠나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믿음을 배반하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불신앙과 불순종의 완악함에 떨어지고 마침내 배교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상적 경고이다. 참으로 중생한 자는 그런 상태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경고를 받고 불신앙과 불순종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안일과 해이와 나태를 다 버리고 완전을 향해 열심을 품고 힘써 전진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썼지만, 그들이 이보다 나은 것들과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것은 그들의 선한 행위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수신자들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의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게으르지 않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영적 성숙과 도덕적 완전을 향해 열심을 품고 힘써 전진하자.

13-20,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심

[13-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받았음이니라].” 본문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의 예로 아브라함을 들어 확증한다. 하나님께서 맹세하며 약속하신 것은 그가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자 했을 때에 있었던 일이었다(22:16-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은 창세기 12장에서의 일이었다. 거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났을 때 나이 75세이었다(12:4).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다는 것은 이 75세부터 그가 이삭을 아들로 받았던 100세까지 약 25년 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길고 지루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25년 간의 세월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기대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믿음과 인내의 일인가?

아브라함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중에 100세 때에 마침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 아들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던 아들이었다. 그것은 메시아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미칠 구원의 복의 약속이었다. 이삭은 메시아의 표상이요 모형이었다. 이삭을 통해 천하 만민이 장차 놀라운 구원의 복을 받게 될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런데 이삭이 아마 20여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그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죽여야 했다. 그는 그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조건 믿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죽게 하신다면 다른 아들을 주시든가 아니면 죽은 그를 다시 살리시든가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리아 산으로 갔고 거기서 단을 쌓았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죽이려 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막으셨고 그 대신 한 숫양을 번제물로 드리게 하셨고, 본문에 인용된 말씀대로, 그에게 맹세로 약속을 주셨던 것이다. 이삭은 이 점에서도 메시아의 표상이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산 자와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과 같았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은 후에 그 약속을 받았다는 말씀은 이와 같이 25년 간의 세월을 참았을 뿐만 아니라, 이삭이 장성하기까지 20여년을 더 참은 후에도 이삭을 드릴 정도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참고 기다린 후에 그 약속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오래 참은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곧 복의 약속을 주셨다. 그 복의 약속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메시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의 약속이었다.

[16-17]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 . . .

본문은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어떤 것의 참됨을 엄숙히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논쟁에서 진실에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만일 누가 맹세에서 거짓을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약속하신 그의 뜻이 변하지 않으심을 충분히 나타내시고 그 약속을 보증하신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의 확실함을 증거하셨다.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첫째로 그의 약속하심 자체이며, 둘째로 그의 맹세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므로 약속만 하셔도 그 약속은 진실하고 확실할 것이지만, 맹세까지 하셨으니 그 약속이 얼마나 더 진실하고 확실할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의 약속은 진실하고 확실하시며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하나님의 주신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땅 위에서의 나그넷길에서 그 약속과 소망 때문에 큰 힘과 위로를 받는 것이다.

[19-2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다. 그것도, 튼튼하고 견고한 닻과 같다. 배가 크고 견고한 닻을 내리면 한 곳에 정착하게 된다. 바람과 파도가 몰아쳐도 배는 표류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 수 있다. 성도의 소망은 이와 같다.

휘장이라는 말(카타페타스마)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르는 휘장을 가리킨다(9:3). 휘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휘장을 지나 하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셨으므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회복케 되었다. 이제 성도는 영혼의 닻을 하나님의 성소 안에 굳게 내린 자와 같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고 내세의 영광의 소망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튼튼하고 견고한 닻과 같은 소망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 안에서 참된 안정과 평안과 기쁨을 얻었다.

13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은 두 가지 진리들을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다. 그것은 맹세로 보증된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도 동일하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 부활과 영생의 약속, 그리고 영광스런 천국의 약속은 모두다 진실하고 확실한 약속들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들은 우리에게 견고한 소망과 큰 안위를 준다.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과 소망은 우리의 영혼의 튼튼하고 견고한 닻과 같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참된 평안과 힘과 위로를 얻는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우리의 내세의 소망과 영광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존한다. 그의 약속의 말씀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고 큰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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