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히 13:1~25)

성령의 능력 2021. 6. 1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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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13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살아났습니다.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담의 혈통으로 나온 자는 모두 죽었습니다. 이런 자를 살려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목: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 (히 13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히 13:1~25

 

요절: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신의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2~13)

 

주제: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자로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다. 사랑의 왕이시다.

 

이번 주일은 한국전쟁(Korean War,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2일간) 발발(6.25)을 회상하며 나라와 민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이 전쟁은 휴전협정으로 되어 있어 지금도 종전이 아니라 휴전인 전쟁 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준전시 상황으로 67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 서명함으로 일제 강점기 36년이 끝나고 해방되자 남한은 미군정으로 자유민주주의, 북한은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북한은 3년 동안 치밀한 전쟁준비를 하여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에 암호명 '폭풍 224'이었는데, 남조선 해방의 명목으로 대한민국에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여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하였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온 것이 그 시작입니다. 마침 주말 휴가로 많은 대한민국 군인들이 전선을 비운 사이에 남한으로 공격하여 3일 만에 서울 미아리고개 전선이 뚫리고 서울이 함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간청으로 참전을 결정하였고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 9:1로 유엔군 참전을 결의하여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인천 상륙을 9월 15일 지휘함으로 16개 나라가 군대를 지원하여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싸워주었습니다. 고마운 나라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들 16개 나라에 가서 교육선교를 하였습니다. 9월 28일에 3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어 시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습니다. 1951년 1월 중공은 조선족을 중심한 인민군을 파병함으로 1.4 후퇴가 되어 동부전선은 고성까지, 서부전선은 강화까지 국경이 형성되어 155마일 오늘날 휴전선이 생겼습니다.

한국 전쟁은 근대 국제 체제가 형성된 1500년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전쟁 가운데 군인 사망자가 일곱 번째로 많았던 전쟁입니다.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여 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여 명, 부상자 48만여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여 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여 명, 부상자 20만 8천여 명, 실종자와 포로, 비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미군 사망자는 3만 3천686명, 영국군 1천78명, 터키군 966명, 캐나다군 516명 순으로 사망자가 많고, 유엔군 실종자와 포로는 각각 3,950명, 5,817명이며 부상자는 10만 3,460명입니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여 명, 학살된 민간인 13만여 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여 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여 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 명입니다.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던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6.25노래가 1951년부터 불려 왔습니다.

1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이제 다시는 이런 전쟁이 우리나라에 없도록 남과 북이 평화롭게 통일이 되어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한국이 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일제 강점기 때 평양신학교 채플에서 즐겨 불렀던 찬송이 70장(통 79장)이 오늘도 부르면 좋겠습니다. 마틴 루터가 좋아한 시편 46편을 기초로 쓴 가사.

1.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 이 방이 떠들고 나라를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없네

4.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히브리서 마지막 장인 13장을 강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완성”이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전체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소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복음을 20여 년간 해 왔으나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라고 표현할 만큼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무궁한 대제사장, 멜기세덱, 새 언약의 중보자, 천국의 기업, 믿음의 완성, 소망의 완성, 사랑의 완성이심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히 13:1~6)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그러나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에서 형제 사랑(필라델피아 philadelphia, brotherly love)는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벧전 1:22).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이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 선행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합니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구체적으로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천사인줄을 알지 못하고 손님을 잘 대접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세 손님들에게 ‘달려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절), ‘급히 장막에 들어가’ (6절), ‘속히...떡을 만들라’(6절), ‘짐승 떼에 달려가서’(7절), ‘급히 요리한지라’(7절) 등의 표현을 보면, 그는 손님을 영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님 대접이나 선행은 참된 경건과 신앙의 증거입니다. 딤전 3:2에서 바울은 장로의 자격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기를,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딤전 6:17-18). 잠 11:24-25는 말하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합니다.

 

3절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행위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감옥에 갇혔을 때 방문한 자의 행위가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그러나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부부의 관계는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관계입니다. 결혼이나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관계, 즉 인간이 범죄 하기 전부터 가졌던 귀하고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위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잠 5:18-19는, 아내를 사랑스러운 암사슴과 아름다운 암노루에 비유하였고 남편은 그 아내의 품을 항상 만족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가르칩니다.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에 간음이나 음행은 부부 사랑에 반대입니다. 그러려면 결혼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여 처신해야 하며, 술이나 춤 혹은 인터넷 채팅 등 중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부부는 마귀의 시험이 틈타지 못하도록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5-6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오?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번하게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헤어집니다. 우리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할 때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만을 따르자(히 13:7-13)

 

7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일러 주고 여러분들을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자.

7절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일러 주고 여러분들을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와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파악하여 해석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말씀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들은 먼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합니다(벧전 5:2-4).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들의 인도와 지도에 잘 따라야 합니다. 교인들은 인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생각하다’는 원어(므네모뉴오 mnemoneuvo)는 ‘기억하다’는 뜻입니다. 좋은 모범을 보인 인도자들은 바른 설교와 바른 행위를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 마지막도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물론 바르지 못한 설교와 나쁜 행위로 나쁜 모범을 보이다가 불쌍한 마지막을 가진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 같은 제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던 데마 같은 제자가 그러하며 또한 돈과 명예와 육신적 쾌락에 빠진 자들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와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Jesus Christ the same yesterday, and to day, and for ever.” 이 요절은 전도자 무디( Dwight Lyman Moody, 1837∼1899)가 가장 좋아했던 구절로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당(The Moody Church) 발코니에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의 참 인도자이십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도,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천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십니다.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러 가지’라는 원어(포이킬로스 poikilos)는 ‘다양한’이라는 뜻이고, ‘다른’이라는 원어(크세노스 xenos)는 ‘이상한’이라는 뜻입니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교훈들을 가리킵니다. 영지주의, 뉴에이지 사상, 종교 통합주의가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말합니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고정된,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명확하고 불변적인 진리를 버려두고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 보수신앙을 붙 들어야 합니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 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사였습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분은 그분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분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었다.

 

‘능욕’이라는 원어(오네이디스모스 oineidismos)는 ‘비난, 불명예, 모욕’을 뜻합니다. ‘그분의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영문’은 ‘진영’(陣營)이라는 말인데 진영은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핍박을 받을 때 사회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성도들이 일반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욕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주님의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3. 찬송과 선행의 예배(히 13:14-25)

 

14 이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같은 예배를 기뻐하시느니라. 17 이는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여러분들의 혼들을 위하여 깨어있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19 내가 더 속히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21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분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 형제들아 내가 여러분들을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여러분들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여러분들을 보리라. 24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여러분들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14-16절 “이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 같은 예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욕 즉 그분의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가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우리가 장차 올 것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즉 현실은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고난의 생활이지만,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가 죄 사함의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신약 성도는 삶 자체가 ‘거룩한 산 제물’이며(롬 12:1) 찬송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이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또 찬송은 그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증거 한다’는 원어(호몰로게오 homologeo)는 ‘감사한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찬송은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가장 좋은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남의 인격을 허물고 남을 거짓 되게 비난하는 일에 사용되었으며 종종 더러운 욕설이나 음란한 말의 도구가 되지는 않았던가. 이제 이런 더러운 입술이 정결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합니다.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영문 밖에서 희생하신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이 사랑을 이웃과 나눔이 주님께서 열납 하시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worship service)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mutual service).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열매입니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코이노니아 koinonia)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으로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힘써야 할 섬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먼저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그다음은 이웃을 향한 선행도 구제가 실천되는 예배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생활화입니다.

 

17절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그들은 여러분들의 혼(souls)을 위하여 깨어있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이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決算 give account)할 자들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될 것이며 근심으로 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것이 또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내가 더 속히 여러분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합니다. 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살전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살후 3:1, “형제들아, 여러분들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들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18-19절에서 바울이 수신자들인 유대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그는 그가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 곳에 있습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0-21절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분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기원의 내용은 우선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십니다. 요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부릅니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작은 목자들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무궁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증거 하신 신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 하십니다. 행 17:31, “이에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평강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습니다. 사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영원무궁한 언약의 피로 죄 사함 받은 혼들(souls) 속에 평강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이루시기를 소원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됩니다. 우리는 다른 특별한 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입니다.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증거 합니다. 계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히브리서 강해를 마무리 하면서 22-25절로 대신합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처럼 말씀을 받읍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분들을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여러분들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여러분들을 보리라.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도 여러분들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다른 바울 서신처럼 히브리서도 마지막 안부와 축도로 마칩니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을 받는 교인들에게 그의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 부르는 살전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회자와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로부터 교회에 목사와 장로들을 세우셨습니다(행 14:23; 20:28).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도 복음이 증거 되었음을 보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히브리서를 거듭 읽으시면서 예수님에 대해 확실히 증거 하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 히브리서를 마지막 장까지 읽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모세보다, 아브라함보다, 믿음의 모든 선진들보다 우월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완성하시고 소망을 완성하시고 사랑을 완성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시며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Yes, Jesus loves me, the Bible tells me so.)” 찬송 563장(통 411장) 부르며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게 하옵소서. 우리나라를 어떤 핵무기, 미사일, 테러, 코로나 바이러스, 자연재해,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전쟁의 방법이 아닌 평화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로 통일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니엘이 본 네 짐승과 작은 뿔 환상(단 7:1-8)

 

[다니엘 7장 히브리어 강해] 다니엘이 본 네 짐승과 작은 뿔 환상(단7:1-8)

안녕하세요. 오늘은 다니엘 7장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다니엘이 본 네 짐승과 작은 뿔 환상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벨사살 원년에 침상에서 환상을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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