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장에서는 애굽의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을 말살하려고 정책을 내놓았다. 남자아이는 죽이고 여자 아이는 살리라고 했다.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는 바로 왕의 말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아이를 살렸다. 하나님은 산파들에게 은혜를 주어 축복했다. 성도는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한다.
애굽 왕의 히브리인 말살 정책(출 1:15-22)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여기 히브리 산파라 한 것은 히브리인들이 잘 이용하는 거의 히브리인을 전문으로 하는 산파들이라는 말이리라고 역사가 요세푸스도 말한다. 바로 왕이 하필이면 히브리 산파에게 동족을 살해하라고 하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괴상하나 히브리인을 위한 전문적 산파를 세웠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위하여 어용산파를 기르는 기관을 만들었을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히브리 산파 운한 것인 듯하다. 그들의 이름이 오늘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름이야 악명도 기록되거니와 저들의 양심 그대로의 기록이다.
아름다운 이름으로 전하여진 것은 바로 하면 어느 사람인지 잘 알 수 없어 그래서 이 산파의 이름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으로 이렇게 녹명되었으니 이런 이름을 남긴 것은 대권을 잡았던 바로에 비길 바 아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았던가"(욥 3:11)을 보면 산파의 기술쯤으로써는 죽은 아이 낳게 하는 일쯤을 쉽게 할 수 있었던 모양이요. 그런 전문적 훈련을 하는 일조차 하였을 것이다. 오늘도 산아조절을 위해서 별별 강습이 있는 것을 보면 애굽왕도 그런 특수한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을 것이다.
[16]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왕의 분부한 말의 내용이 수록된 절이다. 히브리 여인에게 히브리라는 말은 이스라엘 자신의 부르는 말이 아니라 밖에서 불러준 이름이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라함에게"(창 14:13). 밖에서 들어와 산다는 의미에서의 명칭이었다. 산파에게 살인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런 잔인한 일들이 형태는 다르나 이런 일들이 때로 있다. 식민주의를 써온 많은 국가들이 피식민지들을 알게 모르게 죽인 사실들은 다 이와 상통하는 일들이다. 더욱 문화를 말살하려 한 일들은 더욱 잔악한 일이기도 한 것인데 우리가 바로 그 일을 당한 것이었다.
이런 일들은 식민사상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살펴서, 의 말 그의 재량에 맡기면서 명하여 한 말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 모든 정보정치는 다 살피는 일들이다. 살피는 일들이 안보와 보호와 도와주기 위한 것이 될 수도 있고 감시로도 내지 해하려는 일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는 해하기 위해서 살피는 명이다.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살게 하라. 씨족을 없이하여 보자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여자가 많아지면 이는 애굽인이 취할 수도 있었겠다.
근자에는 통혼방법으로 씨족말살을 염원하였던 것은 일본정치도 우리에게 그런 방법을 썼던 것을 친히 당하여본 일이기도 한 것이다. 남자는 또 힘이 강한 자라 강한 자는 없이하고 약한 자는 살리려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야곱이 일즉 치산할 때에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고"(창 30:42). 이 바로의 씨족 멸산의 것과는 같지는 아니하나 야곱도 자기의 수단으로 이런 짓을 하여 치산을 한 것을 보면 내용은 같지는 아니하나 그 방법은 같은 점이 있다 하겠다. 우수한 사람을 없이하는 일들은 정치면에서는 항상 암살 등의 일도 있음을 보는 바이다.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하나님을 경외할진대 사람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일일 때 할 수 없음이다. 이는 지당한 일이다. 이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함은 이스라엘 여인들과 상관하는 일에서 배운지도 모른다. 요셉 같은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한 고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40:9). 이렇게 시험과 유혹을 이긴 일이며 요나단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부친 사울에게 감히 과감한 충고를 할 수도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 하려 하시나이까"(삼상 19:5). 웃시야 왕이 망령되이 자신이 분향을 하려 하였을 때에 아사랴가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80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 바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대하 26:17-18).
다니엘의 친구들이 느부갓네살의 명을 감히 어긴 일도 우리는 아는 바이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다니엘 자신도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들어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베드로가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다 통하는 말들이다. 왕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람을 죽이는 죄를 범치 못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다. 사람은 흔히 하나님을 두려워함보다 사람의 낯을 위하여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는 경우가 너무 많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갈 6:7). 말씀대로이다.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항명한 산파들로 불렸다. 항명에는 한 길만이 있을 뿐이다. 죽는 것이다. 항명한 죄를 지적한 말이다.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남자를 죽이지 못한 이유가 어디 있느냐의 말이니 양심의 호소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통할 수는 없는 것이다. 흔히 독재자들이 자기 이외에는 더 높은 이가 없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왕의 명이면 절대로 아는 것이다. 이런 사고가 망령된 일이건만 이렇게 사료하는 것이라. 항명죄를 적용한다면 죽는 일뿐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단 3:15). 이런 절대적 언사가 대표적이다. 바로의 명령도 이에 준한다. 이 항명을 한 이들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산파의 대답은 용감무쌍이다. 이런 대답으로 절대적 권력 앞에 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용감한 대답은 생명을 걸고 한 대답이라고 본다. 그들이 건강하였다 함은 사실이다. 바로도 이를 부인하지는 못했다. 저들이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다 함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임무를 포기하고 이 같은 술해를 함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요, 또 하나님께서 저들을 보호하심은 아래 절을 통하여 보이신 바이다. 바로 사는 일이며 바른 증거를 하는 일엔 언제나 생명을 걸고 사는 일이다. 순교의 각오 없이 바로 살지는 못한다. 남을 살리려 하는 일엔 내 생명을 내놓는 일이다. 거짓말을 하여 남을 살리고 자기는 희생을 당한다면 이는 생명에 속하는 일이다.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여기 분명히 말씀된 바 바로가 속아서 그들이 무사한 것도 아니요, 저들의 수완이 능하여 그 전제, 독재를 벗어난 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이라고 저들은 하나님을 경외한 때문이라고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이대로이다. 남을 위한 것이 주를 위한 것이라 주께서 그 생명을 지키심이다. 어떻게 독재정권 하에서 항명하고 견딜 수 있으랴. 이를 분명히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이다. 바로 사는 일이 여기 값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으로 책임을 져주시는데 이를 모르든지 알면서도 약하여져서 그만 육을 더 소중히 여겨서 그만 사람을 지상의 것을 더 중히 여기다가 하나님을 불복하는 일이 많은 것을 항상 반성할 것이다. 산파에게 은혜를 베푸심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선민을 보호함이다. 산파를 시켜 선민을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욱 축복하여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12절에 언급된 말씀이 다시 말씀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하나님의 크신 축복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복을 애굽에서 받은지라. 저들이 두려워한 것이다.
오늘은 생육을 극히 자제하여 이를 인공으로 갖은 수단을 다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무슨 전쟁의 위험보다도 이런 하나님을 항거하는 일이 더욱 무서운 일이다. 마귀에게 속는 것으로 본다. 병 있는 사람이나 환경이 딱한 사람이 생활을 절제하여 자기 생활에 맞게 생산하려 함은 지당하나 마음대로 향락을 하면서 생명은 함부로 살해하는 일을 함은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랴.
[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산파가 은혜를 입었다 함을 이미 위 절에서 말한 바이거니와 본 절에서는 그 집을 왕성케 하였다는 기록이다. 그 산파들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그들에게 장가를 들어서인지 어느 모로 하시었는지는 모르나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이 저들의 집안에까지 라고 함은 이를 본받게 하나님께서는 꼭 공의로 사람을 대접함을 말함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요. 만일 불여이 하면 때가 되면 자기 생명을 바칠 생각을 하였기에 항명을 감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사람을 두려워하다가 실패한 일들이 많은 예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르우벤이 형제를 두려워하여 요셉을 구덩이에 넣었다가 건지려 하였으나 기회를 잃어버렸다(창 37:21-22). 아론이 백성을 두려워하여 우상을 만들기도(출 32:21-24), 사울이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4).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삼상 21:12). 거짓 미친 체하기도 했다.
요나도 여호와를 피하다가 당한 일(욘 1:3). 베드로도 사람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부인하였다(마 26:69-72). 빌라도도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가로되"(요 19:12). 사람을 두려워하여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 정죄하여 오늘 우리 신앙고백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의 말을 다 외우게 하였다. 베드로가 후에도 "할례자를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갈 2:12). 이런 과오가 있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다가 실패 망신한 일들이 이렇게 많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사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본분이요 그렇게 삶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게 된다. 신앙적으로 생육의 축복 많으면 아들을 낳는다. 자손을 많이 둔다. 믿음의 후예가 많아야 한다.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 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점점 가일층하게 그 도구가 더하여진다. 남자를 낳으면 산파로 죽이게 하다가 그다음은 남자 낳으면 나일강에 던지게 한다. 이는 명령이다. 당시에 나일강에 어린아이들을 던지는 예가 있었다 한다. 거기는 악어가 많은데, 악어에게 어린아이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풍습을 버리지 않아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나일강에 제물로 드리게 한다는 구실도 있었을 것이다. 악어의 밥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도 황하의 범람으로 몇 해만에 한 번씩은 큰 수재를 당하는 일을 면케 하여 달라는 것으로 처녀를 물에 던지는 일을 한다는 것과 방불하다. 애굽 왕은 나일강의 제물을 구실하였겠지만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한 수단이 이런 방안을 구상하였겠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선민으로 하여금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하신 그 뜻이 어디 있을까? 저들의 범한 죄를 정치하심이다.
예를 들면 창 38장 1절에 의한 유다가 자부와 음행을 한 일 같은 것은 큰 패륜으로 요셉과 대조하면 얼마나 추한 죄악이겠는가? 이런 죄악을 저들로 그 값을 받게 하심이요, 또 이런 시련으로 저들의 믿음을 저울질해 보는 기회가 된다. 이런 압박을 받음으로 애굽을 떠날 각오를 하게 하심이다. 장망성을 떠나서 저 나라를 사모하는 그 심정을 가지게 하심이다. 어렴풋하겠지만 조상에게 허락한 가나안을 사모하게 하심이다.
이런 정치요, 압박받음을 통하여 자신을 의뢰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연마가 광의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만하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교회가 당하는 모든 시련은 하나님의 크신 경륜에서 축복의 길이 된 다함을 잊지 말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 많은 시련 중에서 받은 구원을 객관적으로 본다면, 1) 이스라엘 백성이 심히 번성함이 저들의 시기가 됨.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행 8:12). 교회의 핍박받음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핍박으로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심을 본다.
2) 이스라엘이 강함으로 "창성하고 강대하여" "그 지파 중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시 105:37). 존재가 뚜렷하지 못할 때에는 그렇지 않으나 강한 것이 적에게는 못마땅하다. 오늘도 그런 것이다. 우리 목회자들도 두각이 드러나면 적이 많이 생긴다 함을 알아야 한다.
3) "우상을 버린 까닭이다."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겔 20:7). "내 이름을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겔 20:9). "그들은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레 17:7). 이렇게 이스라엘은 살게 되기도 하고 또 이런 우상을 섬기지 않기 위하여 저들을 구출하여 내심이다.
4)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심이다" 이것을 내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내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5).
5)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하심이다.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106:8).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단 9:15).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신 6:21).
6) 말씀을 믿게 하시기 위하심. "내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 50:25).
7) 핍박 중 한 덩어리가 됨. 모세가 애굽사람을 쳐죽임(2:11-12). 동포애가 굳어짐. "너희를 쇠풀무에서"(신 4:20). 쇠풀무에서 다 녹아 하나 된 셈이다(신 4:20).
8) 겸손하고 낮아짐.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9) 담대하기 위해서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매"(출 12:35). 전 같으면 이런 제언을 할 수 없다. 이런 담력을 가짐은 하나님께서 배후에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시 105:35).
10) 선민으로 그동안 일한 값을 다 받아 가지고 나오게 하신 바이다. 전향에 말한 말씀(출 12:35, 시 105:37). 때가 됨에 하나님께서 다 받아주신 바이다.
11) 아름다운 기업을 얻게 하신다.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시 105:44). "내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신 6:10).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느 9:35).
12) 거룩한 백성 되게.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신 14:2).
[시편 81편 설교말씀]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순종을 원하심(시 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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