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야고보서 3장 강해설교말씀] 혀를 다스리기(약 3:1-12)

성령의 능력 2023. 2. 18. 13:18
반응형

야고보서 3장에서는 바른말을 사용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말을 잘하면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말 때문에 고통당하는 경우도 있다. 성도는 항상 감사의 말을 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 말을 해야 한다. 

 

혀를 다스리기(약 3:1-12)

 

전 장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무익하며 쓸모없이 죽은 믿음인가를 보여 주었다. 그러한 믿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성품과 말에 있어서 잘난 체하며 거만하게 만들기가 쉽다는 것이 3장에서 분명하게 연관되어 기록되어 있다. 2장에서 정죄되고 있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본 장이 비난하는 혀의 죄를 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혀를 사용하는 최선의 방법이 혀를 함부로 사용하여 남을 명령하고 비난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에 대한 경계로써 요구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배우게 된다.

Ⅰ. 우리의 혀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도록 하라. "내 형제들아,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1절).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하여 지시하고 가르치거나 잘못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갈 때에 그들을 책망하는 것을 금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은 항상 지휘자의 위치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즐겨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판단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도록 명령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셨으며, 그들이 받은 바 지혜에 따라 합당하게 행동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였다. 즉, "너 자신이 선생과 권세기와 재판관과 같은 거만한 자세를 지니지 말고 다만 배우는 자로서의 겸손과 정신으로써 말하라. 마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너의 기준으로 판단받아야 하는 것처럼 서로 비난하지 말라."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강조되었다.

1.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을 비난하고 재판하는 자로 나선 자는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우리 자신은 그 보다 더 엄격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 7:1, 2). 다른 사람의 잘못을 몰래 염탐하는 것을 즐겨하고 오만한태도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하고 행한 잘못들을 극도의 노하심으로 기록해 두실 것이다.

2. 선생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2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못과 범죄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한다면, 한결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서 잘못을 찾아내려는 심한 충동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남을 향한 범죄 의식을 깨닫지 못한다. 스스로의 의롭다 여기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다른 사람의 약함과 허약성에 대하여 헛되이 떠드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내적으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거의 생각지 못한다. 아니, 아마도 그들의 거만한 태도와 비난하는 혀가 그들이 비난하는 다른 사람들 속의 잘못 보다 더욱 나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을 판단할 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자비롭게 하는 태도를 배우자.

Ⅱ.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혀를 제어함으로 우리 자신이 완전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판명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몸 전체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 여기서 암시되어 잇는 것은 양심에 혀로서 저지르는 죄의 유혹을 받고도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고결한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참된 은혜를 받았다는 분명한 표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만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1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면, 그의 신앙 고백과 경건은 헛 것이다(1:26). 더욱이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증명될 뿐만 아니라 한층 진보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도 판명된다. 따라서 한사람의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은혜와 지혜는 그 사람의 모든 행동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비교함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1.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며 이끌 수 있는 것은 그 입에 재갈을 먹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몸을 의거하며"(3절)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짐승과 같은 맹렬함과 방약무인한 요소가 다분히 많다. 이런 요소는 거의 대부분이 혀에 의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를 재갈 먹여야만 한다. 이 필요성에 대하여서는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가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우리의 혀가 재빠르며 활동적이면 일수록 더욱더 그것을 다스리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치 의거하지 못하고 다스리기 힘든 말이 주인을 태운 채 달아나거나, 주인을 내동댕이치듯이, 다스려지지 못한 혀도 그 주인에 대하여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을 받아 마음에 각오와 경계심으로 혀를 제어하게 하면, 우리 몸이 행하는 모든 몸짓과 행동이 쉽게 인도하며 다스려질 것이다.

2. 키를 바르게 조종함으로 배를 조종할 수 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4,5절). 키가 배의 작은 부분인 것과 같이 혀도 우리 몸에서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키를 올바르게 조종할 때 그 배가 운전하는 사람의 뜻대로 움직여 나아가는 것과 같이, 대개의 경우에 혀를 바로 사용함으로써 한 인간이 전체적으로 다스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에는 작은 것들이 거대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경이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혀의 바른 사용에 대하여 더욱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혀가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대단히 큰 유익을 가져다주거나 아니면 크나큰 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Ⅲ. 우리는 다스려지지 않은 혀를 가장 크고 치명적인 악으로써 두려워해야 할 것을 배운다. 많은 가연성 물질 가운데 있는 적은 불꽃이 순식간에 큰 화염으로 변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과 같이, 혀는 작은 불꽃에 비교되었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5,6절). 혀에는 그것이 불의의 세계라고 불릴 만큼 많은 죄가 포함되어 있다. 혀가 저지르는 더러운 죄악이 얼마나 많은가! 혀가 일으키는 불길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가! "하늘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6절). 여기서 혀가 일으키는 죄 가운데는 크나큰 공해와 불결히 있음을 명심하라. 더러운 정욕이 불타오르고 남에게까지 나타나며, 마음속에 이 정욕이 솟아오르는 것은 모두 이 제어되지 못한 혀로 인하여 되는 것들이고, 온몸이 죄에 빠져 범죄케 되는 것도 바로 이 혀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말하기를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전 5:6)고 하였다. 인간들이 자기의 혀로 인하여 걸려들게 되는 덫은 스스로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며 타인들에게는 파괴적인 것이다. 혀가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6절). 인간과 그 사회의 일은 자주 혼란에 빠지며, 모든 것이 불꽃과 같이 격렬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 대부분이 인간의 혀가 원인이 되는 수가 많다. 어떤 주석자는 위의 구절을 "우리의 모든 세대가 혀로 인하여 불살라진다"라고도 해석한다. 이러한 예가 적용되지 않는 시대나 삶의 정황, 그리고 개인 또는 집단이란 없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6절). 지옥은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혀에 불을 더해 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인간의 혀가 격분되어 불타오르는 것은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며, 결국 악마적 계획에 종사하게 된다. 악마는 거짓말쟁이이며, 살인자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라고 분명하게 불린다. 인간의 혀가 이러한 일에 사용될 때는 언제나 지옥의 불로 타오르게 된다. 성령이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진 형태로 내려온 적이 한번 있었다(행 2장). 그때에 혀는 하늘로부터 있었다(행 2장). 그때에 혀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에 의하여 말해져서 선한 마음과 거룩한 감동, 그리고 뜨거운 헌신을 불일 듯하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혀가 지옥의 불로 뜨거워졌을 때에는 적당한 열이 가해지지 않았을 경우처럼 우리에게 해로울 뿐이며 분노와 미움만을 일으키고 사탄의 계획에 종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너는 불꽃과 화염을 두려워하듯이, 말다툼과 욕설과 중상모략과 거짓말, 그리고 그 밖의 너의 영혼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에 진노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모든 일을 두려워해야 한다.

Ⅳ. 그러나 다음으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혀를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이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7, 8절), 야고보가 말한 것은 마치 다음과 같다. 사자들과 야수들과 가장 힘센 동물들도 말과 낙타처럼 길들여져서 인간이 다스리고,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공중의 날아다니며 야생적이고 겁 많은 새들도 인간에 의하여 다스려지며, 독을 지니고 교활한 뱀도 인간과 친밀해지고 무해할 뿐만 아니라, 바닷속에 있는 생물까지도 인간에게 이용되고 필요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피조물들은 기적에 의하여서만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것은 아니고(사자가 다니엘을 삼켜버리기는커녕 그저 웅크리고 앉아만 있었고,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으며, 고래가 깊은 바닷속에서 요나를 건져내어 마른땅에 데려다준 기적들처럼),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써 사람이 길들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혀는 그러한 동물들보다도 더욱 길들이기 힘들며, 이런 동물들을 길들이는 기술과 능력으로는 결코 길들일 수가 없다. "혀로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혜와 도움뿐이다." 야고보가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그 일이 아주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따라서 혀를 질서 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경계와 수고와 기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때때로 이 모든 수고가 그래도 부족하여 수포로 돌아갈 때가 있다. 왜냐하면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8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서운 짐승도 어떤 우리 안에 가두어 둘 수 있고 어떤 훈련법으로 다스릴 수 있으며, 심지어 뱀까지도 그들의 모든 독에도 불구하고 해롭지 않게 이용할 수 있다. 그들의 인간의 혀는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울타리와 규칙을 파괴하고 때때로 독을 뱉어내기 쉽다. 그러므로 혀에 대해서는 야수나 또는 해롭고 독을 지닌 생물들처럼 다스려지고 경계될 뿐만 아니라 그 해롭기 이를 데 없는 피해의 발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좀 더 강력하고 세심한 주의와 수고가 필요한 것이다.

Ⅴ. 우리는 신앙생활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우리의 혀를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가르침을 받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러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우리의 혀를 남을 욕하고 비난하며 그밖에 악을 행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9,10절). 자기의 혀를 기도와 찬송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또한 그 혀를 저주와 비난과 같이 악한 일에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만약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선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을 한 혀가 또한 자기의 동료 인간들을 욕하는 언쟁적인 말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은 남을 욕되게 하는 비난을 감히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이 지음 받은 인간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 자신과 그들이 위대한 원천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체하는 태도와의 사이에는 가장 부끄러운 대조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0절)는 말씀대로 만일 이런 생각이 항상 가까이에 있다면 설마 그 같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경건에 사랑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경건은 그 나타내는 모든 일 중에서 치욕을 당하게 된다. 이 같은 사람의 혀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찬양을 돌리는 척하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동시에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처럼 말하고 표현을 나타내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을 정죄하는 자신을 또한 변호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야고보는 동일한 원인에서 상반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 근본이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이는 덕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11,12절). 참된 경건은 부정을 받아들일 수 없고,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말과 행동에서 이 같은 자가당착을 허용할 수 없을 것이다. 경건은 진실로 이러한 죄를 방지하며, 믿음과 행실의 상호 모순 가운데 빠진 인간을 다시 회복시켜 항상 자기 자신과 일치한 삶을 살게 해 준다.

[사무엘하 16장 주석 성경말씀]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함(삼하 16:1-23)

 

[사무엘하 16장 주석 성경말씀]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함(삼하 16:1-23)

사무엘하 16장에서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서 도망치게 되었다. 다윗이 도망칠 때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다. 시므이는 사울 족속의 사람이기 때문에 다윗을 저주했다. 다윗은 아들에

bedesd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