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베드로전서 3장 주일성경말씀] 선행과 고난(벧전 3:16-17)

성령의 능력 2023. 3. 1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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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성도가 선행을 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예수님도 의를 행하다가 고난을 받았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의를 따라가다가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했다.

 

선행과 고난(벧전 3:16-17)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여기에서 상세히 설명된 두 가지 수단 즉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이 아니고서는 반드시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양심은 그의 임무를 수행할 때에 순결하고 부패치 않았으며, 죄악으로부터 깨끗이 보전되어 있을 때에 선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비난할지라도 선한 양심은 여러분들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한 행실"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보이신 본을 따라 사는 거룩한 생활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양심과 행실을 잘 살피라. 그리고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욕하고 거짓으로 악을 행하는 자라고 비방을 할지라도 여러분은 자신의 정결함을 나타내어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선한 양심과 행실을 지킴으로써 당하는 고난이 어려운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는 아무리 여러분의 원수가 악할지라도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1. 가장 양심적인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의 모략과 중상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욕하며, 그들의 심령의 범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전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도 이렇게 취급을 당했다.

2.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은 훌륭한 명성을 얻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이러한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은 견실하고 영원한 명성을 부여한다.

3. 결국은 비난자들의 무분별, 부정, 거짓과 몰인정이 드러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거짓된 비방은 비난하는 자의 부끄러움을 초래케 한다.

4. 선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함으로, 또한 그들이 정직과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이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

5. 선한 행동은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부여하는 것처럼, 악한 행동은 악한 사람에게 악을 면할 수 없게 한다. 사람은 두 가지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사도는 생각한다. 선을 함으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가혹하다면 악한 사람들이 악을 행함으로써 당하는 고난을 어떠할 것인가? 죄와 고난이 동시에 함께 임하는 사람은 매우 불행한 처지에 있다. 죄는 고난을 극심하게, 무익하게, 불쾌하게 그리고 파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벧전 3:18-20)

 

Ⅰ. 그리스도의 본은 고난을 참는 것과 만일 우리들이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몇 가지 점을 상고할 경우 인식될 수 있는 그의 인내하는 능력에 대한 논의로써 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죄가 없음에도, 또한 만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고난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고난에서부터 면제되지 아니했다.

2.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이유와 명예로운 원인은 인간들의 죄이다. 곧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참되고 타당한 처벌이었다. 이러한 처벌은 속죄를 위해, 그리고 죄를 보상키 위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죄는 모든 죄에 대해 효과를 미친다.

3. 우리 주님의 당하신 고난의 경우에 있어서, 불의한 자를 위해 고통을 당하신 이는 의인이었다. 곧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우리와 대치시켰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죄를 모르는 그가 의를 모르는 자들을 대신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와 안전함은 그가 한 번 고난을 당하심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율법적인 희생 제물은 매일, 또는, 매년 반복되어졌으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 한 번 드려짐으로 모든 죄를 깨끗이 하셨다(히 7:27; 9:26, 28; 10:10, 12, 14).

5. 우리 주님의 고난의 축복 목적과 계획은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어 하나님과 화목케 하며, 우리를 아버지께 가까이 하고,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합당케 하며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엡 2:13; 3:12; 히 10:21, 22).

6. 그리스도의 고난의 문제와 사건은 그 자신에 있어서 이러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인간의 질에서 죽음을 당했으나 영으로서 다시 살아 일어나셨다. 자, 만일 그리스도가 고난을 면치 아니하셨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면케 되기를 기대하는가? 만일 그가 죄를 속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난이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단련과 바르게 함일 때 왜 우리는 만족하며 감사치 아니하는가? 온전히 의로우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도 감사하셨다면, 그 고통이 잠시적이요, 그 후엔 영광의 주님을 따르게 된다면 우리들은 어찌 고통을 참지 못하겠는가? 만일 그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면"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귀의하도록 하며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촉진하는데 유익이 되는 이상 우리들이 어찌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겠는가?

Ⅱ.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본으로부터 옛 세대의 본에 이르기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서신을 받는 유대인들 앞에 그들은 같은 형벌 아래 있었음을 암시하면서 불순종과 불신앙을 계속하던 유대인들로부터 노아로 말미암아 전파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자들의 색다른 사건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더 오래 참으실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긍휼을 베푸는 자를 지금 맞이했다. 그 긍휼을 수락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와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노아 시대에 있던 불순종하던 자들과 같이 분명히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1.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1) 전도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담과 맨 처음으로 언약하신 이후로 교회와 세상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창 3:15). 그리고 하나님이 자주 이동하라고 명하신 것처럼(창 11:5; 호 5:15; 미 1:3) 그리스도는 편협한 목적지가 아니라 각별한 동기로써 "나가셨다." 그는 나가서 "전파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분투하며 백성들에게 탄원하도록 에녹과 노아에게 능력을 주었고 그들에게 의를 전파했다(벧후 2:5).

(2) 듣는 자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죽고 육체와 영이 분리되었으므로 사도는 그들을 적당히 감옥에 있는 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저속한 라틴어 번역이나 가톨릭 교회 해석자들의 주장과 같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전파할 때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것은 아니다.

(3) 이 백성들의 죄는 이러하다. 그들은 그 말이 의미하는 대로 "반역하며" 따르지 않는 불순종이며 또한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참으심과 고통으로 인해서 더욱 악화되었다(노아가 방주를 준비하고 그들에게 전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임할 바를 명확히 경고하는 동안 하나님은 120년 동안 그들을 기다리셨다).

(4) 그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그들의 육체는 몰락되었고 그들의 영은 지옥에 던져졌다. 이를 가리켜 감옥이라 불렀다(마 5:25; 벧후 2:4, 5). 그러나 믿고 순종한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

2. 이러한 이야기 전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이러하다.

(1) 하나님은 사람들이 모든 세대에 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기 위해 지니고 있었던 모든 수단과 유리한 형편을 정확히 주시하고 계신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의 성령을 보냈으며 노아를 통해 밝히 경고했으며, 그들의 회개를 오랫동안 기다리신 옛 시대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인내가 죄인들을 오래 기다린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인내는 사라진다. 즉 그것은 헛되이 인간들을 항상 기다리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미치지 못한다.

(3) 불순종하는 죄인들의 영은 곧 그들의 육체에서 벗어 나와 구원이 있는 지옥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4) 가장 많이 가는 길이 결코 가장 좋고 지혜로운 것이나 따르기에 안전한 길이 되지는 못한다. 홍수에 빠져 지옥의 저주를 받은 팔백만보다 방주 안에 있는 여덟 명을 따르는 일이 더욱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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