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구약성경강해

[레위기 19장 주일설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레 19:18)

성령의 능력 2021. 2. 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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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레위기 19장 주일설교 중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행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행위를 해야 합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구원받은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레 19:18, 눅 10:25-37)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시대 우리의 문제는 나눔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 교회에서도 기복적인 복만을 내세우고 나눔이 없다면 역사적, 철학적인 맥락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다. 교회의 '예배'는 은혜의 나눔이며, '봉사'는 섬김의 나눔이다. '설교'는 복음의 나눔이며, '화해'는 사랑의 나눔이다. 교회가 이러한 나눔의 공동체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면 역사 속에서 맛을 잃은 소금처럼 심판을 받게 된다.

어언 1년의 [나눔의 공동체]의 한 해가 저문다. 교회가 제시한 대로'나눔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것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복음은 나누어 주는 은혜이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이 복음을 독점하고 나누지 않는다는 그것은 복음이 될 수 없다. 성경도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미친다(고전 9:16)고 증거 한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와의 나눔 속에 계시며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은 십자가의 정신이요 십자가의 정신은 나눔에 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졌다면 나눔의 정신이 교회의 본질이요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섬김과 나눔의 운동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심화된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눔의 복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 나눔의 복음으로만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늘 듣고 있지만 이 말씀대로 살기란 쉽지 않았고 더욱이 예수께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연약한 우리들이 실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으며 교회사를 통하여서도 그렇게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려고 애쓴 신앙의 구도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 가운데에서도 이처럼 작은 삶을 예수처럼 사는 분들이 있다.

 

생명을 주는 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셨다. 이처럼 영원한 생명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작은 것 하나, 피 한 방울이라도 필요한 이웃과 나눔으로써 주님의 사랑에 동참해야 한다. 원래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 내 생명, 내 육신, 내 삶,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것이다. 나누어도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을 가지고 나누는 것이다.

 

교회는 아름답게 다듬고 꾸미어 모여드는 사람이 많아지고 성서를 배우고 듣는 시간도 늘어나지만 나눔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오늘의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되돌아본 오늘의 교회에 주님은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웃사랑의 교훈은 '나눔'이며, 이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를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준엄한 명령을 여기서 발견한다. 한 해동안 '나눔'의 삶을 살지 못한 죄책으로 사마리아인의 나눔이 무엇이었나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편협한 이웃관을 가지고 본문의 율법사처럼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에 예수는 오히려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되물으신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찾기 전에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 나의 도움과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주고 만나야 한다. 본래 강도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는데 예수는 나의 이웃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치료해 주셨다. 이제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와 함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종교를 여러 가지 의식, 규례, 신조로 복잡하게 만들었으나 큰 선생들은 종교의 뜻을 간소화했다. 특별히 예수님은 신명기 65절과 레위기 1918절을 합치어 신앙의 큰 관심을 관계, 곧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두었다. 그 관계를 예수님은 사랑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함이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 풀어 간다. 성경의 심판 날 비유에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도운 것으로 상벌을 받을 것이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하였다(25:31-46).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함과 사람을 사랑함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연말연시에 자랑스럽게 즉석 자선을 베풀고 거창한 박애(博愛)의 정신으로 선행을 행하는 일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라는 분명한 자기 인식을 갖고 또 진실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기쁜 마음으로 가까이에 있는 지극히 작은 한 사람에게 베푸는 나눔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선행이다. 바로 내 몸을 이웃에게 나눔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특징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언젠가 최후의 심판 날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심판의 대 주재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엄격히 심판하신다. 그때 심판주는 우리가 쌓아 놓은 재물이나 사회적인 명예, 높은 학문을 기준 삼아 우리를 판단치 않으시고 우리가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쌍하고 소외된 형제를 찾아 우리가 얼마나 성실히 만나고 봉사의 손길을 벌렸는가 하는 것을 보시고 그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한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프랑스 토울의 주교였던 마르티누스(Martinus, AD.316-397)이다. 그는 원래 이교도의 아들로 출생하여 로마 군인이 되었다가 군생활 중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회심한 자였다. 어느 아주 추운 겨울날 마르티누스에게 애절하게 구걸하는 한 거지가 찾아왔다. 거지는 상당히 추워 온 몸을 떨고 있었다. 그때 마르티누스에게는 주머니에 한 푼의 돈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마르티누스는 그 거지를 외면치 않고 얼른 입고 있던 헌 외투를 벗어 그것을 반으로 찢어 추위에 떠는 거지의 등을 가려 주었다. 그날 밤 마르티누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 마르티누스가 그토록 사랑하던 주님이 천사들을 대동하시고 나타나셨는데 이상하게도 주님의 등에는 자신이 낮에 거지에게 걸쳐 주었던 반쪽 외투가 걸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 한 천사가 주님께 "왜 그런 보잘것없는 외투를 걸치고 계십니까? 누가 걸쳐 주었습니까?" 하고 묻자 이에 주님은 기쁜 목소리로 "내가 사랑하는 종 마르티누스가 내게 준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보이는 어려운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고 봉사하는 것은 곧 주님을 위하는 일이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된다. 한 해 52주를 마무리하는 지금, [나눔의 공동체](생명 보전)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지상명령이다. '가서 나도 이와 같이 하리라'는 다짐으로 하늘 백성 대열에 동참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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