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디도에게 문안 인사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 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가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장로와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무분별하게 장로나 감독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세워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교회에 거짓 이단들이 침투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교회에 거짓 이단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해야 합니다.
제목: “교회행정에 관한 권면” (딛 1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디도서 1:1-16
요절: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딛 1:9)
주제: 사도바울이 디도에게 권면한 순결한 믿음과 천국의 상속자로 권면하다
오늘은 디도서를 강해합니다. 사도 바울이 후배 및 제자인 디도(Titus)에게 보낸 목회에 대한 권면입니다. 본서는 바울의 순교 전인 AD 65년경에 보낸 서신으로 사상과 문체에 있어서 디모데전서와 가깝습니다. 목회자 디모데에게 첫 번 서신을 쓴 직후 본 서신을 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름이 “디도” 영어 발음으로 “타이터스 Titus”는 이 당시 로마의 유명한 장군이름이었습니다. 그 뜻은 “영화의 타이틀 title of honour”입니다. 참고로 디도(타이터스)장군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40년 후인 AD 70년 예루살렘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문자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멸망시킨 장군입니다. 또한 3년 반 동안 970여명의 유대인들이 마사다(Masada. 염해 바닷가에 있는 400미터의 돌산으로 천연요새지. 헤롯대왕의 겨울궁이 있던 곳)에서 최후의 저항을 한 독립군들을 멸망시키려고 공성(인공으로 성벽까지 언덕을 만든 성)을 쌓아 침공했지만 전날 밤에 유대인 지도자 엘르아잘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의 제안으로 독립군들은 로마의 노예나 성적 노예가 되는 대신 자살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영광스러운 죽음이 불명예보다 낫다”고 연설 하자 모두 찬성하여 967명 중 숨어서 목숨을 건진 두 명의 여인과 다섯 명의 아이들을 제외하고 모두 죽음을 당했습니다. 조개껍질(potsherd=ostraca)로 10명 전사가 뽑혀 이들이 950명을 죽이고 마지막 두 사람이 뽑혀 한 사람을 죽이고 마지막 한 사람만이 자살을 한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AD 73년 5월 2일 새벽에 마사다(Masada)를 공성을 통해 점령한 로마군은 이 모습을 보며 허탈하여 티토스(디도) 장군은 “오늘은 로마가 패배한 날, 이스라엘이 승리한 날”이라고 선언하고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6년 후 황제가 되어 로마 10대 황제로 2년 통치를 했습니다. 티투스가 즉위한 해(AD 79년) 8월에 그 유명한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스타비아이 등의 도시가 멸망하고 그 이듬해인 80년 로마에 사흘 동안에 걸친 대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을 파괴한 타이투스(디도)에게 내린 재앙입니다. 그는 AD 81년에 독살(열병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되고 도미티안 황제(Domitian, AD 81-96년 재임)가 취임하여 기독교를 박해했던 것입니다. 도미티안은 사도 요한을 밧모 섬으로 유배를 보낸 악명 높은 황제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재건되지 못한 채 2000년이 흐르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7년 반 동안 건축하여(대하 3:1-2) 봉헌한(BC 959년 7월) 솔로몬 성전(길이 30미터, 폭 10미터, 높이 14미터)은 BC 588년에 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파괴가 되었고, 70년이 지난 BC 518년에 성전이 재건되어 3년 만에 완공된 제2 성전(스룹바벨 성전, BC 515년 완공)은 BC 63년에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 의해 일부 파괴가 되었고, 그 폐허위에 헤롯 대왕이 BC 20년부터 성전을 재건하여 그가 죽은 후에도 아들 헤롯이 계속 성전을 건축하여 AD 64년경에 완공된 헤롯 성전은 타이터스(디도) 장군이 15년 혹은 7년 후인 AD 70년에 완전 파괴되어 오늘날에 이르며, AD 135년에는 로마 하드리언 황제가 이곳에 주피터(=제우스) 신전을 세웠습니다. AD 683년에 이슬람의 칼리프 오마르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성전산(Temple Mount) 주변을 청소하고 모하메드가 헤지라에서 죽은 후 이곳 예루살렘까지 혼이 와서 승천했다고 주장하면서 성지로 삼고, AD 691년에 이곳에 큰 사원(Mosque)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서 있는 황금돔(Dome of the Rock)입니다. 십자군 원정에 두 차례 가톨릭에 빼앗겼지만 결국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슬람의 영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제자인 디도가 이런 명칭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만난 디모데(아버지는 헬라인,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며 유대인, 행 16:1)는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행 16:3). 그러나 디도는 이방인이지만 할례를 받지 아니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3-5절에 의하면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할례를 반대한 것도 아닙니다. 디모데 경우는 유대인에게 유대인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할례를 받게 한 것이고, 디도 경우는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방법으로 반드시 할례가 필수가 아님을 보여준 것입니다. 디도의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은 헬라인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한 것입니다. 할례 문제는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디도서는 디모데전서와 같이 장로와 감독의 자격에 대해 교훈한 후, 구원의 목적으로서의 선행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교회 행정에 관한 권면, 2장에서는 제직에 관한 권면, 3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단자들은 철저하게 거절하라고 합니다.
1. 사도의 직무 (딛 1:1-4)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1-2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 δοῦλος Θεοῦ doulos Theou’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종 즉 노예라는 표현입니다. 지난주일 살핀 대로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전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사도 바울이 이제는 형제로 받으라고 함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항상 기억합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 명칭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자유민이었지만, 부르심을 받고 자원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구속(救贖)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어야 마땅했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크신 긍휼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ἀπόστολος δὲ ᾿Ιησοῦ Χριστοῦ apostolos de Iesou Christou’라고 합니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 one who is sent’라는 뜻입니다. 그는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그를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말하고 그의 명령대로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가 사도가 된 목적은 세 가지인데, ①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습니다(엡 1: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택한 자들을 위해 피 흘려 구속(救贖)하셨고 성령님께서는 그들을 다 중생(重生)시키십니다.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속죄의 주로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이를 것입니다.
②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해서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인간이 죄와 심판 아래 있다는 지식,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에 관한 지식, 종말에 관한 지식을 포함합니다. ‘경건함에 속한’이라는 원어는 ‘경건함에 일치하는’ 혹은 ‘경건함에 이르는’이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고 경건함에 맞는 지식, 경건으로 나타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요 17:3).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벧후 3:18). ③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입니다. 전도서 3:11은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죽지 않고 영생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존재로 창조함을 받았으나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 사함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미 원리적으로 성도들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2-3절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진실하십니다. 인간에게는 거짓됨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지극히 작은 거짓도 없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약속하셨다. ‘영원한 때 전부터’라는 원어(프로 크로논 아니오니온 πρὸ χρόνων αἰωνίων pro chronon aionion)는 ‘오래전부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및 대언자들에게 영생을 약속 혹은 암시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자기 때에’라는 원어(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 καιροῖς ἰδίοις kairois idiois)는 ‘자기 자신의 적절한 때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는 시간표(“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았으나 100세에 아들을, 그것도 한 명의 아들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17세에 한 계시적 꿈을 꾸었지만, 30세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9년 후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가나안으로부터 올라올 때에 그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마 16세쯤에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삼상 17:13), 30세가 되어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4, 5).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조급하게 생각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를 기다립시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때에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전도’(케뤼그마 κηρύγμα kerygma) 곧 선포 혹은 설교를 통하여 나타내십니다. 또 이 전도 혹은 설교의 일은 바울에게 그리고 사도들과 목회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모든 성도에게 맡겨 주신 책임입니다. 전도는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를 위해 헌금해야 합니다. 예배당도 복음을 위해 의미가 있을 뿐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할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로 말미암아 전도와 선교가 문이 막히는 상황인데 전도하는 일에 중단하면 안 됩니다.
4절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긍휼(mercy)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같은 믿음’이라고 표현하는데 원어(코이네 피스티스 κοινὴ πίστινς koine pistis)는 ‘공통적 믿음, 함께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공통적 믿음이 피부 색깔, 언어, 지방, 사회적 신분, 학력, 빈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 끈입니다. 이 공통적 신앙이 바로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옛 신앙’ 곧 성경적 신앙입니다. 이 공통적 믿음은 교회의 기초이므로 이 믿음이 없으면 교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기원합니다. 사도의 서신에서 항상 나오는 이 기원의 말은 의미심장하고 복된 말입니다. ‘은혜 charis’는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의 은혜이며, ‘긍휼 eleos’은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을 말하며, ‘평강(평화 eirene = shalom)’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에 근거하여 누리는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 그리고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자비)와 평안을 이미 받았고 또 항상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2. 장로와 감독의 자격(딛 1:5-9)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5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Crete)에 남겨둔 이유를 말합니다. 그레데(그레타 Κρήτης)는 그리스 반도 남쪽에 위치하며 그리스에서 최대의 섬이며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헬레니즘(Hellenism 헬라 사상의 인본주의)의 발상지며 주도는 이라클리오이며 면적은 제주도의 4.5 배(8336 km²)가 되며, 현재 인구는 38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디도는 그레데 섬에 있는 교회의 행정과 목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남아있습니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것’은 교리 사상의 면에서나 교회 행정과 질서의 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자들은 신앙 지식에서나 교회 행정에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또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그레데 섬의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했습니다. ‘장로’라는 원어(프레스뷔테로스 πρεσβυτέρος presbyteros)는 ‘나이가 더 든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신약교회의 지도자, 즉 평신도 시무 장로의 직분을 위해 사용됩니다. ‘장로들’이라는 말은 한 교회에 장로가 적어도 두 명 이상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한 사람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지하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6절부터 9절까지는 장로(시무장로)와 감독(목회자)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3장의 말씀과 같습니다.
6절 장로들은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①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blameless)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리사상이나 행위에 있어서 온전한 자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인도할 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인격, 곧 온전한 인격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행실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② 장로는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the husband of one wife). 이 말씀은 일부일처(一夫一妻)를 말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신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습니다. 결혼한 자는 부부 관계와 결혼 서약에 충실해야 합니다.
③ 장로는 또한 신실한 자녀들을 둔 자라야 합니다(having faithful children not accused of riot or unruly).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한 자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자녀들을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라고 표현합니다. 방탕은 자신의 의무나 책임, 삶의 목표 등을 잊어버리고 술과 음행 등 육신의 쾌락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불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부모에 대해 다 적용됩니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는 경건함과 거룩함, 선함과 진실함과 단정함입니다. 바른 신앙교육은 경건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을 만들 것이며, 그것은 믿음의 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부모라면 자녀를 성경말씀으로 바르게 충실하게 가르치며 믿음으로 양육했을 것입니다.
7-9절은 감독(a bishop) 즉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 목회자를 말합니다. 감리교나 성공회에서는 노회장이나 총회장으로 섬기는 분을 감독이라 호칭하며, 일부 침례교에서는 목회자들 가운데 지도자를 감독이라고 호칭하기도 합니다. 디도서와 목회 서신에서 감독은 오늘날 목회자를 말합니다.
7-9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감독’이라는 말(에피스코포스 ἐπίσκοπος episkopos)은 ‘돌아보는 자, 보살피는 자, 감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감독 즉 목회자는 교회를 돌아보고 보살피며 교인들이 바른 믿음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지도하는 직분입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 곧 교회의 관리자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재산이나 재정을 감독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를 감독하고 목양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는지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감독의 자격에 대해 열 가지 자격을 논합니다.
① 감독은 장로님들처럼 책망할 것이 없어야(blameless) 합니다. 그는 믿음에서나 행위에서나 결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는 흠 없는 온전한 신앙 인격자이어야 합니다. 노아처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a just man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s, and Noah walked with God.”(창 6:9), 아브라함처럼 완전한 자요 walk before me, and be thou perfect(창 17:1하), 욥처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a perfect and an upright man, one that feareth God, and escheweth evil” (욥 1:1, 8, 2:3) 이런 신앙의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② 감독은 또한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not selfwilled)라야 합니다. 바른 신앙인은 자기 뜻대로 무엇을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성경의 가르침대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존중해야 합니다.
③ 감독은 또한 급히 화내지 않는 자(not soon angry)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성냄으로 실수하기 쉽고 선한 일을 어그러뜨리기 쉽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약 1:20). 사람에게 정당한 의분(義憤)은 필요하고 비진리와 불의를 볼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깊이 생각한 후에 해야 하며, 오직 진리와 의를 위해서만 해야 하고,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하여 해서 쉽게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④ 감독(목회자)은 또한 술을 마시지 않는 자(not given to wine)이어야 합니다. 술을 마시는 자는 술 취하게 되며 실수하고 범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술취함을 명백히 정죄합니다(고전 6:9-10; 갈 5:21; 엡 5:18). 레 10: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고 합니다.
⑤ 감독은 구타하지 않는 자(no striker)이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성경이 명령하는 바이지만(잠 13:24; 22:15; 23:13, 14; 29:17), 그런 경우에도 격한 감정을 가지고 또 비열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되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인격적이게 해야 합니다.
⑥ 감독은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not given to filthy lucre)이어야 합니다. ‘더러운 이’는 정당하지 않는 소득을 말합니다. 성도는 고리대금이나 투기성 있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게으르게 먹으려 하지 말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려 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회 헌금을 정확하고 깨끗하게 관리하도록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⑦ 감독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a lover of hospitality)이어야 합니다. 그는 이기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남과 나눌 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롯처럼 나그네를 잘 대접했는데 알고 보니 천사였습니다(히 13:1).
⑧ 감독은 선을 좋아하는 자(a lover of good men)이어야 합니다. 온전한 인격은 선한 인격이며 선을 좋아하는 인격입니다. 선행은 참 믿음의 열매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⑨ 감독은 근신(sober))하며 의로우며(just) 거룩하며(holy) 절제하는(temperate) 자이어야 합니다. 근신하는 것은 어디에 중독되지 않고 깨어 있고 정신을 차려 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로운 것은 성경과 양심에 비추어 바른 길(正道 right track)로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한 것은 죄와 불결을 버리고, 세속과 구별하는 삶을 말합니다. 절제하는 것은 술이나 육신적 쾌락을 절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
⑩ 감독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굳게 붙드는 자이어야 합니다. 9절을 다시 번역하면, “가르침을 받은 대로의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 Holding fast the faithful word as he hath been taught,”입니다. 그래야 그가 다른 이들을 교훈하고 권면할 수 있고 또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을 거슬러 말하는 자를 책망할 수 있습니다.
이 자격론은 비난 목회자나 장로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마음에 깊이 새겨줄 말씀입니다. 성도라는 말 자체가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3. 복종치 않는 자들(딛 1:10-16)
10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11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대언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13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10-11절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당시 그레데섬의 각 성의 교회들에는(5절) 복종하지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복종은 성도의 미덕이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교훈에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치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대항하는 악입니다. 또 헛된 말은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헛된 말을 가리킵니다. 또 속이는 것은 마귀적인 죄악이며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 8:44). 모든 거짓말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되고 지옥에 들어갑니다(계 21:8; 22:15). 그런데 당시 교회들 안에 이런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교회들의 현실이었습니다. 특히 할례당 가운데 심했는데, ‘할례당’은 극단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은혜의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진리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이 있는 자는 복종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땅 위의 교회들은 옛 부터 문제가 많은 불완전한 교회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지식과 성화가 불완전하며 사탄의 활동이 맹렬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복종치 않는 자들은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 치고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세상의 이익이 삶의 전부입니다. 돈이 그들의 삶의 중심입니다.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친다’는 말은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참된 교사는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지만, 악한 교사는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집들을 온통 무너뜨립니다. 즉 그들은 믿는 가정들의 믿음을 어지럽히고 파괴시킵니다. 아마 그들은 집집마다 방문하며 그런 일을 했을지 모릅니다. 말의 영향력은 큽니다. 좋은 말은 좋은 영향을 주지만, 나쁜 말은 나쁜 영향을 주기에 이단은 누룩같이 퍼집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희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순종의 말, 헛된 말, 속이는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시킵니다. 그러므로 악한 말이 교회 안에서 퍼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교회에 앞세우지 말아야 하고, 그런 자는 교회의 직분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언행을 해야 합니다.
12-14절 “그레데인 중에 어떤 대언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레데인의 한 대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레데인의 풍습과 기질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남을 해치는 악한 자들이며 먹기를 좋아하고 게으름쟁이였습니다. 좋은 풍습이든지 나쁜 풍습이든지 사회 분위기는 그 사회의 사람들의 기질을 형성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백성이 있는 반면,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백성이 있습니다. 근면한 백성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백성이 있습니다. 그레데인들은 대체로 거짓되며 악하며 게을렀습니다. 그레데 교인들도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 교인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권면합니다. 아첨은 상대방의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만, 책망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성경은, 훈계를 듣는 것이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며 목의 금사슬이라고 말했고(잠 1:8, 9),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합니다(잠 27:5). 우리는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책망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책망을 통해 잘못을 고치고 바른 신앙 인격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들과,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잘못된 말을 듣는 것은 신앙을 해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망을 통해 그런 일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5-16절로 결론을 맺습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음식물에 있어서도 더러운 것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아직도 죄와 불결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대로 여전히 음식물들 중에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상 그들의 생각과 양심이 더러운 것입니다. 복종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公言)하지만, 행위로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말과 행위, 신앙고백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말과 행위가 일치하고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고백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가증한 일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였더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안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부인하니,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이었습니다. 신앙의 결과는 선행입니다. 물론 모든 선행이 다 참된 신앙의 증거는 아닙니다. 참된 신앙이 없이도 어느 정도의 선행이 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믿는 세계에서는 선행이 신앙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는 이가 선한 일을 버린다면 그는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고 바른 종이 되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 이 무더운 계절에 샘물과 같은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로들과 감독에게 주시는 말씀이 오늘 이 시간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어 하나님 앞에 책망 받지 않고 완전하며 성숙하고 거룩한 일꾼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코로나로부터 속히 벗어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린도후서 13장 주일설교말씀] 은혜, 사랑, 교통하심(고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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