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선택받은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구원하러 오심을 지키는 절기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인데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면서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대강절의 의미와 교회교육
송남순(교수, 한일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
교육은 형식적 장소에서 짜여진 교과과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비형식적 장에서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와 같은 비형식적 교과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특별히 종교교육은 많은 부분이 비형식적 교과과정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가장 크게 차지한 비형식적 교과과정이 바로 절기를 통한, 교회력을 통한 교육이다. 온 신앙의 공동체가 함께 지키는 절기 명절은 가장 자연스러운 교육 환경 속에서 신앙공동체의 일체감을 가져오고 가치와 전통을 심을 수 있는 삶을 통한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의 명절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보편화되고 교회 공동체에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쳐온 명절은 바로 성탄절이다.
매해 한해의 마지막인 12월이 되면 이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들이나 신앙하지 않는 자들이거나에 상관없이 한해의 마지막을 정리하려는 생각과 함께 성탄절,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고 마음이 설레게 된다. 특별히 근래의 성탄절은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에서보다는 백화점이나 상가를 중심으로 상업적인 전략과 함께 의미보다는 서구적인 화려한 상흔으로 오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아직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추수감사절도 지키지 않았는데, 세속 도시에서는 장사하는 크리스마스로 바쁘게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함께 편승하여 사고 파는데 바쁜, 장사하는데 바쁜 성탄 준비로 바삐 움직이고 있다. 이 기간마저도 내가 무엇을 가질 것인가의 관심 속에서 나의 탐욕을 채우는데 바쁘다. 이러한 사회현상 속에서 어떻게 성탄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해 갈 수 있을까가 교회의 교육의 과제이다. 교회교육 속에서 단지 하나의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정말 놀라운 비밀이 담긴 기독교의 본래적 의미를 부여하는 교육이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 성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성탄으로 이어지는 대강절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중요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강절의 의미를 찾아보자.
대강절(ADVENT)은 대림절 또는 강림절이라고 불리는 성탄일 전 4주일로 ‘오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절기에는 2000년 전 베들레헴 구유에 성육신하신 아기 예수에 대한 기억 속에서 그 의미를 되살리며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구체적인 성육신의 삶을 사는 기간이다. 그럼 오늘 우리는 베들레헴 구유에 성육신 하신 아기 예수님의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 글에서는 단지 누가복음 2장에 나타난 탄생 이야기에 기초해서 구유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아기 예수가 주는 의미 속에서 대강절의 현대적 의미를 찾고자 한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본문에서 보여 주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구유에 뉘었다는 데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물론 본문은 사관에 있을 곳이 없는 합리적인 이유를 호적하러 온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인 것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이는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오늘날도 이러한 당연한 것 같은 사실 때문에 인간의 악한 본성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허다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즉 ‘나'편리주의와 이기주의 때문에 ‘너’의 형편과 처지가 전혀 무관 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산모가 헛간에 있는데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첫울음을 터뜨린 사람의 아들이 구유에 뉘어졌는데도 자신의 방으로 옮겨 줄 너그러움이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구유에 누워 있는 사람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 너그러움이 없었기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뜻의 실현은 구유에 누인 사람의 아들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너’에 무관심한 결과는, ‘너'에 장님이 된 결과는 큰 기쁨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복음에 귀머거리를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 기쁨의 소식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에게 보였고, 들을 귀 있는 자들,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들려졌다. 그래서 그 기쁨의 소식을 받은 그들이 또한 평화의 소유자들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이 구유의 사람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기쁨을 간직한 자들이 된 것이다.
나는 가끔 성탄절 전야에 또는 대강절 기간에 어수선한 마음으로 성탄절 준비를 하고 행사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상념에 빠질 때가 있다. 우리끼리 모여서 별 성탄의 의미가 없는 커다란 츄리를 세우고 아름다운 전구로 환한 아름다운 불을 밝히고 우리끼리 모여 산타의 선물을 주고받고 우리끼리 모여 구유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재현하고 우리끼리 모여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춤추고 찬양하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을 때 아기 예수는 여전히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다. 아기 예수는 여전히 오늘도 구유에 누워 있는데 예수 없는 예수 생일 축하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성탄절은 축제로 즐거운 명절로 지켜져야 한다. 물론 베들레헴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재현하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축하하는 성탄의 전통도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성탄 축하의 형식들마저 사라져 버리면 우리는 그 의미를 찾을 기회조차 잃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성탄 축하의 경험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형식을 갖추는데만 너무 바빠서 진정한 의미를 놓쳐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세상 속에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셨다. 하나님은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통해 세상과 화해를 이루신 것이다. 그 당시 삶의 여건에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 목자들을 먼저 부르셔서 그들 중에 평화가 임하도록 하셨다. 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는 가운데 오늘도 구유에 누인 사람의 아기를 찾는 것은 또 그 아기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세상을 하나님께로 화해하게 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성육신의 뜻의 성취인 것이다.
그럼 대강절에 성육신하신 뜻의 성취를 위한 교회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첫째는 오늘 우리 주변에 구유에 누워 있는 사람의 딸이나 아들을 찾는 것이다. 올해는 유달리 우리를 놀라게 한 사건들이 많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은 대형참사이다. 국내적으로는 대구 가스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그치고 남과 북에 같이 찾아온 너무나도 큰 대형 홍수이다. 물론 북에서 당한 피해는 더할 수 없이 처참한 듯하다. 밖으로도 가까운 일본의 독가스 사고 대지진, 미국의 주정부 건물의 폭발사건, 극심한 살인 폭염. 세계 여러 나라의 대형 홍수들, 여러 종류의 전염병, 여러 나라에서 발생한 대지진 참사... 참으로 세기도 어려울 만큼의 사고 참사들, 천재지변들이 발생했다.
이 모든 참사들이나 천재지변들은 물론 셀 수 없이 많은 인명을 빼앗아 갔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혹 이들 중에 구유에 누인 자들은 없는가? 또 이러한 참사의 피해자가 아니라도 우리 주변에 철저하게 소외된 자들로 병들고 아픈 고통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은 자로 즉 구유에 누인 자로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은 없는가? 혹 교회 밖에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는 이러한 자가 없는가?
둘째는 대강절 의미를 찾도록 하는 교육과정의 구성이다. 여기서는 이를 5단계로 구상해 본다. 첫째, 주님의 재림과 그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다림과 소망의 단계, 둘째, '나'에 사로잡혀 '너'를 보지 못하므로 성육신의 실현을 방해해 온 자신에 대한 회개의 단계, 셋째는 성육신의 사랑을 나누는 사랑과 나눔의 단계, 넷째는 성육신의 은혜로 말미암은 너와 나의 만남과 하나님과 화해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너'와 '나'가 하나님과 세상이 하나 되도록 이끈 구유의 사람이 된 아기 예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축제이다.
셋째는 오늘 구유에 누인 사람의 아들 딸과 함께 하는 교회교육을 구체적으로 실시해 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위에서 말한 대강절 교육과정을 대강절 예배의식에 맞춰 제시해 본다. 먼저 교회교육의 대상이 어린이에 극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대강절 교육 프로그램은 전 신앙의 공동체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비록 한 시간대에 같은 자리에 모일 수는 없어도 같은 프로그램을 추진함이 바람직하다.
먼저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대강적에 사용하는 대강절 푸른 나무로 둥글게 엮어 만든 화환과 5개의 초를 사용하여 현대적 의미에서 대강절을 지켜보자. 대강적 화관은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한다. 원래 초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낸다. 이는 대강절 기간 동안 전 세대가 함께 하는 전체 예배를 통해서도 될 수 있고 또 교회의 각 기관의 예배에서도 실시할 수 있다. 예배에서 시작하여 공과공부를 통해 더 구체화하여 가도록 하자.
대강절 첫째 주일 :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임마누엘의 메시아 오심을 대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함을 나타내는 첫 번째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을 낭독한다. 이는 이 세상에서 지치고 곤고한 자들에게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소망이 되는 것이다. 활동을 통해 그분이 오시므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본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해 본다. (참고 성경본문 이사야 11:1-10)
대강절 둘째 주일: 회개와 빛의 촛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한 나의 모습을 회개하고 잘못된 제도를 비판하고 구유에 누인 사람을 찾아 나서는 의미로 회개와 빛의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을 읽는다. 교회 전 신앙의 공동체가 하나로 또는 각 기관별로 또는 개인별로 구체적인 대상을 정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에게 무엇으로 화해를 이를 것인지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섬김의 봉사, 물질의 공급, 병든 자의 치유, 필요로 하는 물건 제공, 사랑의 선물 등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다음 주일 크리스마스 츄리 밑에 '아기 예수께 선물' 이란 이름으로 드리도록 한다. (참고 성경본문 마태 25:41-45, 마태 5:13, 요한 8:12)
대강절 셋째 주일: 사랑과 나눔의 촛불
구유에 누인 사람을 찾아가(찾아갈 수 있는 대상일 때) 같이 사랑을 나누고 나의 몫을 나누는 실천의 의미의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 말씀을 읽는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상처 입은 자들, 굶주린 자들, 외롭고 쓸쓸한 자들과 같은 우리를 필요고 하는 자들을 외면해 온 것을, 또 그러한 이기적인 나를 방어해 온 것을, 약한 자들에게 불리하게 된 잘못된 제도나 관습을 정당화해 온 것을 회개하는 회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다음 우리 주변의 구유의 사람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요청되는 것은 나는 하나님 나라 궁궐의 왕자나 공주로서가 아니라 나도 철저하게 구유의 아기가 되어서 아니면 철저하게 한 밤중 들밖의 목자가 되어서 찾아가야 한다. 어떤 면으로도 나의 우월의식은 배제되어야 하고 진정한 의미로 구유의 아기를 섬기는 자세의 중요함이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먹다 남은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동정을 베풀고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주어진 몫을 형제자매와 나누는 것이다. (참고 성경본문 마태 25:34-40, 누가 1:46-56)
대강절 넷째 주일: 만남과 화해의 촛불
먼저는 '너'와 '나'의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와의 만남과 화해를, 그리고 '너' 꼭 '나'의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을 읽는다. 이 주일에는 만약 우리가 찾은 구유의 '너'가 같이 교회에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같이 참여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강제적으로 보다는 자원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교회에 데려 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므로 그가 하나님과 화해를, 그리고 세상과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참고 성경말씀 이사야 7:14, 누가 2:1-20,엡 2:13-14)
성탄절 : 감사와 환희의 축제의 촛불
구유에 누워 있던 ‘너’,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던 ‘너'가 화해를 이루고 사람의 아들 딸의 인격이 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 구유의 아기를 통해 세상과 화해를 이를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환희와 축제의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을 읽는다. 이 촛불은 구유가 변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을 축하하는 촛불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사건은 소외된 목자와 같은 인간들에게 또 이 세상에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 점에서 성탄절은 구유의 잔치, 축제가 되어야 한다. 적은 곳에서이지만 사람이 된 아기 예수의 사랑으로 본질적인 정의가 실현된 기쁨을 나누는 잔치이다. (참고 성경말씀 누가 2:14, 요한 3:16)
(구체적으로 예배에 이 교육과정을 사용할 때는 대강절 예배' 자료집 안에 나와 있는 전반적인 진행을 참고하여 개개인 교회의 형편에 맞게 다시 작성한다. 참고:대강절에서 성탄절까지, 장로회 신학대학 기독교교육연구원 편 pp. 54-57)
구유의 진정한 의미가 찾아질 때 대강절과 성탄은 일 년을 마무리하는 교회의 절기라기보다는 교회력을 새로이 시작하는 절기가 될 것이다. 이는 교회 안의 절기로 교회에 갇혀 있는 절기라기보다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하는 기쁘고 의미 있는 절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고대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리와 어린양이 같이 살 수 있는 나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장난칠 수 있는 나라,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있는 나라가 임할 것이다.
[대강절 주일 설교말씀] 대 강림절 메시지(출 15:22-27,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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