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신약성경강해

[누가복음 6장 예수님의 말씀] 12제자를 임명하심(눅 6:1-49)

성령의 능력 2021. 12. 1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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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심으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한 것 때문에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주인입니다.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생명을 고쳐주셨습니다. 

 

12제자를 임명하심(눅 6:1-49)

 

1-11, 안식일 문제

[1-2]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 . . .

안식일에[두 번째 첫 안식일에](전통본문)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했다(눅 4:16, 31).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아마 두 번째로 언급하는 첫 안식일이라는 뜻인 것 같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배가 고팠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3-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치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을 요청하였고 아히멜렉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다윗의 일행에게 주었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일을 그 사건에 비교하셨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10:25). 이런 뜻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7일이 다 나의 날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의 날로 지키는 것은 복되다.

[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 . . .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 그는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했다. 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12-16, 사도들을 택하심

[12]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 . . .

이때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열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 밤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던 것이다. 그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에 기도하셨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특히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산은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보통 시끄럽고 복잡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산은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6:6).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신비한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를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신 그는 참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14:13).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우리는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눅 18:1-7; 4:6-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13-16]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마태와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 하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그리고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이었다.

사도라는 원어(아포스톨로스)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2:20).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의 죽음의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기타 교리들과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서신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13),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14, 15). 거기에 사도들의 직무가 나타나 있고 그들을 세우신 주님의 의도도 드러나 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주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 진리를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는 일반 성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고 알기를 힘써야 한다. 목사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위해 쓰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은 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6:70), 마침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13:27) 주님을 배신하고,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26:15). 어떻게 이런 자가 열두 제자 중에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예수께서는 그를 통해 배신의 고통까지 경험하셨다.

17-19, 병자들을 고치심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보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처럼 보이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되어진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시간적으로 더 정확한 것 같다. 평지에라는 말은 산 언덕의 평평한 곳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 . .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는데, 그의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교훈을 행하며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8-19]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 . .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온 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를 만지는 모든 사람이 나았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가 행하신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증거들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자.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7일 토요일 안식일은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그 날에 물건을 사고 팔거나 육신적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주일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이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휴식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하기를 힘쓰자.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하겠는가! 또 모든 성도는 기도로 늘 승리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자세히 배우고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심령 속에 풍성하게 거하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임을 자신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그는 많은 병자들 그리고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정신적 질병도 고쳐주셨다. 그는 그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다. 그들이 병고침을 받은 사건들은 기적들이었다. 그는 죽은 자도 살려주셨다. 그는 그 외의 기적들도 행하셨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들이나 기적들을 행하신 사실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우리는 그의 행하신 기적들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확신하자.

20-26,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2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 육신적 의미뿐 아니라, 또한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본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잘 깨닫게 된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때 육신적 가난과 슬픔은 그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 된다.

초대 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사람은 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슬퍼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무의미함, 무가치함, 목적 없음과, 또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와 영생이 없음을 깨닫고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와 영생을 갈망하고 또 자신의 죄들과 죄성을 깨닫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래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오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구주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언제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고 우는 자가 웃게 될 것인가?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그의 긍휼을 구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때 천국 백성이 되고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복은 더욱 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육의 만족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23]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이다. 악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고, 또 그의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고난은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할 때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인데,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시대에도 참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주께서 가신 길이며 하나님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주의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24-25]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 . . .

예수께서는 화가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도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영원히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참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인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고통과 찔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졌다고 말하였고(고후 6:8), 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말했다(딤후 1:15-18).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교훈은 세상의 선생들의 교훈들과 달랐다. 예수님은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물질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둘 다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예수님의 교훈은 현세 중심, 세상 중심, 물질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 영혼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물질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진리의 말씀에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오직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고 행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27-36, 사랑하라, 대접하라, 자비하라

[27-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며 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그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세상에는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교훈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구약성경 레위기 19:18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예수께서는 이 율법의 말씀보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29-30]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그에게 끝까지 선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폭력이나 살인, 도적질이나 강도질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고 범죄의 처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주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다거나 그런 직업이 부당하다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한 것이나,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가복음 22:36에 보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심으로 칼의 필요성을 인정하셨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4에서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칼을 가지고 사회의 정의를 시행함을 말하였다.

다수의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경우에도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인권을 짓밟지 말고 그를 학대하지 말아야 하며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이 아니고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정당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진술하였다(23:2). 그러나 합법적 전쟁의 경우에도, 우리는 먼저 평화를 제안하고 불가피한 폭격 외에는 자제하고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의 행위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양보를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하며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사실, 이 세상의 악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26:52).

우리는 악한 자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로마서 12:17-21은 이 원리를 잘 교훈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며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5:6-8, 10).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 명령이 비록 실천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7:60).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을 자기 아들로 삼았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잘 참았다.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야 한다.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주께서는 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하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최선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대인관계에서도,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사랑과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하고 대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좋은 것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먼저 좋은 것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고전 13:5) 사랑은 남을 배려하고 대접하는 것이다.

[32-34]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고 하나님과 닮은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빌려주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빌려주느니라].” 주께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셨다. 성도가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가급적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의 교제는 순수한 것이 좋다.

[35-36]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빌려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천국에서 상이 클 것이다. 천국에서의 상은 지상에서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에 대한 약속으로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신다. 또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하자. 주께서 명하신 형제 사랑은 물론이고(13:34)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22:36-40) 원수까지도 사랑하자.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마땅한 일이다(18:24-33; 고후 5:15).

둘째로, 우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자. 주의 말씀대로(7:12) 이것이 성경의 중요한 내용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남에게 빌려주자. 특히 믿는 교우들 간에는 이자를 위해 돈을 빌려주거나 돈거래를 하지 말자. 그것이 율법의 정신이다(22:25; 25:35-37; 23:19).

넷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자. 그것은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5:45)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본받는 일이다.

37-49, 선을 행하라

[37-38]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치 말고 정죄치 말라는 교훈은 어떤 경우에도 판단치 말고 정죄치 말라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판단하고 책망하였고(2:11), 고린도전서에서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잘잘못을 판단하여 교훈했다. 특히 이단에 관계하여 우리는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에 대해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고 이단과 불의를 정죄해야 한다(16:17; 딛 3:10; 요일 4:1; 요이 10; 3).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금한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선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위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4:11-12,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더욱이, 우리는 부족한 죄인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어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았다. 이 세상에 흠과 부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흠과 부족은 우리 속에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남의 흠과 점을 볼 것이 아니고 용서하는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하지 말고 남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야 우리도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않고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며 또 하나님의 지속적인 용서를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남에게 주는 일에 대해 교훈하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준다는 말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받는 생활보다 주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도 남에게 주라고 명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또 주께서는 주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 풍성한 보상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이다.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39-40]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무지한 인도자가 무지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면 그 둘은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구덩이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와 그로 인한 낭패를 가리킨다. 바른 지식이 없이 남을 인도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선생에게서 좋은 것을 배우고 좋은 영향을 받는 자들은 복되다.

[41-42]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는 작은 결함을 비유하고 들보’[통나무]는 큰 결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자신의 큰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을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의 큰 결함을 깨닫고 그것을 고친 후에 남의 작은 결함에 대해 지적하고 고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부족을 고친 후에 남의 부족을 지적하고 권면해야 할 것이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지만(27:5), 단지 자신의 큰 결함이 없을 경우에 남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43-4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의 비유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를 가리킨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행위를 한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듯이, 사람의 인품은 그의 언행을 보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함과 선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46-49]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전통본문)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진대, 우리는 그의 교훈을 행하려 해야 할 것이다. 또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환난이나 재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흙 위에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자와 같다. 그는 환난의 날에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계명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교리적,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판단해야 하지만,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더욱이 우리는 부족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정죄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는 다 이런저런 부족이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부족과 흠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고 도리어 남을 너그러이 용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선한 행실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남에게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남의 부족과 결함을 지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부족과 결함을 살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큰 결함을 고친 자만이 남의 작은 결함을 지적하고 고쳐줄 수 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선한 행실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변화시켜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행실을 나타내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행실을 나타내는 자가 되자.

셋째로, 우리는 주의 교훈을 행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교훈을 행하지 않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교훈을 행하지 않는 자는 흙 위에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자와 같다. 그런 자는 환난의 날에 집이 부서지고 큰 낭패를 당하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의 교훈을 행함으로 그 진실함이 증거되고 또 튼튼한 바위 위에 견고하게 건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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